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역에서 풀내가 난다. 미역도 등줄기 꼿꼿한 한그루의 바다나무다. 줄기, 잎사귀, 뿌리의 형태를 제대로 갖추고 척박한 바윗덩어리에 뿌리박고 포자로 번식하여 일가를 이루는 것이 나무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몇 년 전에 동남아의 어느 바다에서 스킨스쿠버로 물속 여행을 할 기회가 있었다. 소음 한 조각 들리지 않는 고요한 바다 속에 끝없이 이어지는 미역 숲이 마치 육지의 밀림과도 같았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미역을 식용으로 하지 않는 나라이니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처녀 숲인 셈이다. 물속에서 천천히 헤엄치며 미역이 물결 따라 일제히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을 꿈꾸듯 바라보았다.
재래시장에 나갔다가 참기름 바른 듯 반질거리는 미역을 사왔다. 철지난 미역이라 날것으로 먹기에는 좀 억세다 싶은데 '돌바리 미역'이란 말이 돌리려던 발길을 멈추게 했다. 스티로폼에 포장되어 있는 미역은 제대로 숨 한번 쉴 수 없을 것 같이 답답하게 보이지만 재래시장 좌판에 널린 미역은 치맛자락을 제 모양대로 펼친 듯 수더분해 보인다. 본디 미역이 세련된 것과는 좀 거리가 먼 탓에 산뜻하게 포장되어 조명 받는 일은 저도 익숙하지 않은 탓이다.
한꺼번에 먹기에는 너무 많은 양이라 남은 것을 빨랫줄에 ‘척’ 걸쳐두었다. 도망치려다가 옷자락이 걸린 도둑처럼 미역이 엉거주춤 걸려 있다. 열어 놓은 창으로 미역냄새가 솔솔 들어온다. 짭조름한 미역냄새와 갯냄새가 곧 고향냄새다. 미역냄새가 열어 놓은 길을 따라 녹슨 기억의 빗장이 ‘삐그덕 ~ 끽 ~’ 열리고 거기 고향의 앞바다가 푸르게 펼쳐진다.
파도가 심하게 치는 날에는 바위에 붙어 있던 미역들이 떨어져 파도 따라 헤엄을 친다. 그런 날이면 할머니는 긴 장화를 신고 장대에 솔가지를 매단 ‘미역장대’를 들고 바다로 나가신다. 할머니는 ‘미역낭구’ 잡으러간다고 말한다. 바다 가장자리까지 밀려온 것은 쉽게 건져내지만 곧 잡힐 것 같으면서 잡히지 않는 미역은 그것이 유난히 큰 것 같이 보여 더 애를 태운다. 처음 옷이 조금씩 젖을 때는 몸을 사리다가도 밀려오는 미역에만 신경 쓰다보면 옷 젖는 것쯤은 아랑곳하지 않게 된다. 어느 사이 허리춤까지 물속에 담근 채 장대 끝에만 온 힘을 기울인다.
부지런한 우리 할머니에게 질세라 ‘애자네 아지매’도 나오고, 혼자 사는 ‘미구할매’도 나온다. 파도는 성난 듯이 밀려와서 물고 온 미역과 해초들을 뱉어놓고 간다. 파도가 물거품을 물고 밀려나면 한 걸음 물러났던 할매들은 미역장대로 소용돌이치는 파도 속을 헤집는다. 그런 와중에도 할매들은 서로 안부를 묻는다. “아침은 무간나 ?” “허리 아픈 건 좀 어떠나?” 파도소리가 반쯤 잘라먹어 버렸어도 용케 알아듣고 대꾸한다. “인자 그만- 타~”
바다사람들의 언어는 단음절이다. 미역이 가미되는 무엇이 없이 혀에 감기는 떫은맛처럼 바다사람들의 관계도 양념치지 않은 원래 맛이다. 은근슬쩍 끼워 넣는 멋이나 혀에 붙는 달짝지근한 맛이라고 애저녁에 없는 무뚝뚝 투박하다. 언어가 생각과 문화를 대변하는 것이라면 바다사람들은 언어는 각설하고 직유다. 그들의 언어는 질박한 삶이 담겨있을 뿐이다. 그래서 바다사람들의 삶은 존재의 원형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성글게 짠 망태기에 물이 뚝뚝 떨어지는 미역을 머리에 이고 장대를 짚으며 돌아온다. 할머니는 마당 한쪽에 미역망태기를 던져 놓고 찬물에 후딱 밥 한 그릇을 비운다. 허기진 배를 채우고 나면 넓게 편 가마니에 미역을 붙인다. 할머니가 미역 붙이는 모습은 마치 새 각시에게 옷을 입히는 것처럼 정성스럽다. 미역 줄기를 중심으로 잡고 잎을 펴서 직사각형 틀 모양을 먼저 만들어 놓고 그 안을 채워 넣는 것이다. 잘 붙인 미역은 등줄기가 사람의 그것처럼 올 곧고 부챗살처럼 잎사귀가 잘 뻗어 있는 것이다. 뙤약볕에 쪼그리고 앉아 한 줄 한 줄 미역을 붙이노라면 어느새 마당이 검은 천을 깔아놓은 듯 가득하다.
다닥다닥 붙여놓았던 미역들은 햇볕에 오그라지면서 자연스럽게 간격이 벌어지고 그 일정하게 벌어진 골 사이를 철없는 나는 징검다리를 건너듯 폴짝거리면 뛰어다녔다. 이리저리 뛰어넘다가 발을 잘못 디뎌 ‘미끄덩!’ 미역위에 미끄럼 타기도 한다. 그럴 때면 여지없이 ‘선머슴’같다는 할머니의 타박을 듣지만 그 재미 난 일을 쉽게 관두지 않았다. 말라 들어가는 미역을 먼눈으로 보던 할머니의 삶은 얼마나 많은 징검다리를 건너왔을까? 아기자기 얹어 놓을 고명딸도 하나 없이 아들만 삼형제였던 자식들 중에 두 아들을 한해간격으로 하나씩 먼저 보내고 미역처럼 가슴이 오그라붙던 날도 할머니는 저렇게 뒤 돌아 앉아 남의 집 미역을 품앗이 붙였다.
읍내에서 이름 첫 글자만 대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는 드센 며느리의 비수 같은 폭언도 할머니는 저 오두마한 등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먹은 것이 소화가 되지 않는 다고 병속에 든 알싸한 맛의 소화제를 한 박스 사서 들어오다가 ‘남편 잡아먹고. 아들 둘 잡아먹고 또 누구 잡아먹으려고 소화제는 사다 나르느냐’고 악쓰며 던진 소화제 병이 마당에서 산산조각이 나던 날도 할머니는 묵묵히 말라 들어가는 미역 건사만 했다.
부서진 병조각이 햇살에 더 반짝이듯이 타인에게 감추고 싶은 것일수록 자신에게는 더 명료해지는 것이 곧 형벌이다. 미역이 뻣뻣하게 건조되어 물컹한 속성을 감추고 있는 것처럼 할머니의 팍팍한 표현 속에는 감추고 싶은 원죄인 듯 남편과 두 아들을 앞세운 곡진한 아픔이 말라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반질거리며 윤기 나던 미역은 해질녘엔 벌써 꼿꼿하게 줄맞춰 횡대로 늘어선다. 바삭거리는 미역을 할머니는 조심조심 마루에 쌓아 놓고서야 허리를 편다. 마루에 쌓여 가는 미역 단의 높이 따라 뿌듯해지는 할머니 마음! 늘 술에 절어 있던 용이 아버지가 그 퀭한 눈을 반짝이는 날은 읍내에 장이 서는 날이다. 아침 일찍 용이 아버지의 리어카가 마당에 와서 마루에 쌓여 있던 말린 미역을 실어낸다. 미역이 실려 나가고 부스러기만 휑하니 남은 마루는 쓸쓸하고 고즈넉하다. 미역이 쌓여있던 빈 마루를 한번 뒤돌아보고 대문을 나서는 할머니 등도 서운하다.
빨랫줄에 걸쳐놓은 미역이 모양새 없이 말라 들어간다. 내 할머니의 얼굴처럼, 빈 젖처럼 주글주글 볼품없이 익어간다. 대쪽같이 굳은 절개도 없으면서 살짝 손만 대면 ‘와삭’ 부러질 것 같이 곁을 내주지 않는다. 종잇장보다 얇은 미역을 지탱해 주는 유일한 무게가 미역귀이다. 소용돌이치는 파도를 가둬놓은 귀인가? 바다를 향해 귀를 열어놓은 듯 귓바퀴모양 같다. 미역귀에 붙은 끈끈한 점액이 아직 바다냄새를 피워내고 있다. 격랑을 온몸으로 받아냈던 거친 시간들이 거기 건조되어있다. 유영하는 물고기와 함께 했던 기꺼운 기억들도 박제되어있다. 웅얼웅얼 알아듣기 힘든 할머니의 넋두리 같은 노래 소리가 들려온다.
할머니가 파란곡절(波瀾曲折)을 뿌리고 추수한 ‘미역낭구’는 해산의 고통을 속을 헤쳐 나온 여인의 부름에 제 몸을 부풀려 녹놀해 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