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도의 한, 정여립 정여립(鄭汝立, 1546~1589). 그는 누구인가? 이른바 ‘정여립의 난-정여립 모반사건’의 주모자이자 이 사건의 뒷갈망을 위해 이어진 기축옥사(己丑獄事)의 피바람을 불러일으킨 장본인. 그리하여 남도 사림의 씨를 말리고 호남을 반역향으로 낙인찍게 만들어 조선 중기 이후 호남 사람들의 정치·사회적 활로를 막아버린 인물, 이것이 조선 중기의 사상가 정여립에 대한 근대 이전의 평가다. 정여립은 동래 정씨(東萊鄭氏)의 후손으로 전주 남문 밖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희증(希曾)이 첨정(僉正) 벼슬에 올라 사대부 반열에 들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살빛이 검붉고 기골이 장대하여 힘이 세었다. 자라면서 체격도 늠름한 장부가 되었으며 통솔력이 있고 두뇌가 명석하여 경사(經史)와 제자백가에 통달하였다. 명종 22년(1567) 진사가 되었고, 선조 3년(1570)에 대과에 급제하였다. 율곡(栗谷)을 존경하여 그의 문하에 드나들었고, 율곡 또한 그의 학문과 인물됨을 사랑하였다. 우계 성혼(牛溪 成渾) 역시 그의 재주를 아껴 칭찬해 마지않았다. 이들 두 사람의 각별한 후원과 촉망으로 일세의 이목을 끌었다. 말하자면 서인의 선두주자로서 두각을 나타낸 것이었다. 선조 16년(1583) 예조좌랑에 올랐고, 이듬해엔 홍문관 수찬에 제수되었다. 이로써 출세가도가 활짝 열린 셈인데, 어쩐 이유에서인지 그는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고 만다. 그리고 선조 18년(1585) 좌의정 노수신(盧守愼)의 천거로 다시 홍문관 수찬이 되어 벼슬길에 올랐을 때는 동인에 가담하여 서인이었던 박순(朴淳), 성혼, 한 해 앞서 타계한 율곡 등을 공공연히 공격했다. 이 때문에 서인들의 원망과 노여움이 그에게 집중되었을 뿐 아니라 선조의 미움마저 사게 되었다. 당을 바꾸고 스승을 배반했다는 세간의 비난과 선조의 불신은 동인 핵심 인물의 하나였던 그가 동인이 집권한 조정에 더 이상 머물 수 없는 상황을 야기했다. 마침내 사직을 청한 정여립은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는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비록 한양을 떠났지만 그는 여전히 집권당의 실력자였고, 세간의 비난 따위에 위축될 만큼 소심한 인물도 아니어서 자신의 생각에 따라 소신껏 행동했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진안의 죽도(竹島)에 서실을 지어놓고 신분의 상하귀천에 얽매이지 않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매달 보름마다 모여서 향사례(鄕射禮)를 행한다는 명목으로 학문과 무예를 연마시켰다. 이 모임의 성격과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단순한 ‘계’의 성격을 넘어선 집회요 조직이었던 것은 평소 그의 사상과 행동으로 대충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평소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을 내세워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겠느냐고 주장했으며,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으며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는 유교 윤리를 뒤집어 ‘인민에 해되는 임금은 죽여도 가하고, 인의가 부족한 지아비는 버려도 된다’ 하여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을 펴기도 했다. 왕조시대에 그 바탕을 전면 부정하는 참으로 혁명적인 사상이었다. 죽도 전경 금강 상류 두 물줄기가 만나는 곳에 자리해 마치 섬처럼 보인다. 먼 옛일은 잊혀진 채 지금은 이 고장 사람들의 여름 휴식처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결국 그의 이러한 과격성과 급속한 대동계의 확산은 정권에서 소외되어 있던 서인들에게 맞춤한 공격거리를 제공했고, 급기야는 모반사건으로 확대되어 그를 죽음의 길로 몰아넣고 쟁쟁한 동인계열 인사들을 비롯한 호남 사림을 쑥밭으로 만들었다. 기축년, 즉 1589년 황해도에서 현직에 있던 관찰사와 몇몇 군수의 이름으로 역모의 고변(告變)이 있었다. 내용은 대동계원들이 한강의 결빙기를 틈타 황해도와 호남에서 동시에 입경하여 대장 신립(申砬)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병권을 장악하기로 하였다는 것이었다. 조정에서는 즉각 군사를 풀어 대동계의 지도자 정여립을 추적했고, 제자로부터 사건의 추이를 전해들은 정여립은 아들과 함께 죽도로 피신했다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공식 역사는 그의 죽음을 ‘자결’로 기록하고 있지만, 그를 체포하러 왔던 관군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주장이 사건 직후부터 줄곧 제기되어왔다. 아무튼 그의 ‘자살’로 역모사건은 사실로 굳어졌다. 그리하여 이 사건의 조사와 처리가 정국의 핵심으로 대두되었고, 서인이었던 송강 정철(松江 鄭澈)이 위관(委官)에 임명되어 그 책임을 담당했다. 사건의 처리는 가혹하게 진행되었다. 설사 사건과 아무 관련이 없을지라도 정여립과 한두 번 편지를 주고받은 사람들까지 사건에 연루되어 무참히 투옥되고 처형당했다. 동인의 거두 동암 이발(東岩 李潑)과 그의 형제들, 남명 조식의 고족(高足)으로 뛰어난 학식을 지녔던 최영경(崔永慶), 호남 사림의 중망을 한몸에 모았던 곤재 정개청(困齋 鄭介淸), 동인으로 대신의 지위에 있으면서 사건 초기 위관을 맡았던 정언신(鄭彦信) 등이 죽임을 당했으며 동강 김우옹(東岡 金宇顒), 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 내암 정인홍(來菴 鄭仁弘), 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 등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인물들도 유배의 길에 올랐다. 사건은 이 정도에서 끝나지 않고 이후 3년여에 걸쳐 점차 확대되면서 정여립과 친교가 있었거나 동인이라는 이유로 무려 1천여 명에 이르는 선비들이 처형되는 대옥사로 발전하였다. 이른바 기축옥사의 전말이다. 기축옥사의 결과는 황폐했다. 이로써 몇몇 가문은 아예 문을 닫다시피 했으며 호남 사림은 철저히 결딴이 났다. 동시에 호남지방은 반역향으로 지목되어 중앙 정계에서 소외되었으며, 이후 오랫동안 이 고장 출신들은 정치·사회적 냉대와 차별을 감내하며 울분을 삼켜야 했다. 또한 정국이 뒤바뀔 때마다 기축옥사 문제는 중요한 현안으로 떠올라 오래도록 당쟁 전개의 핵심 쟁점이 되었다. 심지어 사건과 관련하여 대립하는 입장에 섰던 당사자의 후손들은 세상이 수십 번 바뀐 오늘날까지도 서로 혼인조차 하지 않고 있으니 그 답답함을 더 말해 무엇하랴. 과연 정여립이 반란을 도모했는지의 여부는 분명치 않다. 그의 혁명적 사상과 행동이 역모사건의 빌미를 제공한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최근의 연구 결과는 정여립 모반사건이 조작이라는 데 거의 일치하고 있다. 요컨대 기축옥사는 율곡의 죽음을 계기로 동인들의 손으로 넘어간 정국의 주도권을 일거에 만회하기 위해 서인 측에서 변절한 정여립의 의심스런 사상과 행동을 꼬투리삼아 일으킨 혐의가 짙은 대재난이었다. 그렇다면 다시, 정여립은 어떤 인물인가? 우리는 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시인 고은 선생은 그의 노작(勞作) 『만인보』(萬人譜)에서 정여립을 이렇게 평가했다. 일자 한자 늘어놓겠읍니다 무식이 배짱입니다. 성리학 주리노선은 천지 음양 귀천 상하의 계급노선입니다. 그런데 좌파 주기철학은 일체 만물의 평등노선입니다. 바로 이 화담 율곡 주기론을 이어 정여립은 그것을 더 발전시켜 허균의 자유주의와는 또 달리 앞장 선 천하 평등노선을 강화합니다. 주자는 다 익은 감이고 율곡은 반쯤 익은 감이고, 또 누구는 숫제 땡감이라고 원조와 은사 할 것 없이, 그리고 선배 따위 닥치는 대로 평가합니다. 그는 동인계열입니다. 정철과 대결하다가 그놈의 늪 같은 권세 때려치우고 낙향해버립니다 . 천하는 공공한 물건이지 어디 정한 주인이 있는가, 어허 위태위태한지고 이 말은 곧 존왕주의 주자학을 마구 거역함이 아닌가 될 말인가. 어디 그뿐인가 인민에 해되는 임금은 살함도 가하고 인의 부족한 사대부 거함도 가하다. 이런 칼 휘둘러치듯 하는 우렁찬 말 듣고 오종쫑한 재상 도학자들 한꺼번에 크게 감동키도 했읍니다. 그는 대동계 세워 양반 양민 상민 사천 노비 할 것 없이, 상놈이 양반더러, 먹쇠가 마님더러 야 자 해도 되는, 대동계 세워 문무쌍전의 공부시키니, 때마침 왜구 침노하는 갯가 나가서 다 격퇴했읍니다. 임진왜란은 이미 그때부터입니다. 그 이전 신라 고려 때부터입니다. 호남 전역 해서 전역 대동계 식구 늘어나서 임진왜란 전 백성이 모여들었읍니다. 한데 이 민족자결 세력 늘어나자 조정의 정철은 대동계 일당과 선비 1천여 명을 검거합니다. 천하 대역죄 먹여 홍살문턱 닳았읍니다. 정여립은 막판에 진안 죽도에서 아들하고 자결한 것이 아니라 서인 관헌 암살패에 의해 처참하게 죽은 것입니다. 3백 년 뒤에나 5백 년 뒤에나 그 이름이 알려질 뿐이라고, 이것이 전 민족의 항성을 묻고 변성만 키우는 짓거리라고 한탄하는 단재의 말마따나 금강 상류의 두 물줄기가 만나는 곳에 이루어진 내륙의 섬 죽도. 물 있고 경치 좋아 가까운 고장 사람들에게는 여름 한철 부담 없는 휴식처가 되는 곳이지만, 여기 얽힌 사연을 아는 이들에게는 무심한 마음으로 밟을 수 없는 땅이다. 갈증보다 심한 목마름으로 어두운 시대를 살아갔던 한 사내의 좌절된 꿈이 묻힌 곳이 여기가 아닐는지. 혹은, 미완의 혁명이 전설이 되고, 일화가 되고, 야담이 되어 이따금 풍편에나 떠도는 곳이 죽도가 아닐는지····· [출처] ◆ 죽도의 한, 정여립 |
첫댓글 진안의 죽도(竹島)에 서실을 지어놓고 신분의 상하귀천에 얽매이지 않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매달 보름마다 모여서 향사례(鄕射禮)를 행한다는 명목으로 학문과 무예를 연마시켰다. 이 모임의 성격과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단순한 ‘계’의 성격을 넘어선 집회요 조직이었던 것은 평소 그의 사상과 행동으로 대충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평소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을 내세워 ~ 유교 윤리를 뒤집어 ‘인민에 해되는 임금은 죽여도 가하고, 인의가 부족한 지아비는 버려도 된다’ 하여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을 펴기도 했다. 왕조시대에 그 바탕을 전면 부정하는 참으로 혁명적인 사상이었다.
내용은 대동계원들이 한강의 결빙기를 틈타 황해도와 호남에서 동시에 입경하여 대장 신립(申砬)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병권을 장악하기로 하였다는 것이었다. 조정에서는 즉각 군사를 풀어 대동계의 지도자 정여립을 추적했고, 제자로부터 사건의 추이를 전해들은 정여립은 아들과 함께 죽도로 피신했다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공식 역사는 그의 죽음을 ‘자결’로 기록하고 있지만, 그를 체포하러 왔던 관군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주장이 사건 직후부터 줄곧 제기되어왔다.
시인 고은은 노작(勞作) 『만인보』(萬人譜)에서 ~ 무식이 배짱입니다. 성리학 주리노선은 천지 음양 귀천 상하의 계급노선. 그런데 좌파 주기철학은 일체 만물의 평등노선, 이 화담 율곡 주기론을 이어 정여립은 그것을 더 발전시켜 허균의 자유주의와는 또 달리 앞장 선 천하 평등노선을 강화, 주자는 다 익은 감, 율곡은 반쯤 익은 감, 또 누구는 숫제 땡감이라고 원조와 은사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평가, 그는 동인계열로, 정철과 대결하다가 그놈의 늪 같은 권세 때려치우고 낙향,
천하는 공공한 물건, 어디 정한 주인이 있는가, 이 말은 곧 존왕주의 주자학을 마구 거역함이 아닌가 어디 그뿐인가 인민에 해되는 임금은 살함도 가하고 인의 부족한 사대부 거함도 가하다. 이런 칼 휘둘러치듯 하는 우렁찬 말 듣고 오종쫑한 재상 도학자들 한꺼번에 크게 감동키도, ~ 대동계 세워 양반 양민 상민 사천 노비 할 것 없이, 상놈이 양반더러, 먹쇠가 마님더러 야 자 해도 되는, 대동계 세워 문무쌍전의 공부시키니, 때마침 왜구 침노하는 갯가 나가서 다 격퇴, 임진왜란은 이미 그때부터 그 이전 신라 고려 때부터다. 호남 전역과 해서 전역 대동계 식구 늘어나서 임진왜란에 대비한 ~
한데 이 민족자결 세력 늘어나자 조정의 정철은 대동계 일당과 선비 1천여 명을 검거합니다. 천하 대역죄 먹여 홍살문턱 닳았읍니다. 정여립은 막판에 진안 죽도에서 아들하고 자결한 것이 아니라 서인 관헌 암살패에 의해 처참하게 죽은 것입니다. ~ 3백 년 뒤에나 5백 년 뒤에나 그 이름이 알려질 뿐이라고,
이것이 전 민족의 항성을 묻고 변성만 키우는 짓거리라고 한탄하는 ~ 단재의 말마따나 ~ 금강 상류의 두 물줄기가 만나는 곳에 이루어진 내륙의 섬 죽도. 물 있고 경치 좋아 가까운 고장 사람들에게는 여름 한철 부담 없는 휴식처가 되는 곳이지만, 여기 얽힌 사연을 아는 이들에게는 무심한 마음으로 밟을 수 없는 땅이다. 갈증보다 심한 목마름으로 어두운 시대를 살아갔던 한 사내의 좌절된 꿈이 묻힌 곳이 여기가 아닐는지. 혹은, 미완의 혁명이 전설이 되고, 일화가 되고, 야담이 되어 이따금 풍편에나 떠도는 곳이 죽도가 아닐는지·····
송강(松江)정철(鄭澈의 이중인격 /
송강은 생전의 80여수의 주옥같은 시를 지었지만 백미는 <성산별곡> <사미인곡> < 속미인곡> <관동별곡> ,이 4수의 한글 가사다. 세종대왕이 한글이라는 원석을 캤다면 송강은 이 원석을 갈고 다듬어 빛나는 보석을 만들었다고 문학평론가들은 극찬을 ~ 이어령 박사는 한국의 셰익스피어라 치켜세운다. " 잠시라도 임 생각을 잊고 시름을 달래려 해도/ 마음 속에 맺혀 있어 뼈속까지 사무치니/ 편작같은 명의가 열이나 온들 이 병을 고칠 수 있으랴." 사미인곡(思美人曲)의 한 구절, 제목만 보면 연시로 보이지만 사실은 임금을 향한 신하의 충절을 노래한 것, 조선 14대 선조다. 정철은 1536년 종로 청운동에서 금수저를 ~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어 권세를 얻었지만 훗날 을사사화에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다. 정철의 맏형은 곤장을 맞아 장독(杖毒)으로 죽고 아버지는 유배지를 전전, 열살 정철은 마침내 아버지가 사면되어 할아버지 산소가 있는 담양군 정착 27세로 장원급제로 명종의 총애를, 나중에 미운털이 박혀 낙향한다.
명종이 죽고 선조가 왕위에 오르자 3년동안 초야에 파묻혀 있던 정철이 인사권을 쥔 이조좌랑으로 중책을 맡아 어느새 서인(西人)의 실력자로 자리잡으며 붕당정치의 문을 연다. 43세 때인 1578년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되나 진도군수의 뇌물 사건으로 반대파인 동인 (東人)의 탄핵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갔다. 동인에 대한 원한이 뼈에 사무쳤다.
1589년 선조 22년에 아직까지도 역사에서 명확하게 정리되지 못해 아리송한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터진다. 동인의 득세에 불안을 느낀 선조가 왕권을 강화하려고 꾸민 조작 사건이라는 설도 있다. 아무튼 선조가 정철의 가슴속에 숨어 있는 악마를 본 것인가, 그에게 우의정 자리를 주고 수사 전권을 맡긴다. 관군이 진안에 있는 정여립을 잡으러 가자 정여립은 자결하고 만다. 잔혹한 기축옥사(己丑獄事)가 피바다를 이룬다.
400년이 지난 지금도 나주시 왕곡면 광산 이씨 집성촌 에서는 여자들이 식칼로 고기를 다질 때 "정철 쾅쾅 정철 쾅쾅 ...." 어금니를 깨물며 이렇게 중얼거린다. 정여립과 서찰을 주고받은 사람, 그저 아는 사람 등등, 정철은 2년에 걸쳐 1000여명 선비들을 잔혹하게 국문해서 죽였다. 원한에 사무쳐 동인 선비들을 작살낸 것이다. ~ 전해오는 얘기로, 정철은 술주정뱅이로 임금의 부름에도 술이 덜 깨어나 못 나간 적도 있다. 또 말이 정제되지 않고 직설적으로 함부로 해 수많은 사람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
가사 문학의 일인자를 부정하는 평자도 많다. <사미인곡> <속미인곡> 둘 다 한글로 교언영색한 '아부성 용비어천가' 라는 것. ~ 더구나 <관동별곡> 은, 그해 강원도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은 아사자가 속출하는 데 관찰사라는 작자가 가마를 타고 술을 마시며 산천경계 둘러보고 시를 짓다니! ~ 결국 정철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조정에 왜군이 모두 철수했다고 허위 보고를 해 선조로부터 파직 당했다. 그후 강화도를 떠돌다 59세에 굶어 죽었다.
1551년 아버지가 유배지에서 풀려나자 담양 창평으로 이주. 임억령에게 시를 배우고 김인후, 송순, 기대승 같은 당대의 석학들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이이, 성혼, 송익필 같은 유학자들과도 친교를 - -27세 때 과거에 급제하고 사헌부 지평을 거쳐 함경도 암행어사를 지낸 뒤 32세에 이이와 함께 - 사가 독서했다. 40세에 벼슬을 버리고 창평으로 낙향했다. 그 뒤 몇 차례 벼슬을 제수 받았으나 사양하고 43세 때 장악원정을 배수하고 조정에 나왔다. 45세에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그 유명한 - “관동별곡”과 「훈민가」 16수를- 그 후 정치적인 부침을 거듭하다 50세에 창평으로 네 번째 낙향을 했다. 이때 「사미인곡」등의 기사와 시조, 한시 등 주옥같은 작품들을 남겨 놓았다.
-54세에 정여립 모반 사건이 일어나자 우의정으로 발탁 되었다. 서인의 영수로 동인의 주요 인물들을 모조리 제거했다. 숙청된 인사가 1000여명이 이르렀다. 이를 기축옥사다. 호남지역 사류들이 이 옥사에 많이 연좌되어 이때부터 반역의 땅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됐다. - -56세에 세자책봉 문제를 건의하다 이산해의 모해로 선조의 노여움을 사 파직되었고 명천으로
유배되었다. 진주와 강제로 이배되었다. 57세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귀양에서 풀려나 평양에서 왕을 맞이하고 의주까지 호송했다. 경기도, 충청도 관찰사를 지내고 다음 해에 사은사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그러나 동인의 모함으로 사직하고 강원도 송춘에 우거했으나 생계조차 어려워 58세 일기로 죽었다.
-정철의 큰 누이는 인종의 숙의(淑儀)이고 막내 누이는 계림군(桂林君) 유(瑠)의 부인이다. 술을 그렇게 좋아했던 풍운아 정치의 숱한 질곡 속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술에 의지해 잊으려고 했다. 죽어서도 관직이 삭탈되고 회복이 되었다. 만은 정적을 만들고 천고의 간흉이라는 소리도 했으나 유려한 필치로 풀어낸 주옥같은 시문들은 영원히 남아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