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체 안에 계시는
주님의 현존은
우리에게 응답을
요구하신다
(연중제19주일2024.8,11강론)
1 열왕19:4-8; 에페4:30-5:2; 요한6:41-51
올해의 주일 복음 말씀은
마르코 복음 차례입니다.
그러나 이미 여러분이
인지하실 수 있는 바와 같이
오늘의 복음 말씀은 마르코
복음 말씀이 아니라 요한 복음
6장에서 발췌된 복음 말씀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오늘의 복음
말씀은 신약 성경의 독특한
부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태오 복음, 마르코 복음,
그리고 루카 복음 말씀은
모두 다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 때
성체 성사를 설립하시는 데 대한
설명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 복음 말씀에는
그런 설명이 없고, 그 대신에,
제6장에, 성체 성사에 대한
예수님의 약속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근간의 주일 복음 말씀은
요한 복음6장에서 따온 복음
말씀인데, 바로 두 주일 전에
많은 사람들이 빵과 물고기를
배불리 먹었다는 이야기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방금 들은 제1독서
말씀은 1 열왕기에서 발췌된
말씀으로, 그 내용은 엘리야
예언자에 대한 내용의 말씀입니다.
즉 엘리야 예언자가 외국인 왕후
이제벨에게 어떤 고초를 당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공포에 질려서
멀리 남쪽 광야로 도망쳐서 지칠
대로 지쳐 싸리나무 아래
누워있는지에 대한 내용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예언자는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로 너무나 의기가 소침해져
있었습니다. – 즉 예언자들이
다 죽임을 당하고 오직 자기
자신 혼자만 살아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 그래서 엘리야는 자기도 차라리
아예 그 싸리나무 밑에서 죽어버리게
해주십사고 하느님께 요청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엘리야의 청을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천사가
엘리야에게 음식과 마실 물을
가져다 주었고, 음식을 먹고 마신
엘리야는 새롭게 기운을 차리고
힘차게 일어나서 모세가 하느님을
만난 산인 시나이 산에 도착할
때까지 더 남쪽으로 먼 길을
걸어갔습니다.
언제나 제1독서 말씀과
복음 말씀의 내용은 서로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야의
죽고 싶어 하는 마음, 천사가 가져다
준 음식과 음료 등은 여전히
주님께서 엘리야와 함께 현존하고
계신다는 것을 보장해 주고, 엘리야에게
새로운 에너지와 희망을 불어넣어
엘리야가 시나이로 가는 먼 여정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이런 모든 이미지들은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하여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위한 배경을 제공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거룩한 빵이 아직도
세상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는 것일까요?
이 거룩한 빵이 여전히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이 거룩한 빵 앞에 있을 떼, 우리가
주님의 현존 앞에 대령하고 있음을
얼마나 의식하고 있는지요?
우리는 한낱 인간에 불과하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시간이 지나면 사물을
당연히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심지어는 가장 거룩한 것들까지도
당연히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실질적인 현존”이라는
단어를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지만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은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하여 매우
일방적으로 이해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실질적인 현존”을 주님께서
이 성사 안에 실질적으로 존재하신다는
그 사실을 언급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 성사 안에
현존하신다는 것은 일반적인 존재에
비해 훨씬 더 깊은 뜻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실질적인 현존”이라는 말이
주님께서는 우리 눈 앞에 보이는
저 의자가 존재하는 것과 같이
성소 안에 존재하고 계시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의 현존은 그 이상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그 의자는
단순히 하나의 사물의 일반적인
존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실질적인 현존은 하나의
개인적인 존재이십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존재는 항상
관계의 문제를 포함합니다.
– 즉 우리는 실제로 그런 사람의
현존과 어떻게 무슨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일까요?
존재에는 다양한 수준이
있습니다. 존재는 단순히 일반적으로
물리적인 존재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말씀 드리자면, 두 개의
의자는 서로 물리적으로 존재하고
있을 뿐입니다. – 즉 그 두 개의
의자는 그 어떤 방식으로든지
상호작용을 하지 않습니다.
또 두 사람이 버스 안에서 나란히
앉아 서로를 무시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 두 사람도 두 개의
의자처럼 서로에게 물리적으로만
존재할 뿐입니다.
또는 지금 제가 지금 이렇게 강론을
하고 있는 것처럼, 누군가가 이 성당
안에 앉아 있기는 하지만 다른 것을
생각하며 앉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 그 사람은 지금 저에게 물리적으로만
존재하고 앉아 있을 뿐입니다.
두 사람이 오직 정말로 서로의 관계를
맺고 있고, 정말로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만이 그 두 사람의
존재는 완전히 “실질적인” 존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성체 성사에 적용해
봅시다. “실질적인 현존”은 예수께서
진정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을 너무
자주 의미하게 되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존재하는 지 아닌 지에
대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강조가
없습니다.
창조물에는 항상 주님께서 현존하고
계시지만, 우리를 위해 특별히
성체 성사 안에 현존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현존은
항상 우리의 응답을 요구하실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감사드립니다
오늘 우리 부부 손잡고 첫미사 참례중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새날 ~~
주님의 자비로 주님의 뜻대로 평화로이 살아가겠습니다^^
인자하신 신부님 감사합니다 요셉씨 와 찿아 뵙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신부님
날씨가 많이 덥습니다.
영육간 건강하세요^^
신부님! 감사합니다
언제나 변함없이 보내주시는
영적양식 정말 감사드립니다.
더운날씨에 건강조심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