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은 없다 / 이옥자
그곳은 '에덴'의 고장이었다.
버스터미널 맞은편 2층에 자리 잡은 '에덴 다방'을 시작으로 왼편 골목에는 '에덴 여관'이 있었다. 그리고 '에덴 양복점'과 '에덴 미장원, '에덴 양품점', '에덴 빵집'…. 반경 1km 안팎의 시가지에는 10여 개가 넘는 '에덴'이라는 상호가 널려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인류 최초의 남자. '아담'이라는 간판을 단 오래된 다방도 있다.
2천여 년 전 지구의 서편, 이스라엘에서 살다간 예수라는 사람의 시원始原인 '에덴 동산'이 어떻게 동방의 산간지역까지 밀려와 마치 이정표처럼 여기저기 쓰였을까. 고고학자들이 에덴이라고 추정하는 딜문섬의 지류인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가도 아닌, 아주 먼 나라 강원도의 작은 읍내에까지 그 이름이 노래처럼 떠돌고 있는 것이었을까.
한 시대에 쓰이는 언어에는 시대상이 담겨 있다고 한다. 1960년대, 사람들은 그곳을 휩쓸고 간 전쟁과 폐허, 가난과 죽음까지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낙원을 그리워하며 '에덴'을 생각했을 것이다. 누군가는 '에덴 다방'에 앉아 오래된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가요를 들으며 쓴 커피 한 잔으로 잠시 현실을 잊었을지도 모른다. 푸른 군복의 병사들은 면회 온 가족과 연인을 만나 꽃무늬 도배지가 누렇게 바랜 '에덴 여관'에서 하룻밤이나마 고된 병영의 시간을 잊고 그리움을 풀어냈으리라. 꾀죄죄한 작업복만 입던 남자가 양복 한 벌을 맞추기 위해서, 서울 여자들처럼 멋지게 파마를 하기 위해서, 반짝이는 스테인리스 포크로 찍어먹는 생과자 맛에…. 사람들은 '에덴'이라는 장소를 찾으며 잠시나마 신산한 풍경 속의 자신을 외면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사람이 희원希願하는 에덴동산과는 멀고도 먼 일이다. 그곳이 갑자기 시공을 초월하거나 문화라는 날개를 달아 로데오거리보다 더 고급스러운 멀티숍이 생기고 라스베이거스보다 더 큰 호텔이 '에덴'이라는 휘황한 네온을 번득여도 태초에 아담과 이브가 살았던 에덴에서의 행복은 찾을 수 없다.
에덴동산은 원죄 이전의 인간의 이상향이다. 이상理想은 지상에 존재하기 않기에 늘 꿈꿀 수 있다. 꿈에는 한계란 있을 수 없다. 그러기에 에덴동산은 초자연적이며 초인간적인 곳이다.
「창세기」에 의하면 아담과 이브가 살던 에덴동산은 생명수와 선악과가 자라고 주위에는 보기 좋고 맛있는 과수가 가득하였으며 들에는 짐승, 하늘에는 새가 날았다. 뱀의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먹기 전, 아담과 이브에게는 먹을 것을 걱정할 필요도, 옷을 입을 필요조차 없었다. 창조주는 그들을 삶의 조건으로부터 놓여나 절대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만들었다.
만약 나에게 에덴동산의 영주권이 주어진다면, 나는 아마도 선악과를 따먹고 추방되기 전에 스스로 그곳을 떠났을 것이다. 무소불위無所不爲의 능력을 지닌 신을 닮은 인간이기보다 따뜻한 가슴으로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사람 속의 사람으로 살고 싶기 때문이다. '재미없는 천국'보다 '재미있는 지옥'이 살맛나기 때문이다
절대행복 속에서 아담과 이브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하늘을 나는 새나 들에 사는 짐승과 다르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었을까.
의식주가 해결되니 노동을 필요치 않다. 생존경쟁이 없으니 시장경제도 성립되지 않아 아담 스미스의 고전학파가 옳으니 케인즈학파가 옳으니 격론을 벌이며 학문에 몰두할 필요도 없다. 전지전능한 신은 그들의 생활여건이 적절히 이루어지도록 모든 것을 자동시스템화 했으니 살아남기 위해서 잔재주를 부리거나 머리 쓸 일이 없다. 쓸 곳 없는 인간의 지능은 침팬지를 거쳐 조류로까지 퇴화를 거듭할 수밖에 없다.
심신의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것은 인간관계에서는 축복이 아닌 재앙일 수도 있다. 타인의 존재를 부정하는 오류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중세를 지나 현대에 이르는 화가들은 저마다 나체의 아담과 이브를 그려 에덴동산을 표현하기에 바빴다. 에덴의 그 시절 그대로 인류사가 진행되었다면 코코 샤넬이나 크리스찬 디올과 같은 디자이너의 족적으로 화려한 패션의 역사 같은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사랑뿐이다. 그곳에는 두 사람만이 살고 있으니 사랑에도 이별은 없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사랑은 신이 준 선물이고 이별은 인간이 만든 불행이라고 믿었다. 신의 영역인 사랑에 대해서는 인간이 감히 말할 수 없기에 이별의 아픔만을 서정시에 담아 노래했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에서 추방되지 않았다면 뮤즈나 사포도 존재할 수 없다. 무한정한 사랑만 있기 때문에 선택의 조건이나 밀고 당기는 기술도 필요치 않다.
또한 모든 것은 유한하기에 애절하고 안타깝다. 불온不穩과 미혹眉惑이 있기에 아주 많은 의미를 담고 인간 사이를 떠도는 사랑이라는 명제- 이별이 없는 세상에서는 사랑도 그렇게 절절할 수 없다. 불가능이 없는 곳이라면 어떤 가능성도 배제된다.
만약 그들에게 인간의 생물학적 공식을 적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남자와 여자의 사랑은 900일 정도면 식어간다고 한다. 체내의 페닐에틸아민이라는 화학물질이 고갈되기 때문이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노동이 필요 없는 무료함 속에서라면 그 사랑은 더 빨리 종식될 것이다. '사랑은 시간을 보내고, 시간은 사랑을 보낸다.'는 사랑과 시간의 함수관계를 이르는 말이 있다. 죽음도 이별도 허용되지 않고 두 사람의 사랑뿐인 에덴도안에 이 말을 적용한다면 그곳이 정말 낙원일 수 있을까. 사랑도 사라져가고 시간도 지리멸렬하게 흘러가는 곳이 인간의 진정한 이상향일까.
원죄原罪는 아담과 이브를 진정한 인간으로 새롭게 탄생시켰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기 전의 그들은 선악을 모른 채 본능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단순한 동물과 같은 생활을 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은 후, 지적 생명체인 인간으로 거듭나 선악을 판별하고 행하게 된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아담과 이브에게는 부끄러움과 산고産苦, 병마의 고통과 죽음까지 가혹한 형벌이 내려졌다. 인간은 형벌에서 놓여나기 위해서, 고통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 끝없이 노력한다. 에덴동산에서 퇴화하던 두뇌는 고통스러운 인간으로 살며 진화할 수 있었다. 불행과 행복이 교차되며 눈물과 웃음이 피어나고, 때로는 아득한 에덴을 그리워하며….
음악에서 '협주(concerto)'는 '화합(con)'과 '대결(certo)'의 합성어이다. 피아노나 바이올린의 솔로 연주에 오케스트라 연주가 화합하고, 다시 서로 치고 나와서 대결의 양상을 보인다. 이렇게 화합과 대결을 거듭하며 조화로운 협주곡을 연주할 수 있게 된다. 화합만으로는 지루하고 대결만으로는 불안정한 연주가 된다. 화합이 있으므로 대결 부분이 돋보이고. 대결이 있으므로 화합이 아름답다. 서로는 대립이며 보완인 셈이다
에덴동산에서의 행복은 화합만으로 연주되는 협주곡과 같다.
선善이 빛나는 것은 우리 곁에 악惡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랑과 미움, 만남과 이별, 고통과 환희- 그 모든 것이 대립하고 화합하며 '삶'이라는 협주곡은 아름답게 연주된다.
세상 어디에도 에덴은 없다. 존재하지 않는 곳이기에, 인간이 이를 수 없는 곳이기에 우리는 갈망할 뿐이다.
이 봄날, 우리 동네에도 '에덴'이라는 간판은 연전이 눈에 많이 뜨인다. 나는 2,3평 정도의 방들이 늘어선 '에덴 고시텔'을 지나 골목을 나선다. 무뚝뚝한 남자와 상냥하게 미소짓는 여자가 주인인 '에덴 농원'에서 작은 꽃나무 몇 그루를 사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