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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숭배로 가득한 예루살렘 성전과 긍휼을 베푸시는 바벨론의 성소
에스겔서를 읽으면서 마음이 많이 무거움을 느낍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이라는 성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서 슬픔과 애통이 나오고, 절망감이 느껴집니다. 우리의 죄악과 부패가 이렇게 심한가를 생각하며, 한편으로는 그래도 자비를 끊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합니다. 그리고 교회 역사를 통하여서도 얼마나 많은 죄악과 부패가 있었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들이 행해졌는지를 생각하면서, 항상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롬 2:24)라는 말씀이 분명한 현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도와 형식과 신분이 모든 것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에스겔 4-24장은 유다의 범죄와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가 있을 것에 대해서 증거하는데, 8장은 성전 안에서 자행되고 있는 우상숭배에 관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섯째 해 여섯째 달 초닷새에 나는 집에 앉았고 유다의 장로들은 내 앞에 앉아 있는데 주 여호와의 권능이 거기에서 내게 내리기로 내가 보니 불 같은 형상이 있더라 그 허리 아래의 모양은 불 같고 허리 위에는 광채가 나서 단 쇠 같은데 그가 손 같은 것을 펴서 내 머리털 한 모숨을 잡으며 주의 영이 나를 들어 천지 사이로 올리시고 하나님의 환상 가운데에 나를 이끌어 예루살렘으로 가서 안뜰로 들어가는 북향한 문에 이르시니 거기에는 질투의 우상 곧 질투를 일어나게 하는 우상의 자리가 있는 곳이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거기에 있는데 내가 들에서 본 모습과 같더라”(겔 8:1-4)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사람들 중에 에스겔도 있었는데 그가 집에서 유다의 장로들과 함께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권능으로 역사하사 그의 영으로 에스겔을 이끌어 예루살렘에 갔습니다. 먼저 안뜰로 들어가는 북향한 문에 이르렀는데 거기에서 질투의 우상을 보았습니다.
“그가 나를 이끌고 뜰 문에 이르시기로 내가 본즉 담에 구멍이 있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이 담을 헐라 하시기로 내가 그 담을 허니 한 문이 있더라 또 내게 이르시되 들어가서 그들이 거기에서 행하는 가증하고 악한 일을 보라 하시기로 내가 들어가 보니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우상을 그 사방 벽에 그렸고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 중 칠십 명이 그 앞에 섰으며 사반의 아들 야아사냐도 그 가운데에 섰고 각기 손에 향로를 들었는데 향연이 구름 같이 오르더라”(겔 8:7-11)
에스겔 선지자가 본 두 번째 환상은 ‘성전 안에서 자행되는 우상숭배’였습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벽을 헐자 거기에 문이 있어서 그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놀랍게도 벽에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 이스라엘 족속이 숭배했던 우상이 벽 사면에 가득하게 그려져 있었습니다. 성전 북쪽 문 어귀에 있던 ‘질투의 우상’에 대해 ‘가증한 일’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벽면에 새겨진 곤충과 짐승, 우상들을 섬기는 것에 대해 ‘가증하고 악한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슬프게도 그 안에 장로 칠십 명이 있었고, 요시야왕이 종교개혁을 단행할 때에 대제사장 힐기야와 더불어 그것을 주도했던 경건한 서기관이었던 사반의 아들 중 한 명인 야아사냐도 그 가운데에 서 있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모두 이렇게 우상숭배에 앞장서고 있었던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본 세 번째 환상은 ‘여인들이 우상 담무스(Tammuz)를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었습니다(겔 8:14-18).
“그가 또 나를 데리고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북문에 이르시기로 보니 거기에 여인들이 앉아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더라”(겔 8:14)
‘담무스’는 고대 수메르의 신이었는데, 풍성한 결실과 들짐승들로부터 양 떼를 보호하는 신으로 여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전 문과 제단 사이에서 태양에게 예배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가 또 나를 데리고 여호와의 성전 안뜰에 들어가시니라 보라 여호와의 성전 문 곧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약 스물다섯 명이 여호와의 성전을 등지고 낯을 동쪽으로 향하여 동쪽 태양에게 예배하더라”(겔 8:16)
성전 북문 부근에서는 여인들이 담무스를 숭배하며 애곡하고 있고, 성전 뜰 문 안쪽에서는 백성들의 지도자인 70명의 장로들이 우상숭배를 자행하고 있고, 성전 안뜰에서는 종교지도자들인 제사장들이 태양신을 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에게서 풍요와 안전과 보호를 구하며, 은총을 구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은총을 받을 일이 아니라 가증함 위에 가증함이었고 처절한 파멸을 불러올 뿐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이 제단 사이에서 이런 짓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유다 백성들의 신앙이 철저히 무너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이 환상을 보여주신 것은 에스겔 선지자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가 아니고, 예루살렘에서 1600km나 떨어진 바벨론의 그발 강가에 있을 때였습니다. 유다 백성들과 여인들, 장로들, 제사장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돌아보지 않으시고, 유다를 버리셨다고 생각하여 우상숭배를 자행했지만, 하나님은 이방 땅에서도 에스겔 선지자에게 역사하시고 인도하시는 창조주시요, 통치자이셨던 것입니다. 에스겔이 보았던 하나님은 영광이 가득하신 존귀하신 하나님이신데, 그들은 거짓되고 지저분하고 무용지물인 것들로 바꾸려고 하였습니다(롬 1:21-23).
그리고 그 결과는 아주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서 그룹들 위에 머무르니”(겔 10:18)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성전을 떠나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성소 안의 법궤 위 시은좌를 당신의 지상의 임재 처소로 삼으시고, 이곳을 통하여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거룩하고 신령한 교제를 가지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성전 문지방을 나서신다는 것은 이제 이스라엘과의 거룩한 관계와 교제를 중단하시겠다는 뜻을 보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떠나시면 누가 보호자가 됩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결국 남유다는 바벨론에 함락되고 맙니다. 18개월 동안 예루살렘성 밖에서 한뎃잠을 잤던 바벨론 군인들은 그들의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약탈하고 폭행하며 죽이고, 왕궁과 성전과 집들을 불태웠으며, 예루살렘 성벽을 완전히 부숴버렸습니다.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은 도망가다가 붙잡혀 온 시드기야의 어린 두 아들을 시드기야 앞에서 칼로 죽였습니다. 시드기야의 두 눈을 뽑고 쇠사슬에 묶어 예루살렘에서 살아남은 사람들과 함께 3차 포로로 끌어갔습니다. 이때 이미 바벨론에 끌려가 있던 1차 포로인 다니엘과 세 친구, 2차 포로로 끌려가 11년 동안 강제노역하던 에스겔을 비롯한 1만여명의 남유다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의 함락 소식과 함께 성전이 불탔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에스겔에게 보여준 하나님의 심판을 집결하는 살육하는 무기를 손에 잡은 여섯 사람이 무시무시한 파괴를 실행합니다.
그러나 절망할 일이 아닙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결코 모두를 전멸시키시지는 않습니다. 9장에서 서기관의 먹그릇을 찬 사람이 이마에 표를 해 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 남유다 포로들에게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다음과 같은 복된 소식을 전해주십니다.
“그런즉 너는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아내어 여러 나라에 흩었으나 그들이 도달한 나라들에서 내가 잠깐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겔 11:16)
이스라엘 민족은 예루살렘 성전이 불탄 후에야 성전을 그리워합니다. 긍휼의 하나님께서는 70년 동안 바벨론 포로지에서 그들과 함께하시며 친히 ‘성소’가 되어 그들을 만나주십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의 성전은 말할 수 없는 우상숭배로 인하여 불타버리는 심판을 받았는데, 이방 땅 바벨론에서 포로가 된 사람들에게 ‘성소’가 되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달리 말하면 진정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성전과 함께 예루살렘에 있다가 멸망을 당하지만,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포로가 되어 먼 바벨론으로 끌려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계시면서 성소가 되어 주십니다.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의 연설을 보면 오늘의 말씀과 매우 비슷합니다. 성전을 지배하고 있는 종교 지도자들의 모임인 공회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실 때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행 7:2-4)
스데반은 왜 이 연설을 하게 되었습니까?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행 6:10-14)
“이것이 사실이냐?”는 대제사장의 질문에 대해 스데반은 긴 연설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의 연설은 의미가 깊습니다. 영광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고 떠나라고 명령하실 때에 아브라함은 이방 땅 메소포타미아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임재하신다는 성전에서 지도자 노릇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영광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현재 스데반은 성전과 모세의 율법에 대해서 모욕적인 말을 했다고 하여 고발당한 상태입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닌 악의적인 거짓말이요, 일찍이 예수님께도 했던 거짓말이었습니다(마 26:61; 막 14:58). 스데반은 그러한 그들의 주장에 대한 답변이요, 반론으로서 구약 성경을 인용하여 그들의 주장이 잘못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는 모세의 율법 이전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바벨론 포로 시대와 이후의 선지자들 시대까지 다루고 있는데, 그의 설교의 주제는 “하나님의 임재가 어떤 특정한 땅이나 어떤 물리적인 건물에 제한을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행 7:48-50)
그래서 자신은 모세의 율법을 어긴 것도 아니며 성전을 모독하지도 않았음을 논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전에 있다고 하는 그들은 하나님이 결코 기뻐하시지 않는 방식으로 이 일을 끌고 갔으니 즉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인 것입니다. 과연 성전은 어디에 있으며, 하나님의 법은 어디에 있습니까? 누가 참으로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입니까?
얼마 전에 읽은 예화가 생각납니다.
어떤 흑인이 백인들만 모이는 교회에 들어가서 예배를 드리려고 하다가 제지당하자 문밖의 계단에 앉아 울면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 때에 비몽사몽간에 예수님이 나타나서 “너 왜 거기서 울고 있느냐?”하고 물으셨다. 그 때에 그 흑인은 대답하기를 “예, 제가 흑인이라고 해서 이 교회에 못 들어가게 하므로 슬퍼서 웁니다.” 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그 교회에 못 들어갔다고 슬퍼하지 말아라. 사실은 나도 아직 이 교회에 못 들어가 보았다.”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아직 들어가지 못한 교회가 있다는 말은 우리를 돌아보게 합니다. 외모는 다 갖추었지만 본질은 잃어버렸기 때문에 사람들만 모여서 사람들의 의식만 요란할 뿐 하나님께서 떠나 계신다면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그런데 에스겔 시대에도, 예수님 시대에도, 중세 교회 시대에도, 지금 우리 시대의 교회에서도 이런 상황은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전에는 그렇게 열심을 내어서 배우려고 쫓아가 보았던 분들에게서 지금은 오히려 이중적인 모습에 탄식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품기도 하지만, 알고 보면 타락한 인간의 교회 역사에서는 항상 있었던 일이기에 이젠 놀라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남은 자를, 선택되고 거룩한 자로 부름 받은 자를 주목하려고 합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남아 있고, 신실하게 충성을 다하여 사명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종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들을 찾아서 그분들로부터 바르게 배우고, 함께 주님을 섬기고 살아가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장소에 무관하게 자기를 부르는 자들에게 성소가 되어 주신다고 하신 약속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