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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상상력과 인식의 탁월함 -백현국
메타포어를 잘 쓴 것은 좋은 시인가?’ 하는 물음에 대하여 다음의 진술은 유용하다고 본다. 롤랑바르트는 “세련된 언어, 잘 쓴 글이라는 표현은 비문학적인 진술이다”라는 말을 한다. 과연 잘 쓴 글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메타포어를 사용한다? 기실 언어의 세련도에 집중하여 작품을 분석하고 순위를 매기는 짓은 좀 웃기는 짓인지도 모른다. 분명히 메타포어는 제한된 언어의 카테고리 속에서 자신의 특별하고 다양한 욕망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데 좋은 수단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메타포어의 과잉은 결국 난해성의 문제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러한 면에서 詩作의 기술적인 면보다 詩作하는 태도나 세계관을 더 중요시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언어라는 것이 사회적 활동의 매개이기에 사회의 제현상을 언표화 하는 것과 밀접한 것은 사실이다. 또한 그 사회의 제현상에 대한 인식을 특별한 감각으로 드러내는 것도 언어라는 매개를 통해서 드러낸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비평가는 과연 어떤 것에 초점을 두고 작품성을 따지게 되는 것일까? 때로는 샤토 브리앙(Chatearbriand)의 말처럼 차라리 남의 결점이나 잡아내는 사소하고 안이한 비평을 버리거나, 토마스 칼라일(Carlyle)의 말처럼 오직 시인의 독자적인 사고방식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게 비평의 목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비평의 본성과 직책에 대해 구체적인 고찰을 남겼던 마거릿 풀러(Margaret Fuller)는 “비평가는 고찰하고, 비교하고, 체질(sift)하고 키질(winnow)하는 것이 비평가의 양심”이라고 한 바 있다. 개인적인 느낌에서 보면 수년에 걸쳐 본 결과, 매년 되풀이되는 신춘문예에 오르는 작품의 경우, 어느 신문사에서나 거의 비슷한 작품 양상, 특히 시어의 기술적 올가즘에 능숙한 작품들이 選作되는 것에 놀라고 있을 뿐이다.(고정된 심사위원들의 문제도 있을 것이다.) 이는 비단 신춘문예 뿐 아니라 현재 시중에서 발간되는 문예지들의 당선작도 거의 비슷한 양태를 갖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한다. 따라서 당선작에 대한 비평적 논의가 차단된 만큼 당선작에 대한 평가 역시 논외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옳다는 것이 비평가들의 입장인지도 모르겠다.
유럽처럼 민주주의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시민의식이 어떤 나름대로의 순탄한 경로를 거쳐서 이루어진 경험을 갖고 있지 못한 우리로서는(일부에서 이러한 인식에 대해 서구 시스템에 대한 사대적 발상이라고 비판을 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사회주의 국가의 문학적 토대를 무시하는 발상이라고 비판받기도 한다는 점을 우선 지적하고 넘어간다) 아우구스트 빌헬름의 말(역사의 역할)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하나의 예술작품은 그 자체 내에 봉해져 있어야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연속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해야한다.” 이는 작품 속의 특수성, 독자성 못지않게 사회적이고 외면적이라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우리문학은 1920년대에서 30년대에 걸쳐 언어의 절묘한(?) 표현의 백화를 보인 바 있다.(물론 외국 사조의 백과사전식 도입에 의한 결과겠지만)이러한 사조의 백화에 대하여 문학사적인 접근이 용이하지 않은 이면에는 남한의 식민지하 문학에 대한 평가상의 부정적인 논의(임종국의 친일문학론류)와 함께 북한 역시 사회과학원에서 발간된 『조선문학개관』 등에 나타난 대략적인 평가에 대하여 활발한 논의를 할 수 없었다는 문제도 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작품의 내적인 자산(작품성)에 대하여 충분한 평가를 남북한 서로 이뤄내지 못한 상태라는 점도 걸림돌이다. 이는 한국 근대문학이 시종일관 식민지의 검열에 시달려 온 점과 더불어 문학인들의 시대적 한계성을 극복하지 못한 것과 광복 이 후에도 현대문학의 평가가 분파주의와 편의주의에 의해 서로 다른 평가를 내리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광복 이후 식민지 시대의 문학적 과제를 재논의 하는 과정에서 그 평가가 엇갈리는 점과 남북간 전쟁으로 인하여 예술적 평가가 이데올로기적이었다는 문제 등, 문학적 평가에 있어서 갈등과 모순 등이 논자들에 의해서 적극적으로 해소되지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결국 詩作은 시인의 단순한 주관적 세계표현 이라는 초점과 시인 각각 개별적인 상상력 자체에만 미적인 관심이 집중하게 되었다.
작품에 대하여 파괴적인 비평을 할 것인가, 아니면 생산적인 비평을 할 것인가는 작자와 독자 그리고 당시대가 요청하는 다양한 전체성(Whole)을 각각의 미묘한 특성으로 지각, 재구성을 통해 해석해 내는 일일 것이다. 이는 역으로 면밀한 집중과 해석을 통해 전체를 해석해 낼 수 있다는 점과도 같다.
풍부한 어휘는 분명 사물에 대한 인식의 다양성을 확보하는데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눈(雪)에 대한 어휘를 70여종을 갖고 있다는 에스키모인들의 인식은 놀라운 것이다. 문병란이 시적 사명에 대해 얘기한, “시는 정서와 사상의 융합인 정서적 등가물을 형상화하는 것이다. 또 시는 시정신의 고양과 기법보다 밑바닥에 흐르는 도도한 사상적 힘이 있다”는 말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면 다양한 어휘는 특히 시적 상상력으로 치부되는 시어의 상상력은 어떤 경로를 가져야 하는가?
미술평론가 유홍준씨의 송강 정철 「장진주사」에 대한 감회는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지적해 준다. 송강의 작품 중, 장진주사에 대하여 ‘원숭이 정서의 허구성’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
한잔 먹새그려 또한잔 먹새그려
곳 것거 산 노코
무진무진 먹새그려
이 몸 주근 후면
지게우해 거적더퍼 주리혀 매혀가나
뉴소보댱의 만인이 우러 녜나
어욱새 속새 덥가나무 백양수페 가기곳 가면
누른해 희달 가눈비 굴근눈 쇼쇼리바람 불 제
뉘 한 잔 먹쟈 할고
하물며 무덤우해 잔나비 파람불제 제 뉘우찬달 엇디리
당대 사람들은 알리 만무한 원숭이 휘파람을 슬쩍 끼워 넣는 행위를 일러 원숭이 정서의 허구성이라고 한 것이었다. 틀린 말이 아니다.
예술의 비인간화를 말해 보자. 우리나라 문인들은 심정적으로 모두 양반들의 풍류 내지는 選者의식들이 있는 것 같다. 당대의 동류와는 뭔가 다른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한 사람으로 판단해 주기를 바라는 것 같다. 그렇게 본다면 예술가라는 명칭을 걸고 있는 사람들은 대개 당대의 현실과는 뭔가 다른 세계를 나름대로 갖고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뒤집어 보면, 결국 예술가와 현실은 서로의 괴리를 갖게 된다는 당위성이 전제된다. 따라서 현실적인 감각이 무디어질수록 환상적인 것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픈 욕구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제 모순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의 행태는 어떻게 변했을까? 서구자본주의가 선전하고 일깨워 준 절망적이고 비인간적 제 모순을 미적 세계로 도피하거나 아니면 현실 감각을 추상화 해버리는 경우를 들 수 있다. 개인의 힘으로 해석해 내기 힘든 권력에 의한 폭력과 비인간화, 물신화, 노동과 인간소외, 분단과 계층갈등 등의 부정적인 패러다임과 시스템을 절망적이고, 순간적이고, 영적이며, 어둠과 죽음의 미학으로 표현해 버림으로써 反인간적, 反민중적, 反사회적 일탈이 예술적 고뇌로 꾸며지게 되었다.
따라서 일부에서는 휴머니티를 강조하는 예술에 대해 서구 자본의 병폐(이데올로기)를 들어 비판하면서, 우리는 미처 체득되지도 못한 이론적 허구를 따라가다 보니 마침내 내용과 소재를 떠난 말초적 기교주의에 함몰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브레히트는 예술과 생의 거리를 없애는 문제에 대해 언급하면서 ‘대중(독자)은 어떤 상황을 운명적이고 예정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 것’을 말한다. 이는 문학 현상이 결코 개인적인 산물이 될 수 없으며, 일정한 사회생활을 기반으로 하여 생기고 발전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과 다르지 않다.
시작태도에 있어서 심미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사람들은 예술적 가치와 윤리적 가치는 별개로 본다. 즉 고상한 예술적 취향을 계속적으로 가능하게 하기 위해 당시대의 모든 제 모순에 대하여(노동/빈곤/학대/폭력/성/권력/문화)구체적인 논의를 피한다. 그만큼 현실 문제에 대한 느낌과 해석의 강도가 약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경험에 대한 통일된 지각을 거부하고 감정의 혼란을 다스리는 성숙한 관점에서 시작하는 기법은 없다. 단순한 수사와 아니면 현란한 수사로 자기 암시성을 강조할 뿐이다. 환언하면 공감력이 없다는 말이 된다. 하나의 관념임에는 틀림없으나 관념의 사회적 기반은 없다는 말이 된다.
소비예술의 측면에서 보면 단편적인 현실로써 전체적인 현실을 반영시킨다고 생각하는 한 현실적인 모순은 흔히 고급예술을 주장하는 예술가 사이에서 전혀 문제될게 없는 법이다. 결국 작품과 독자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상존하게 되는 것이다. 창작을 하는 이는 문화적 시혜성 발상을 멈추지 않을 것이며 독자는 예술작품에 지배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곧 이는 순환적인 오류를 발생시키게 되는데 이를 일러 예술의 소외라고 하우저가 말한 바 있다. 플라톤이 ‘시인추방론’에서 밝힌 것처럼 예술이 사사로운 수단으로 추상화, 형식화 되어갈 때, 예술적 소외가 심해진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문학 활동이 극소수의 동호인 문학으로 전락하고 문학권력이니 출판 권력이니 나아가서는 학연과 지연 그리고 끌어주기식 풍토에서 자유롭지 못한 한, 타인을 위한 문학을 주장했던 싸르트르/까뮈/리차드슨/필딩/디킨즈 등등이 설파한 예술의 기능은 가치가 없을 것이다.
예술가의 신념과 행동 인식의 탁월함은 작품의 탁월함을 탄생시킨다는 점에서 동시대의 역사적, 사회적 삶의 해석과 전망에 자신의 체험이 얼마나 공감대를 갖는가를 먼저 따져 봐야 할 것이다. 이는 곧 작자의 시적 상상력의 베이스가 곧 인식의 탁월함에 있다는 원론적인 얘기를 하고자 장황하게 풀어 본 잡설이다. 끝으로 시인 김수영의 말을 빌어 보자 “시작詩作은 머리도 심장으로도 아닌 온몸으로 하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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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0. 바람 / 장석주
바람
장 석 주
바람은
저 나무를 흔들며 가고
난 살고 싶었네
몇 개의 영원불멸의 아이들이 자전거를 달리고
하늘엔 한 해의 마른풀들이 떠가네
열매를 상하게 하던 벌레들은 땅 밑에 잠들고
먼 길 떠날 채비하는 제비들은 시끄러웠네
거리엔 수많은 사람들의 바쁜 발길과 웃음소리
뜻없는 거리로부터 돌아와 난 마른꽃같이 잠드네
밤엔 꿈 없는 잠에서 깨어나
오래 달빛 흩어진 흰 뜰을 그림자 밟고 서성이네
여름의 키 작은 채송화는 어느덧 시들고
난 부칠 곳 없는 편지만 자꾸 쓰네
바람은 저 나무를 흔들며 가고
난 살고 싶었네
장석주 시집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