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요 1:47)
참 빛이 세상에 와서 어둠을 비춘다.
어둠에게는 빛을 만나고 경험할 수 있는 놀라운 은총의 기회가 되지만 정작 어둠은 빛을 깨닫지 못한다.
그리고 빛을 알지 못한 어둠 그대로 살아간다. 인간이 자기 가치를 위해 빛이 되는 삶을 추구하면서도 빛을 깨닫지 못한 것은 어둠을 빛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바르고 선한 행실을 빛으로 알았기에 외부에서 빛이 와야 할 필요성이 없었다. 이것이 빛으로 인해 드러나는 어둠의 정체다.
빛은 어둠이 깨닫지 못할 것을 알고 어둠을 비춘다. 그 말은 어둠이 변하여 빛이 되고 세상을 비추는 빛 된 삶을 기대하신 바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둠이 깨닫지 못하는 빛으로 오신 이유가 무엇일까? 이것을 예수님과 나다나엘과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로 소개한다. 이에 대해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반응한다. 나사렛과 같은 천한 마을 출신의 사람에게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빌립은 ‘와서 보라’라고 권고하고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말씀한다. 간사함이 없다는 것은 속임수나 간계가 없다는 것인데, 이것을 나다나엘의 성품으로 이해하게 되면 참된 이스라엘 사람, 즉 하나님의 자녀 되는 조건은 인간의 성품이라는 뜻이 된다.
시 32:1,2절을 보면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한다.
이 말씀에 따르면 자신을 복 있는 자로 알아보기 위해서는 먼저 죄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죄를 알지 못하면 자신을 어둠으로 보지 않을 것이고, 허물의 사함을 받고 죄가 가려진 것의 복을 복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죄를 알게 되면 자기의 복을 위해 시도하는 모든 행위를 악으로 규정하게 된다. 이것이 마음에 간사함이 없는 것이다.
자신의 복과 구원을 위해 시도하는 모든 것이 사탄의 계략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자기의 행함이 아니라 예수님이 행하시고 이루신 십자가의 피를 바라보고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를 영접하는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이며 이스라엘로 증거된다.
하지만 죄를 알고 마음에 간사함이 없는 자녀 되는 것 또한 인간에게는 실패로 끝난다. 빛이 비취되 깨닫지 못한 어둠이 인간의 실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를 알게 되고 마음에 간사함이 없는 성도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힘과 의지로 인한 결과가 아니라 예수님이 함께 하시고 행하신 작업의 결과이다. 이것을 나다나엘과의 만남을 통해서 보여주신다.
그러면 나다나엘은 어떻게 속에 간사한 것이 없는 자로 인정받는가? 어둠에 속하여 빛을 깨닫지 못하는 인간 됨은 나다나엘도 예외가 아니다. 따라서 나다나엘 또한 자신의 힘으로 죄를 알고 마음에 간사함이 없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에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간사한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나다나엘은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고 묻고 예수님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라고 말씀한다. 즉 나다나엘은 예수님이 이미 아시는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우리가 누군가를 아는 인간적 관계의 앎이 아니다.
바울은 성도를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신 자로 말한다(롬 8:29). 따라서 성도가 어디에서 어떻게 산다 해도 하나님은 버리지 않으시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로 만들어 내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이루시는 하나님의 선한 일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신다는 것은 끝까지 버리지 않고 간섭하시면서 하나님이 정하시고 부르신 목적을 기어이 이루시는 관계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도는 오늘의 행위로 판단 받지 않는다. 오늘 어떤 사람으로 산다 해도 하나님이 아신 자로 허물의 사함을 받고 죄가 가려진 복이 함께 하는 관계에서 간사한 것이 없는 자로 여김 받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나다나엘이라는 인간을 보시고 ‘간사한 것이 없다’라고 평가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미리 아신 하나님의 자녀라는 관계에서의 평가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죄가 가려지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도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녀가 복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심으로 누릴 혜택이라는 점에는 성도는 이미 예수님으로 인해서 복 있는 자다.
그래서 성도는 ‘내 속에 간사한 것이 있는가 없는가?’를 살필 필요가 없다. 예수님이 미리 아시고 함께 하시는 자녀의 관계에서 내가 어떻게 사는가와 관계없이 간사한 것이 없는 참된 이스라엘 사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을 살피면서 믿음의 여부를 평가하고 정죄하는 것은 주가 미리 아시고 작업하신다는 것을 무시하고 자기 힘으로 신자 됨을 이루고자 하는 어둠으로 드러날 뿐이다.
우리가 어떻게 산다 해도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엡 2:5,6). 이것이 예수님이 미리 아신 성도에게 일하신 결과이다. 그래서 성도는 주의 일만 자랑하고 찬송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을 큰 일로 말씀한다(51절). 하나님의 사자가 인자, 즉 예수님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은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에게로 확고히 고정되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행함의 여부와 관계없이 주가 미리 아신 자에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성도는 주로 인해 주의 큰 일을 보게 되며 속에 간사한 것이 없는 자로 존재한다. 그러니 오늘의 나에 대해 실망하는 것은 어둠의 어리석은 행실이다.
-신윤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