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엡 2:13)
하나님은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방식으로 일하신다(출 33:19). 그리고 은혜와 긍휼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에게만 해당한다는 점에서 인간이 갖추어야 할 조건은 없다. 은혜와 긍휼에 대해서 인간이 관여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뜻이다. 어린양의 피, 그리스도의 죽으심이라는 십자가 사건으로 베풀어지는 것이 은혜와 긍휼이기 때문이다.
성도는 은혜와 긍휼을 입은 자로 십자가라는 동일한 사건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새롭게 생성된 관계로 존재한다. 십자가가 인간의 모든 의와 공로를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피에만 가치를 둔다는 점에서 인간이 세운 기준으로 서로를 판단하고 지적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닌 것이다.
만약 율법을 내세워 성도가 아니라고 지적한다면 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은혜와 긍휼을 모독하고 멸시하는 죄가 된다. 즉 죄는 ‘율법을 행하고 지키는가?’가 아니라 십자가의 피에 근거해서 규정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셨고 성도는 그의 몸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성도가 지켜야 할 율법은 없기에 율법을 기준으로 서로를 판단할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런데 여전히 자기 몸으로 주를 믿고 주를 위해 말씀을 실천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면 결국 몸과 몸이 충돌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충돌도 몸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십자가 앞에서 인간의 몸은 죄로 드러날 뿐 그 어떤 의의 가치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율법이 있는 믿음을 옳은 것으로 주장하는 유대인이나 율법이 없는 믿음을 옳은 것으로 주장하는 이방인 모두 자기 가치를 포기하지 않는 것일 뿐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할 자와 미워할 자로 나누시는데 그 기준은 선택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선택을 야곱과 에서를 내세워 말하는 데 이들이 세상에 나지도 않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도 않았을 때의 선택이라는 점이 인간을 곤란하게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기준과 판단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에 나지도 않았는데 이미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기로 하셨다는 선택안에서 인간의 믿음, 행함, 열심, 착한 심성, 이 모든 것은 사랑의 조건이나 구별의 기준이 될 수 없다. 다만 은혜 베풀기로 택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고 긍휼히 여기기로 택한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방식이 전부다.
그래서 사람들은 선택이라는 방식에 의문을 품고 반발한다. 선택을 수용하면 자신이 행하는 어떤 것도 선한 것으로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율법을 지키는 것도, 지키지 않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도 의미가 사라지는 것이다. 이것을 비합리적인 것으로 다가오기에 반발하는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쓴 편지를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하나님의 선택은 내 몸이 존재하기 전에 세워진 일이기에 내 몸으로 무엇을 하고 하지 않든 아무 의미도 가치도 둘 수 없다는 것이다.
선택받고 부름을 받은 성도로서의 행보에도 우리의 생각과 뜻은 무의미하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하고 흠이 없는 아들들이 되게 하여 하나님이 거저 주신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는 것으로 예정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예정에는 인간의 구원은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만이 있을 뿐이다. 바울은 창세 전의 선택이라는 이야기로 시작하면서 율법을 사이에 두고 충돌하고 다투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말하는 것이다.
바울이 이방인을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 약속의 언약 들에 대하여 외인,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로 말한다(엡 2:12). 하지만 이것은 유대 민족을 제외한 이방인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이야기다.
즉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하나님에게서 멀리 있는 자로 말한 것이다. 결국 언약과 율법을 근거로 자신을 우월하게 여긴 유대인이나 언약과 율법을 받지 못했다고 해도 말씀을 실천하는 자기 믿음을 높이는 이방인 모두를 지적하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과 가까워질 방법이나 조건은 없다. 바울은 이것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는 말로 증거한다.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 이 모두는 인간의 믿음이나 의지, 능력으로는 절대 넘볼 수 없다. 오직 예수님이 홀로 이루셨다는 점에서 자기 몸으로 행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성도의 믿음이다.
그리스도의 피는 둘로 하나를 만들었고 중간에 막힌 담을 헐어버렸다. 성도는 하나가 되었으니 서로 가까운 관계로 사랑하며 지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서로에게 담으로 작용하던 인간의 의와 공로가 의미 없는 것으로 무너지고 한 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으로 지어졌으니 모두가 죄로 인해 저주받을 자로 주 앞에 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에서 담으로 작용하던 율법이라는 벽을 폐함으로써 모두를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진노의 자식이 되게 한다. 바울은 이것을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라고 말한다. 우리 모두를 저주받을 자라는 차별이 없는 관계가 되게 하는 그리스도의 피가 곧 화평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교회는 중간에 막힌 담이 없는 관계로 함께한다. 죄인으로 함께 하면서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받은 은혜와 긍휼을 서로에게 나타내는 가까워진 관계다. 이러한 교회를 인간의 윤리와 행함으로 채우고 그것을 건강한 교회로 이름 붙여 높이는 것이야말로 사탄의 행태일 뿐이다.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진 관계가 등장하면서 그리스도의 피로 멀어진 관계도 등장한다. 여전히 자기의 의와 공로로 자신을 가치 있는 자로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피에서 멀어진 자다. 자신의 죽음을 아는 성도에게 가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가 유일하다.
-신윤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