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좌에 앉아 계신 어떤 분
"나는 곧바로 성령께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하늘에는 또 어좌 하나가 놓여 있고, 그 어좌에는 어떤 분이 앉아 계셨습니다. 거기에 앉아 계신 분은 벽옥과 홍옥같이 보이셨고, 어좌 둘레에는 취옥같이 보이는 무지개가 있었습니다. … 그 어좌에서는 번개와 요란한 소리와 천둥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어좌 앞에서는 일곱 횃불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일곱 영이십니다."(4,2-3.5)
절을 보면 '하늘에는 또 어좌 하나가 놓여 있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늘의 어좌는 '하느님의 통치, 주권 다스리심'을 의미합니다. 세상이 너무나 무질서하고 불안해 보이고, 로마 같은 특정 강대국이 절대 권세를 가지고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것 같지만, 역사를 다스리시는 이는 하느님이심을 기억합시다.
요한 묵시록에는 어좌라는 말이 40번 나옵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다르시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가 확실히 알기 원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역사를 방치하지 않고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통치하고 계십니다. '어좌가 놓여 있다'는 것은 갑자기 새로 생긴 것이 아니고, 이전부터 있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영원 이전부터 영원한 통치자로 우주와 역사를 다스리고 계셨습니다.
하느님의 어좌가 하늘에 있다는 말은 이 땅의 임금들이 앉아 있는 어좌 위에 하느님의 어좌가 있어서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위는 눈에 보이는 이 땅의 권세가 모든 것인 줄 알지만, 그 뒤에, 그 위에 보이지 않는 임금 중의 임금, 만군의 주님, 하늘 아버지게서 다스리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절에 보면 '어좌 앞에서는 일곱 횃불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일곱 영이십니다'라고 했습니다. '횃불'은 충만하고 완전하신 성령을 가리킵니다. 하느님께서는 영이십니다. 보이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인간이 볼 수 있는 언어로 하느님을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절에 보면 요한은 '앉아 계신 분은 … 같이 보이셨고'라는 표현을 씁니다. 어좌에 앉으신 하느님의 모습이 너무도 영광스럽고 아름다우시기 때문에 인간의 언어로 감히 제대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할 수 있는 최고의 인간적 표현으로 자기가 본 하느님의 모습을 묘사했습니다. 요한이 하느님을 묘사하기 위해 선택한 보석들은 하느님에 대한 놀라운 상징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벽옥'은 빛이 통과해서 비치는 투명한 수정의 일종으로써, 하느님의 완전한 거룩함을 상징합니다. '홍옥'은 불타는 듯한 붉은 보석으로 하느님의 정의를 상징합니다. '어좌 둘레에는 취옥같이 보이는 무지개가 있었습니다'라고 했는데, 취옥같이 보이는 무지개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은총을 상징합니다.
요한은 거룩하신 하느님, 정의로우신 하느님, 그러면서도 사랑과 자비심이 풍성한 하느님을 본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어좌에 다 나타나 있었습니다. 오한은 아주 구체적으로 하느님의 여러 가지 품성을 본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5절을 보면 어좌로부터 하느님의 당당한 음성이 들립니다. 그 음성이 너무도 크고 당당하여 마치 '요란한 소리와 천둥'이라고 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 어좌로부터 번개처럼 빠르고, 뇌성 같은 웅장함으로 선포될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 말씀들은 아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무도 그 말씀을 거역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위엄 있는 말씀을 통하여 장차 이 세상이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요한은 하늘의 문으로 들어가서 하느님의 어좌 앞까지 가서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목격하고 경험한 것만큼 말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하느님을 구체적으로 목격하고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대한 표현이 아주 구체적입니다. 진정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구체적으로 깊이 알아야 합니다.
예배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worship'은 'worth'(가치)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참된 예배는 예배드리는 대상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런데 예배의 대상이신 하느님을 잘 알지 못하고서 어떻게 그분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참된 예배자는 하느님께서 누구신가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제대로 인식한다면 우리는 하느님 앞에 엎드려 경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땅의 현실, 득세하는 포악한 로마제국과 박해받는 교회의 암울한 현실을 보며 가슴 아파하는 요한에게 주님께서는 눈을 들어 하늘 문을 보게 하시고, 그 가운데로 빛나고 높은 어좌에 앉으신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하십니다. 우리가 영적 침체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눈을 들어 하느님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예배의 감격을 회복하면 영적으로 다시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최우선순위는 에배를 통해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현실의 문제를 외면하라는 게 아닙니다.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도망가지 말아야 합니다. 다만 모든 시선과 관심을 현실문제에만 빼앗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문제를 보지만, 그 문제보다 크신 하느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보면 문제가 작게 보입니다. 하느님을 보면 절망 너머로 희망이 보입니다. 현실의 문제가 절망스럽게 우리를 누를 때마다 우리느 ㄴ더욱 간절하게 예배의 자리, 기도의 자리로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영의 눈을 들어 하늘 어좌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열왕기2권에 보면 엘리사를 잡으로 몰려드는 수많은 아람 군대를 보고 엘리사의 종 게하지는 벌벌 떱니다. 그런데 같은 현실을 보면서 엘리사는 담대합니다. 엘리사의 도움으로 영의 눈이 열린 종 게하지는 그제서야 엘리사가 담대할 수 있는 비밀을 알았습니다. 몰려오는 아람 군대보다 훨씬 많은 하느님의 군대를 보았던 것입니다. 성령의 눈을 가진 예배자는 수많은 문제를 직면하면서도 문제보다 크신 하느님을 보기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평화롭고 담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