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이명숙 1945년 강원 양구 출생 1970년 [소년]지에 동시 '하늘', ' 아침' 등으로 추천 1981년 제9회 새싹 문학상 1985년 제2회 여성동아 대상 1998년 제6회 부산여성 문학상 2004년 제1회 「울림예술대상」 한국가곡작시상 부문 수상 시집 '내 혼에 불을 놓아'(1979), '민들레의 영토'(1981), '시간의 얼굴'(1989) 등
◆ 1945 강원도 양구에서 이대영, 김순옥의 1남3녀 중 셋째로 출생 ◆ 서울 청파동에 살 무렵(6세) 한국 전쟁발발. 9월에 부친이 납북 됨 ◆ 1952 부산 피난시절 부산 성남초등학교에 입학 ◆ 1958 서울 창경초등학교 졸업 ◆ 1958 무시험으로 서울 풍문여중 입학 (특활반 문예반에 들어 임영무 선생님의 지도를 받고 삶에 영향을 주는 친구들을 사귐) ◆ 부산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한 언니의 권유로 중3때 학교를 동래여중으로 옮김 (프랑스 유학을 염두에 두고 한 학년 월반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이행하지 않음) ◆ 1961 부산 동래여중 졸업 ◆ 1964 김천 성의여고 졸업 1963 제2회 신라문화제 전국 고등학교 백일장에서 시 장원 ◆ 1964 부산 성베네딕도 수녀원 입회 ◆ 1968 첫서원 ◆ 1968~70 한국천주교 중앙협의회 근무 ◆ 1970 <소년>지에 동시 '하늘',' 아침'등으로 추천 완료 ◆ 1975 필리핀 성 루이스 대학 영문학과 졸업 ◆ 1976 종신서원과 더불어 첫시집 <민들레의 영토> 출간 ◆ 1976~78 부산 성분도 병원 근무 ◆ 1978~82 수녀원 교육팀에서 일함(80~82:지원자 담당) ◆ 1985 서울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졸업 ◆ 1985~87 수녀원 자료실 담당 ◆ 1988~90 제44차 세계성체대회 신심분과에 근무 ◆ 1990~91 수녀회 설립 60주년 준비위원으로 일함 ◆ 1992~97 수녀회 총비서로 근무 ◆ 1997~2000 현재 수녀원 내 문서선교실 근무 ◆ 1998~99 부산 신라대학 사범대학에서 시감상 교양 강좌 ◆ 2000.3~ 부산 가톨릭대학 지산 교정에서 '생활 속의 시와 영성' 강의
1981 제9회 새싹 문학상 1985 제2회 여성동아 대상 1998 제6회 부산여성 문학상
시집 『민들레의 영토 』『시간의 얼굴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내 혼에 불을 놓아』『 다른 옷은 입을 수가 없네』 시선집 『사계절의 기도』『 다시 바다에서』『 고운새는 어디에 숨었을까 』 산문집 『두레박』『꽃삽 』『사랑할 땐 별이 되고』 옮긴책 『따뜻한 손길』『 모든 것은 기도에서 시작됩니다』 동시집 『엄마와 분꽃』
부산 수영구 광안4동 1278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우)613-806) 메일주소 : nunbird88@hanmail.net / cloud88@chollian.net
[동아일보] 부슬부슬 내리는 장맛비가 도시의 신록을 적시던 날의 오후, 서울 혜화동 성당 입구에서 이해인 수녀를 맞았다. 부산의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서 막 상경하는 길이라고 한다.
올해 이순을 맞은 그의 표정은 ‘명랑소녀’처럼 밝다. 물기를 머금은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정겨운 눈길로 주위를 둘러본다. “혜화동 성당은 저와 인연이 깊어요. 첫 영성체의 추억이 있는 곳이지요.”
여고를 졸업하던 해, 19세의 꽃다운 나이에 수도원에 입회한 이해인 수녀. 이제 40여 성상을 헤아린다.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도 어느덧 출간 30주년을 앞두고 있다. 신도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돌려보던 시집은 소리 소문 없이 팔려나가 공전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48쇄를 찍었다. “참,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지요.”
시집은 수도원의 깊은 담 안에서 아무의 손도 거치지 않고 홀로 숨어서 기도하듯 써내려간 100편의 시를 묶었다. 시 한 편, 한 편엔 자신의 전부를 향기로 바치고자 하는 젊은 수도자의 헌신과 순명(順命)에의 의지가 영혼의 불꽃처럼 타오른다. 그러면서도 고독과 목마름, 기다림과 슬픔을 어쩌지 못한다. “노오란 내 가슴이/하얗게 여위기 전/그이는 오실까….”
시인 구상은 “시인의 영글어가는 영혼의 모습이 너무도 장하고 아름다워서 눈시울을 적신다”고 평했다.
이 수녀의 시는 단순하고 소박하다. 평범하다면 지극히 평범하다. 정련된 언어라든가, 형식상의 실험이라든가, 심오한 사상은 찾아보기 어렵다. 너무 소녀 취향이고 감성적이라 문학적인 깊이와는 거리가 있다?
“제대로 옷을 못 입어 볼품없어 보이고, 써도 써도 끝까지 부끄러운 시지요. 나를 꼭 닮은 게지요. 혼자서 맨몸으로 펄럭이는 촛불 같다고나 할까요. 나의 언어는 나의 제물(祭物)입니다.”
그러나 묵상의 세계에서 퍼 올린 풋풋한 아마추어의 시는 기도처럼, 사랑의 고백처럼 독자들에게 파고들었다.
이 수녀의 글은 한결같다. 시든 산문이든 이웃에게 다가서고자 하는 간절함이 느껴진다. 그것은 모두 시로 쓰는 편지요, 편지로 쓰는 시다.
실제 그에게 있어 편지를 쓰는 일은 ‘문서 선교’이기도 하다. 그는 지난해와 올해에만 1000통이 넘는 편지를 썼다.
그는 많은 시집과 산문집을 펴냈다. 모두 합치면 500만 부가 넘게 팔렸다. ‘재벌 수녀님’이라고 놀리니 환하게 웃는다. “시인의 영광도, 인세 수입도 모두 하느님의 것이지요. 재물은 모두 교회에 귀속된답니다. 대신 하느님께 용돈을 타 쓰지요.”
그런 그도 독자들에게서 받은 편지만은 고이 간직하고 있다. 무소유의 삶 속에서도 그것만큼은 버릴 수 없었다고.
이제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서도 수도원의 종소리가 고운 환청으로 들린다는 이해인 수녀. “수도원 생활은 기쁨의 되새김질이 필요하다”며 지그시 눈을 감는다.
담백하고 수수한 빛깔의 평화와 기쁨…, 그것은 오랜 기다림과 인내의 시간들이 주는 아름다운 선물일까.
'시인 수녀'. '수녀 시인'. 특이한(?) 신분의 시인이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나 보다. 아주 오래 전부터 이해인 수녀님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그 분의 개인사에 대해서는 그분의 시 한마디, 한마디 글들 속에 다 녹아 있거니 생각했는데 이번에 수녀님의 출생연도에 새삼 놀라버렸다. 늘 단아한 수녀복에 화장기 전혀 없는 안경 낀 얼굴, 언제나 시집 안 간 이모 같았는데 쉰을 훌쩍 넘겨 예순을 바라본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이해인 수녀님’ 단어를 자판으로 치다가 실수로 ‘이해인 소녀’가 됐다. 그런데 왠지 어색하지 않았다. 그 분 마음이 시처럼 맑아 소녀 같이 보여 그런가보다. 인터뷰를 요청하자 TV와 라디오를 통해 익히 알고 있으시다며 반갑게 맞으시더니 거절하실 채비부터 하신다. 늘 말을 아끼시고 바쁘실 테니 그 정도는 예상하던 터였다. 수도원에서의 수도생활에 전념하기 위해 앞으로는 외부 활동을 중단할 것이라 하신다.
그렇다면 더더욱 수녀님을 지금 만나 뵈어야 하지 않겠는가. 부산 광안리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약속을 해서 뵙자니 날짜를 정하는 과정에서 거절의 이유를 드리게 될까 염려되어 인터넷을 통한 인터뷰를 제안드렸다.
빡빡한 수도원 생활의 와중에서
인터넷 검색창에 ‘이해인’ 세 글자만 쳐도 시인 수녀님의 정서가 여기저기서 묻어난다. 짬짬이 짜여진 수도원 생활 중에 언제 그 많은 답글을 올리시는지, 잠은 언제 주무시고 시는 언제 쓰시는 것일까. 인터넷 페이지 ‘샘터’와 ‘민들레 영토’에 들어가면 이해인 수녀님과 관련된 글과 답글들이 활기차게 넘쳐나 있다. 정겨운 마음들이 여기저기 배어있는 풍경이다.
- 날씨가 추워지면서 낙엽이 떨어지고 바람이 스산하게 부네요. 이런 가을에 어울리는 시로 수녀님과의 인터뷰를 시작하면 어떨까요?
그래요. 이미 많은 가을시가 있지만 이런 시가 어떨까 싶네요.
가을길 (이해인)
바람이 지나가다 내 마음의 창문을 살짝 흔드는 가을길
탱자. 시냇물. 어머니 그리운 단어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잠시 멈추어 선 가을길
푸른 하늘을 안으면 나의 사랑이 넓어지고 겸손한 땅을 밟으면 나의 꿈이 단단해 져요
이제 내 마음에도 서늘한 길 하나 낼 거에요 쓸쓸한 사람들을 잘 돌보는 나무 한 그루 키우려고~
- 가을을 타는 분들께 무언가를 생각하게 하는 시네요. 수녀님의 기도 제목은 매번 어떻게 달라지나요? 어떻게 기도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기도도 시 같을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도 기도하지만 우선 우리가 공동으로 하루에 4번 함께 바치는 성무일도를 아주 중요시합니다. 아침, 낮, 저녁, 밤에 따라 주제가 달라지고 찬미, 감사, 참회, 청원 등으로 이어지는 기도가 요일별로도 있답니다. 기도가 시 같을 거라는 말씀이 맘에 들어요.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지만 실은 거룩한 기도시간에 쓸모 없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 피곤하면 더러 졸기도 한답니다.
나도 성당에서 미사를 보다가 가끔 졸아본 적이 있다. 간혹 이것도 고해성사 감인데 하다가도 슬그머니 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곤 하는데 수녀님은 기도하다 졸기도 하신다며 그 분의 솔직함으로 내게 면죄부를 주신다. 바로 이런 담백한 맛의 성품이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키나보다.
- 요즈음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신앙은 있으나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평정을 얻는 법을 가르쳐주시겠습니까?
저는 성서와 함께 <논어>를 자주 읽어요. 마음의 평정, 즉 평상심을 키우는데 많은 도움을 준답니다. 요즘은 신앙 뿐 아니라 각자의 도덕관, 윤리관 등 모든 가치들에 대해 확신이 없는 것 같습니다. 경제적인 이유 뿐 아니라 삶의 의미와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불안과 허무를 느끼는 이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저는 '이 순간과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가정해보라'고 곧잘 말합니다. 저 역시 너무 힘들 때는 상상 속의 관 속에 들어가 자신을 돌아보며 다시 믿음과 겸손의 삶을 지니려고 애를 쓴답니다.
수녀님이 되시기 전, 어린 시절
- 수녀님이 되시기까지 얘기를 들려주세요.
어린 시절 저의 언니가 어머니보다 더 엄격했어요. 대학을 중퇴하고 어머니 대신 살림을 꾸려가던 언니가 친한 친구들과 함께 내가 초등학교 학생일 때 가르멜 수녀원에 들어갔어요. 방학 때 수녀원에 놀러 가면 수녀님들이 주는 초콜릿이나 예쁜 카드들이 나를 황홀하게 하더라고요. 철이 없었죠. 우리 집이 오랜 카톨릭 집안이어서 수도 생활에 대한 동경을 어렴풋이 지닌 게 아닌가 싶습니다. 언니의 영향이 컸죠.
가르멜 수녀님들 소개로 지금 내가 속해 있는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를 알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그 당시 수녀회에서 처음 운영을 맡은 김천 성의여고에 입학해 몇 명의 소녀들과 함께 수녀원 기숙사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사람은 왜 죽는가?’, ‘삶의 끝은 어디일까?’, ‘사랑하는 이들끼리도 왜 이렇듯 헤어져 사는 날들이 많은 걸까?’ 하는 생각이 많았던 아이에게 그래도 수도 생활은 가장 멋지고 보람 있는 삶의 형태로 비쳐지더라고요. (사진 설명: 초등학교 시절 -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이해인 수녀. 상상력이 풍부하고 '생각이 엉뚱한' 조숙한 소녀였다.)
- 개인적인 어린 시절의 가정이야기를 해주세요
본명은 이명숙입니다. 1945년에 태어났고 태어난 지 만 사흘만에 카톨릭 세례를 받았어요. 아버지는 다정다감하신 편이셨고 어머니가 오히려 무뚝뚝하셨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한국전쟁으로 여러 번 학교를 옮겼어요. 그래서인지 공부는 했지만 조용하고 우울한 상상 속에 사는 그런 아이였습니다. 아마 아버지가 전쟁 때 납북되시고 어머니가 삯바느질로 어렵게 살다보니 새침하게 공부만 하는 아이가 되었나 봅니다.
- 해인은 필명이시네요. 누가 지어주셨어요?
수녀원에 입회해서 어느 날 혼자 바다를 보며 해인이라는 필명을 만들었죠. 카톨릭에서 발간하는 <소년>지에 작품을 투고할 적마다 가끔씩 이 이름을 쓰곤 했었어요. 언니(이인숙: 베네딕도 수도원)도, 오빠(이인구: (전)서울예술 전문대학 광고 창작과 교수)도 이름에 '어질 인(仁)'자가 들어있다는 게 부럽기도 하고 기도할 때 늘 바다를 바라보며 기도했기 때문에 '바다 해(海)'자를 넣어 필명을 만들었죠. 이 이름이 이렇게 많이 쓰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 그렇군요 중학교 시절은 어떻게 보내셨어요?
중학교 시절은 풍문여중이 내게 많은 영향을 주었죠. 가수 박인희, 화랑 하는 김혜숙 같은 친구들에다 영어선생님이 읽어주시던 시, 임영무 선생님의 문예반 활동이 내게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교지에 실린 들국화라는 시를 지금도 시집에 넣어두고 볼 때가 있어요.
들국화
꿈을 잃고 숨져간 어느 소녀의 넋이 다시 피어난 것일까 흙냄새 풍겨오는 외로운 들길에 웃음 잃고 피어난 연보랏빛 꽃 하늘만 믿고 사는 푸른 마음 속에 바람이 실어다 주는 꿈과 같은 얘기 멀고 먼 하늘 나라의 얘기 구름 따라 날던 작은 새 한 마리 찾아 주면 타오르는 마음으로 노래를 엮어 사랑의 기쁨에 젖어보는 자꾸 하늘을 닮고 싶은 꽃 오늘은 어느 누구의 새하얀 마음을 울려 주었나 또 다시 바람이 일면 조그만 소망에 스스로 몸부림치는 꽃...
- 영화배우 최민수씨의 장모님(안현숙)이 그 시절부터 친구시라면서요.
그래요. 그 친구의 이야기를 ‘튜립꽃 같은 친구’라는 제목으로 [사랑할 땐 별이 되고]에 썼었죠.
- 문학소녀의 자질은 풍문 여중 시절(1958-61) ‘들국화’라는 시가 교지에 실렸을 때부터 자랐다고 이해하면 되겠습니까? 문학소녀의 자질은 언제 어떻게 발견하셨나요?
금융조합 사택인 청파동에서 우리 사남매가 한창 행복하게 살 무렵 한국전쟁이 일어났어요. 아버지가 납치를 당하시는 바람에 우리 가족에겐 안팎으로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전쟁이 나고 부산으로 피난을 갔지요. 그 때는 다들 그랬듯이 학교를 많이 옮겨 다녔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겨울길의 플라타나스 나무와 내가 주고받는 이야기를 그린 ‘학교가는 길’이란 글짓기로 큰상을 받은 적이 있어요. 공부는 곧잘 했지만 새침한 모습으로 상상 속에 사는 아이로 늘 조용했어요. 형편이 어려워져 삯바느질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사색이 많았을 겁니다. 그 무렵 언니, 오빠들이 읽는 <학원> 같은 잡지를 읽고 문학 소녀를 꿈꾸었는지 모릅니다.
- 고등학교 시절은 어떠셨어요?
수녀회에서 운영을 맡은 김천 성의여고에 입학했어요. 가족의 품을 떠나있어서인지 그 당시 시는 쓸쓸함과 슬픔이 많이 배어 있어요. 전국고등학교 백일장에서 ‘산맥’이란 시로 장원을 했었는데 시인 유치화 님이 심사위원이셨거든요. 정말 기뻤습니다. 그 시는 지금도 민들레 영토에 수록되어 있어요.
아득한 하늘너머 / 천년 그리운 님의 얼굴이 있어 / 천년을 묵묵히 기다려야 하는가 파랗게 이끼먹도록 /태양을 외면한 채 /매양 너를 키워 온 검은 바위 바위를 안고 그렇게 오래도록 / 침묵을 뒤집어쓰고 / 누워있어야만 하는가 지나온 날들을 생각지 않겠다 / 모질게 아려오는 슬픔의 노랠랑 / 아예 부르지 않겠다 녹슨 세월을 발돋음하고 / 노을처럼 붉게 타오르더니 고독이 하얗게/눈으로 내려쌓인 마음기슭엔 / 봄을 거부하는 하늘이 미워 가슴에 가득히 별을 심어다오 / 작은 꽃포기 하나라도 심어다오 구겨진 상처를 끌어안고 / 뜨거운 그리움에 몸부림치더니... 하늘이여, 내 새봄을 맞아 한 번의 푸른 웃음 / 웃어야할 때까지 / 천년을 또 묵묵히 기다려야 하는가 아, 마음 아픈 어제 날은 잊자 / 찬란한 내일만을 믿자.
(사진설명: 김천 성의여고 재학시절 - 2학년 때인 1963년, 제2회 신라문화제 전국고교백일장에서 장원을 차지했다.)
- 제가 시를 잘 몰라서인지 고등학생이 쓴 것 같지 않고 어려운데요
그 당시 삶에 대해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단 한번밖에 없는 삶을 끝까지 투신해도 아깝지 않은 삶으로서의 수도생활이라는 형태로 바뀌어가는 시기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