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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와 백합
 
 
 
카페 게시글
역사 충의 지조의 시 스크랩 ◆ 죽도의 한, 정여립
은하수 추천 0 조회 68 23.08.29 10:46 댓글 8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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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3.08.29 10:50

    첫댓글 진안의 죽도(竹島)에 서실을 지어놓고 신분의 상하귀천에 얽매이지 않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매달 보름마다 모여서 향사례(鄕射禮)를 행한다는 명목으로 학문과 무예를 연마시켰다. 이 모임의 성격과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단순한 ‘계’의 성격을 넘어선 집회요 조직이었던 것은 평소 그의 사상과 행동으로 대충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평소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을 내세워 ~ 유교 윤리를 뒤집어 ‘인민에 해되는 임금은 죽여도 가하고, 인의가 부족한 지아비는 버려도 된다’ 하여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을 펴기도 했다. 왕조시대에 그 바탕을 전면 부정하는 참으로 혁명적인 사상이었다.

    내용은 대동계원들이 한강의 결빙기를 틈타 황해도와 호남에서 동시에 입경하여 대장 신립(申砬)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병권을 장악하기로 하였다는 것이었다. 조정에서는 즉각 군사를 풀어 대동계의 지도자 정여립을 추적했고, 제자로부터 사건의 추이를 전해들은 정여립은 아들과 함께 죽도로 피신했다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공식 역사는 그의 죽음을 ‘자결’로 기록하고 있지만, 그를 체포하러 왔던 관군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주장이 사건 직후부터 줄곧 제기되어왔다.

  • 작성자 23.08.29 11:09

    시인 고은은 노작(勞作) 『만인보』(萬人譜)에서 ~ 무식이 배짱입니다. 성리학 주리노선은 천지 음양 귀천 상하의 계급노선. 그런데 좌파 주기철학은 일체 만물의 평등노선, 이 화담 율곡 주기론을 이어 정여립은 그것을 더 발전시켜 허균의 자유주의와는 또 달리 앞장 선 천하 평등노선을 강화, 주자는 다 익은 감, 율곡은 반쯤 익은 감, 또 누구는 숫제 땡감이라고 원조와 은사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평가, 그는 동인계열로, 정철과 대결하다가 그놈의 늪 같은 권세 때려치우고 낙향,

    천하는 공공한 물건, 어디 정한 주인이 있는가, 이 말은 곧 존왕주의 주자학을 마구 거역함이 아닌가 어디 그뿐인가 인민에 해되는 임금은 살함도 가하고 인의 부족한 사대부 거함도 가하다. 이런 칼 휘둘러치듯 하는 우렁찬 말 듣고 오종쫑한 재상 도학자들 한꺼번에 크게 감동키도, ~ 대동계 세워 양반 양민 상민 사천 노비 할 것 없이, 상놈이 양반더러, 먹쇠가 마님더러 야 자 해도 되는, 대동계 세워 문무쌍전의 공부시키니, 때마침 왜구 침노하는 갯가 나가서 다 격퇴, 임진왜란은 이미 그때부터 그 이전 신라 고려 때부터다. 호남 전역과 해서 전역 대동계 식구 늘어나서 임진왜란에 대비한 ~

  • 작성자 23.08.29 11:10

    한데 이 민족자결 세력 늘어나자 조정의 정철은 대동계 일당과 선비 1천여 명을 검거합니다. 천하 대역죄 먹여 홍살문턱 닳았읍니다. 정여립은 막판에 진안 죽도에서 아들하고 자결한 것이 아니라 서인 관헌 암살패에 의해 처참하게 죽은 것입니다. ~ 3백 년 뒤에나 5백 년 뒤에나 그 이름이 알려질 뿐이라고,

    이것이 전 민족의 항성을 묻고 변성만 키우는 짓거리라고 한탄하는 ~ 단재의 말마따나 ~ 금강 상류의 두 물줄기가 만나는 곳에 이루어진 내륙의 섬 죽도. 물 있고 경치 좋아 가까운 고장 사람들에게는 여름 한철 부담 없는 휴식처가 되는 곳이지만, 여기 얽힌 사연을 아는 이들에게는 무심한 마음으로 밟을 수 없는 땅이다. 갈증보다 심한 목마름으로 어두운 시대를 살아갔던 한 사내의 좌절된 꿈이 묻힌 곳이 여기가 아닐는지. 혹은, 미완의 혁명이 전설이 되고, 일화가 되고, 야담이 되어 이따금 풍편에나 떠도는 곳이 죽도가 아닐는지·····

  • 작성자 23.08.29 12:03

    송강(松江)정철(鄭澈의 이중인격 /
    송강은 생전의 80여수의 주옥같은 시를 지었지만 백미는 <성산별곡> <사미인곡> < 속미인곡> <관동별곡> ,이 4수의 한글 가사다. 세종대왕이 한글이라는 원석을 캤다면 송강은 이 원석을 갈고 다듬어 빛나는 보석을 만들었다고 문학평론가들은 극찬을 ~ 이어령 박사는 한국의 셰익스피어라 치켜세운다. " 잠시라도 임 생각을 잊고 시름을 달래려 해도/ 마음 속에 맺혀 있어 뼈속까지 사무치니/ 편작같은 명의가 열이나 온들 이 병을 고칠 수 있으랴." 사미인곡(思美人曲)의 한 구절, 제목만 보면 연시로 보이지만 사실은 임금을 향한 신하의 충절을 노래한 것, 조선 14대 선조다. 정철은 1536년 종로 청운동에서 금수저를 ~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어 권세를 얻었지만 훗날 을사사화에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다. 정철의 맏형은 곤장을 맞아 장독(杖毒)으로 죽고 아버지는 유배지를 전전, 열살 정철은 마침내 아버지가 사면되어 할아버지 산소가 있는 담양군 정착 27세로 장원급제로 명종의 총애를, 나중에 미운털이 박혀 낙향한다.

  • 작성자 23.08.29 12:04

    명종이 죽고 선조가 왕위에 오르자 3년동안 초야에 파묻혀 있던 정철이 인사권을 쥔 이조좌랑으로 중책을 맡아 어느새 서인(西人)의 실력자로 자리잡으며 붕당정치의 문을 연다. 43세 때인 1578년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되나 진도군수의 뇌물 사건으로 반대파인 동인 (東人)의 탄핵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갔다. 동인에 대한 원한이 뼈에 사무쳤다.
    1589년 선조 22년에 아직까지도 역사에서 명확하게 정리되지 못해 아리송한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터진다. 동인의 득세에 불안을 느낀 선조가 왕권을 강화하려고 꾸민 조작 사건이라는 설도 있다. 아무튼 선조가 정철의 가슴속에 숨어 있는 악마를 본 것인가, 그에게 우의정 자리를 주고 수사 전권을 맡긴다. 관군이 진안에 있는 정여립을 잡으러 가자 정여립은 자결하고 만다. 잔혹한 기축옥사(己丑獄事)가 피바다를 이룬다.

  • 작성자 23.08.29 12:09

    400년이 지난 지금도 나주시 왕곡면 광산 이씨 집성촌 에서는 여자들이 식칼로 고기를 다질 때 "정철 쾅쾅 정철 쾅쾅 ...." 어금니를 깨물며 이렇게 중얼거린다. 정여립과 서찰을 주고받은 사람, 그저 아는 사람 등등, 정철은 2년에 걸쳐 1000여명 선비들을 잔혹하게 국문해서 죽였다. 원한에 사무쳐 동인 선비들을 작살낸 것이다. ~ 전해오는 얘기로, 정철은 술주정뱅이로 임금의 부름에도 술이 덜 깨어나 못 나간 적도 있다. 또 말이 정제되지 않고 직설적으로 함부로 해 수많은 사람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

    가사 문학의 일인자를 부정하는 평자도 많다. <사미인곡> <속미인곡> 둘 다 한글로 교언영색한 '아부성 용비어천가' 라는 것. ~ 더구나 <관동별곡> 은, 그해 강원도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은 아사자가 속출하는 데 관찰사라는 작자가 가마를 타고 술을 마시며 산천경계 둘러보고 시를 짓다니! ~ 결국 정철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조정에 왜군이 모두 철수했다고 허위 보고를 해 선조로부터 파직 당했다. 그후 강화도를 떠돌다 59세에 굶어 죽었다.

  • 작성자 23.08.29 12:24

    1551년 아버지가 유배지에서 풀려나자 담양 창평으로 이주. 임억령에게 시를 배우고 김인후, 송순, 기대승 같은 당대의 석학들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이이, 성혼, 송익필 같은 유학자들과도 친교를 - -27세 때 과거에 급제하고 사헌부 지평을 거쳐 함경도 암행어사를 지낸 뒤 32세에 이이와 함께 - 사가 독서했다. 40세에 벼슬을 버리고 창평으로 낙향했다. 그 뒤 몇 차례 벼슬을 제수 받았으나 사양하고 43세 때 장악원정을 배수하고 조정에 나왔다. 45세에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그 유명한 - “관동별곡”과 「훈민가」 16수를- 그 후 정치적인 부침을 거듭하다 50세에 창평으로 네 번째 낙향을 했다. 이때 「사미인곡」등의 기사와 시조, 한시 등 주옥같은 작품들을 남겨 놓았다.

    -54세에 정여립 모반 사건이 일어나자 우의정으로 발탁 되었다. 서인의 영수로 동인의 주요 인물들을 모조리 제거했다. 숙청된 인사가 1000여명이 이르렀다. 이를 기축옥사다. 호남지역 사류들이 이 옥사에 많이 연좌되어 이때부터 반역의 땅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됐다. - -56세에 세자책봉 문제를 건의하다 이산해의 모해로 선조의 노여움을 사 파직되었고 명천으로

  • 작성자 23.08.29 12:25

    유배되었다. 진주와 강제로 이배되었다. 57세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귀양에서 풀려나 평양에서 왕을 맞이하고 의주까지 호송했다. 경기도, 충청도 관찰사를 지내고 다음 해에 사은사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그러나 동인의 모함으로 사직하고 강원도 송춘에 우거했으나 생계조차 어려워 58세 일기로 죽었다.

    -정철의 큰 누이는 인종의 숙의(淑儀)이고 막내 누이는 계림군(桂林君) 유(瑠)의 부인이다. 술을 그렇게 좋아했던 풍운아 정치의 숱한 질곡 속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술에 의지해 잊으려고 했다. 죽어서도 관직이 삭탈되고 회복이 되었다. 만은 정적을 만들고 천고의 간흉이라는 소리도 했으나 유려한 필치로 풀어낸 주옥같은 시문들은 영원히 남아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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