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갈 3:23)
인간에게는 세상에 태어나 죽기까지 살아온 자기 역사가 있다. 그리고 인간의 삶이 모두 다르다는 것을 생각하면 인간의 역사는 서로 다르다. 기독교인이 말하는 소위 믿음으로 살아온 삶 또한 사람마다 서로 다른 개인의 역사다.
이처럼 개인의 역사가 서로 다르다고 해도 공통적인 것은, 자기 역사를 선하고 의로운 자기 믿음으로 구축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자랑하는 개인 역사에는 열심히 행한 자기 믿음이 있을 뿐 죄와 저주는 없다. 죄에 갇혀 저주받은 자로 살아온 역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해야 할 중대한 문제는 하나님이 이러한 개인 역사를 인정하시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개인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으신다면 신앙생활을 몇 년을 했든, 잘했든 못했든 구원에 있어서는 무용지물이다. ‘내가 한평생 예수를 믿었다’라는 자랑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개인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성경적으로 생각해 봐도 분명한 사실이다. 바울은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갈 3:22)라고 말한다. 바울의 말에 따르면 인간의 역사는 죄에 갇혀 저주받은 자로 산 것이 전부다. 믿음으로 살았다고 인정받을 역사가 없다. 그런데도 자신이 살아온 믿음의 삶을 주장하는 것은 죄 아래에 갇힌 인간의 한계를 모르기 때문이다.
죄 아래에 갇힌 인간에게서는 선한 의가 나올 수 없다. 죄가 전부다. 따라서 ‘나는 믿음으로 살았다’라는 말은 죄에 갇힌 인간의 한계와 죄를 알지 못한 어리석은 자의 헛된 주장이다. 설령 믿음으로 산 시간이 있다고 해도 그 믿음이 삶에서 그대로 지속되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믿음을 지키고 믿음으로 사는 능력이 아예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인간의 역사가 개인의 삶에 따라 의로운 믿음으로 인정된다면 십자가 사건은 실로 무의미해진다.
믿음으로 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역사를 정당하다고 생각하기에 자신을 율법의 저주에 갇힌 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욥이 그런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힘쓰고 노력한 자기 역사를 근거로 자신을 죄에 갇힌 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인간임을 생각하면 자신을 죄에 갇혀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자로 인정하고 고백할 인간은 없다. 이것이 바울이 말한 믿음이 오기 전 율법에 매인 인간됨이다.
믿음이 오기 전의 인간은 율법을 실천하며 살아온 자기 역사를 자랑하는 것으로 믿음 없음을 드러낸다. 자신의 믿음을 참된 믿음으로 아는 것이 믿음이 없다는 증거다. 이처럼 믿음 없는 자는 서로 자기 역사를 끄집어내며 누구의 역사가 더 위대하고 큰 믿음인가를 비교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이것이 믿음 오기 전의 인간이라면 믿음이 온 후의 인간에게서는 반드시 율법에 갇힌 인간에게는 없는 현상이 나타난다. ‘나는 죄에 갇혀 죄만 행하는 저주받은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이 믿음으로 인한 현상이다. 자기 삶의 전부를 죄와 저주의 역사로 보는 새로운 안목이 열리는 것이다.
믿음이 온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믿음으로 오신다는 뜻이다. 따라서 율법 아래에 매인 인간에게 믿음이신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해서 율법을 실천하는 것을 믿음으로 알았던 우리의 모든 역사가 부인된다. 우리의 믿음과 행함이 부인되는 것이다.
그리고 언약을 이루신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믿음으로 드러나고 십자가의 의를 의지하는 것이 믿음이 오고 믿음에 붙들린 성도다. 그래서 성도는 예수님이 오셔서 행하신 십자가의 사건에 의해 자기 역사는 묻히고 예수님이 행하시고 이루신 일만 증거하게 된다. 이것이 믿음에 의해 새롭게 발생하는 성도다.
계시 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다는 것은, 율법을 지키고 행하면서 그것을 믿음으로 알았던 것이 사실은 죄에 갇혀 사탄의 유혹을 따라 살았던 것이었음을 깨닫고 인정하게 되는 때가 온다는 뜻이다. 참된 믿음이 되시는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간이 자기 믿음으로 행했던 모든 것이 무너지게 되는 것이 계시 될 믿음의 때다.
이처럼 율법 아래에 갇힌 우리에게 믿음이 오면 의와 자랑이었던 나의 믿음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것이 믿음에 의한 성도의 환난이다.
믿음은 결코 우리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는 것도 없다. 믿음으로 기도하고 믿음으로 예배하고 믿음으로 십일조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기 역사를 믿음으로 구축하고자 하는 율법 아래에 매인 인간의 욕망이다. 이것이 죄 아래 갇힌 인간의 모습이다. 결국 현대 교회가 외치는 믿음은 죄와 저주라는 인간의 실상과 한계를 알지 못하고 사탄에게 이용되는 믿음 없는 어리석은 자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신윤식 목사-
바울은 율법을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으로 말한다(갈 3:24). 율법이 몽학선생이 되어 하는 일은 우리가 의를 행할 수 없는 저주받은 자임을 가르치는 것이다. 저주받은 자로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우리의 저주를 대신 받으시고 죽으신 예수님을 만나게 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저주에 합류하여 주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몸으로 주의 일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한다.
인간은 자기를 사랑한다. 자기 사랑에서 벗어날 사람이 없다. 믿음으로 행한다는 모든 것도 자기 사랑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일들이다. 이러한 우리에게 믿음은 ‘너 자신을 사랑하지 말라’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거짓이었음을 드러낸다. 그리고 나의 역사에 내가 믿음으로 행한 것은 없고 믿음으로 오신 예수님이 행하신 일만 남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삶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고 주를 위해 살지 못하는 죄가 드러내시고 우리의 역사를 무너뜨리는 도구로 이용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삶이다. 나 자신을 죄와 저주의 존재로 인정하게 되고 무능한 자로 본다면 기뻐하고 감사해야 한다. 참된 믿음으로 오신 예수님의 작업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