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씨름 상대가 누구인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으면, 일껏 잘 믿는다고 생각하며 잘 가고 있다고 안심했어도 어느새 엉뚱한 곳에 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어쩌다가 거기까지 왔는지 알 길이 없다고 말합니다. 어쩌다가 교회가 그 지경이 되었는지는 아무도 말하지 않습니다. 몰라서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돌이키기에는 너무 멀리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돌아가야 합니다. 첫 자리로 돌아가 새로 시작해야 합니다.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 부르기 위해 오셨습니다. 주님께서 다 이루셨음을 다시 한 번 선포하고, 다 이루신 주님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의 자리에서 우리를 위해서 남김없이 쏟아 부어 주신 주님의 사랑에 흠뻑 젖음으로써 우리도 누군가에게 하느님께서 주신 또 하나의 선물이 되기를 결단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시기 위해 공생활 동안 하신 일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구원입니다. 구원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죄 때문입니다. 죄는 어디서 시작됩니까? 사탄입니다. 그렇다면, 죄에 묶인 사람을 구원하려면 누구와 싸워야 합니까? 사탄과 싸워야 합니다. 죄인과 싸울 게 아닙니다. 죄인과 싸워 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탄이 왕 노릇 하는 세상은 늘 우리를 결박합니다.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에 맨몸으로 나가서 싸워 봐야 이기지도 못합니다. 우리가 무슨 힘으로, 무슨 재주와 능력으로 싸우겠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와 무슨 수로 싸우겠습니까? 그러니 싸움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이미 이기신 싸움을 하는 것뿐이라는 본질을 놓치면, 싸워 보지도 못하고 끝나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싸울 전장은 두 곳입니다. 기도의 자리와 파견 받은 세상의 자리입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모세와 여호수아가 양쪽에서 싸웠습니다. 바오로가 이 싸움의 실상을 알려 줍니다.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에페 6,12)
이 말씀은 싸움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려 줍니다. 먼저 우리 싸움은 씨름입니다. 싸움의 형태가 총격전이 아닌 레슬링이라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로 밀고 당기며 엎치락뒤치락하는 싸움입니다. 대개 단숨에 끝나는 법이 없습니다. 매일같이 계속되는 싸움입니다. 때로는 젖 먹던 힘까지. 내서 싸워야 하고, 때로는 내 힘을 쓰지 않고 상대방이 자기 힘에 스스로 넘어가는 절호의 타이밍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의 씨름 상대는 세상에서 어떤 얼굴로 나타납니까?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로 나타납니다. 한마디로 막강한 힘이 있는 권력자입니다. 골리앗이나 나필족의 후손들처럼 상대하기에 버거운 사람들입니다. 우선 크기만 놓고 봐도 싸울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군사가 골리앗 한 사람 앞에서 주눅이 들어서 전의를 다 잃지 않았습니까? 그가 하느님을 모욕해도 누구 하나 선뜻 나서서 맞서질 못했습니다. 다윗이 올 때까지는 말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런 골리앗이 수백, 수천, 수만이 있다면 무슨 수로 그들을 상대하겠습니까?
게다가 그들의 뒤에 어른거리는 존재가 있으니, 바로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 이 영들과 어떻게 싸웁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영들과 무슨 재주로 싸웁니까?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생각과 행동으로 적을 이롭게 할 수도 있습니다. 배후를 모른 채 속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베드로가 펄쩍 뛰었습니다. "십자가를 지시다니요? 안 됩니다." 그는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 채 원수의 편에 섰던 셈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 사울은 별생각 없이 하느님의 뜻을 거슬렀습니다. 사무엘이 약속 시간에 나타나지 않자 "내가 직접 제사를 드리면 될 게 아니냐" 하고 직접 번제를 드렸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원로 칠십 명을 장막으로 부르셨을 때, 장막에 나오지 않은 엘닷과 메닷이 자기 진영에서 예언하자, 여호수아가 모세에게 "저의 주인이신 모세님, 그들을 말리셔야 합니다."(민수 11,28)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11,29)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마터면 여호수아도 하느님의 뜻을 거스를 뻔했습니다. 이처럼 자기 생각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이유는 언제나 넘쳐 납니다. 그러나 그것은 4복음서가 아닌 '내가복음'을 따른 것일 뿐입니다.
영적 세계의 사건은 한순간에 일어납니다. 왜 자선을 베풀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합니까? 오른손이 한 일을 널리 알려서 헌금을 더 많이 걷으면, 더 큰 일을 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성당을 더 많이 짓고, 좋은 일을 더 많이 하고, 자선을 더 많이 하면 좋지 않습니까? 뭐가 나쁩니까? 세상에서 능력에 따라 연봉을 책정하듯이 교회 일도 경쟁적으로 하면 더 잘할 텐데, 왜 그렇게 하면 안 될까요? 왜 하느님의 일은 그토록 비효율적이고 비생산적인 방법으로 하라고 하실까요?
세상의 일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의 방법대로 해야 합니다. 효율보다 사랑이 우선이고, 생산보다 섬김이 우선입니다. 우리의 씨름 상대가 힘을 추구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들과 힘으로 싸워서는 절대로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세상적인 방법으로 하기 시작하는 순간 원수들에게 틈을 내어 주게 되고, 결국 그 일은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원수들의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누가 알고 걸려듭니까? 모릅니다. 죽는 날까지 모릅니다. 부지불식간에 원수의 손아귀에 걸려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철석같이 믿지만, 실은 사탄의 일을 돕는 것입니다. 세상이 멸망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하루를 살지 않으면, 하느님의 방법으로 일하지 않으면, 우리는 한순간에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다우려면 신자들이 서로 깨어 있어야 하고, 쇠가 쇠를 날카롭게 하듯 서로 권고하며 격려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일을 하는 방법입니다.
첫댓글 아멘.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