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루 발목
한 준 수
비 오는 날을 싫어하는 사람은 있을지 모르지만 눈 오는 날을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싫어하기는 고사하고 모두들 신이 나서 야단이다. 강아지들까지 신이 나서 공연히 뛰어다닌다. 그러니 사람들 대부분은 방안에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참지 못하고 밖으로 나가서는 하릴 없이 거리를 쏘다니든가 아니면 조용한 찻집에 앉아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아련한 옛 생각에 잠겨도 본다. 크리스마스 전날 같은 때 눈이 오면 마치 신이 내린 축복이라도 되는 양 매스컴까지 들뜨게 마련이다.
나도 눈 오는 날을 좋아한다. 마음이 들떠서 거리를 쏘다니기도 하고 투명한 유리창이 달린 찻집에 앉아 차를 마시며 정겹게 내리는 눈발을 바라보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다. 한참을 그렇게 기쁜 사색에 잠겼다가도 어느덧 침울해지고 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눈이 오는 날 기뻐할 수만 없는 까닭은, 내가 어릴 적 어느 날 작은형이 가져온 노루 발목 사건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내가 아홉 살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렵게나마 그럭저럭 별 근심 없이 살아오던 우리는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뜨셨으므로 생활이 어렵게 되고 말았다. 그렇게 되자 우선 큰형님은 처가살이로 들어가고 작은형과 누님과 나는 어머니를 따라 고향 당진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왜 그렇게 춥던지. 옷을 껴입는다고 해도 늘 추위에 떨어야 했다. 먹는 것 역시 부실한 데에 원인이 있었을 터이다. 우리는 외숙부의 윗방을 얻어 짐을 풀었다.
어머니는 우리 삼 남매를 먹여 살리기 위해 매일 도붓장수를 나가다 시피하고 집에 계시는 날이 얼마 없었다. 돌아오실 때는 먹을 것을 구해 가지고 오셨지만 대부분 늦은 밤이 된 후였다. 우리 삼남매는 거의 하루 두 끼 먹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밤새 내린 눈이 무릎까지 찼다. 마을 사람들은 먹이를 찾아 내려온 짐승들을 잡기 위해 몽둥이를 들고, 새끼그물을 울러 메고 모두 난리였다. 작은형도 몰이꾼으로 그들을 따라나섰다.
얼마 후 작은형이 돌아왔다. 손에는 노루 발목이 하나 들려 있었다. 부엌으로 들어간 형은 솥에 물을 붓더니 노루 발목을 잘 씻어서 담갔다. 그리고는 아궁이에 불을 집혔다. 그런데 무슨 볼일이 있는지 밖으로 휑하니 나가버렸다.
네 살 위인 누나와 나는 방문을 열어 놓고 노루 발목이 익기를 기다렸다. 얼마 되지 않아서 솥뚜껑 사이로 하얀 김이 모락모락 솟아올랐다. 오랜만에 맡는 고기 냄새였다. 입에 군침이 돌아 참을 수가 없었다. 참다못한 누나가 부엌으로 나갔다. 솥뚜껑을 열었다. 한 손에는 바가지를 들고 다를 손에는 조리를 들고 노루 발목을 건졌다. 바가지 안에 담긴 잘 익은 노루 발목, 다른 생각을 할 여지가 없었다. 둘이서 나누어 먹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고기 맛! 소금을 찍지 않았는데도 노린내가 났던 기억이 없다.
그런데 고기 맛을 채 음미하기도 전에 마당을 가로질러 오는 형의 발자국 소리가 우리의 정신을 버쩍 들게 하였다. 아차, 싶었지만 고기는 이미 먹은 뒤였다. 형은 오자마자 부엌으로 들어갔다. 누나와 나는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문구멍으로 형을 내다보았다. 솥뚜껑을 여는 게 보였다. 형도 역시 바가지와 조리로 노루 발목을 건져 올리고 있었다. 그때 바가지에 담겨 있던 하얀 뼈다귀. 지금도 그 하얀 뼈다귀가 기억에 생생하다. 물론 고기 한점 붙어 있을 턱이 없었다. 나는 문구멍에서 얼른 떨어졌다. 형이 울며 소리를 질렀다.
“다 먹었네, 즈들끼리 다 처먹었네!”
아무 기척도 못낸 채 누나와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형이 달려 들어와서 우리를 마구 때릴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형은 방으로 들어올 생각을 않고 부엌바닥에 주저앉아 울고만 있었다. 이제 울음을 그치고 달려 들어와서 우리를 때릴 차례라고 생각한 나는 더 크게 울었다.
그런데 형이 갑자기 울음을 그쳤다. 우리도 잠시 울음을 멈췄다. 다음에 전개될 상황이 궁금해서였는지 모른다. 그런데 형이 소리치는 것이었다.
“먹었으면 됐지, 울긴 왜들 울구 지랄여?”
우리는 숨도 크게 쉴 수가 없었다. 그때 형이 다시 소리쳤다. 그러나 그 소리는 전 보다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국물에다 소금이나 쳐서 먹어.”
그러고 나서 형은 다시 밖으로 주춤주춤 걸어 나갔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걸어가는 형의 뒷모습이 그렇게 쓸쓸하게 보일 수가 없었다. 우리는 그 허전해 보이는 모습을 바라보며 한참을 더 크게 울었다. 매를 맞은 것보다 더 마음아파서 그랬는지 모른다.
그렇게 착한 형이었는데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월북한 것일까? 아니면 아군으로서 전쟁 통에 전사한 것일까? 얼마 전에 적십자사에 남북 이산가족 상봉신청서를 내 보았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다.
눈이 오는 날이면 나는 마음이 울적해진다. 눈이 하얗게 쌓인 마당을 가로질러 나가던 형의 뒷모습 위에 살점하나 없는 하얀 노루 발목뼈가 겹쳐지곤 하기 때문이다.
첫댓글 눈 오는 날은 노루 발목 생각이 나실 텐데..준빠 님의 좋은 글 다시 읽고 갑니다..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어야 할 이야기가 아픈 역사의 생채기가되어 눈오는 날이면 더욱 시려와... 감사합니다.
“먹었으면 됐지, 울긴 왜들 울구 지랄여?”......... “국물에다 소금이나 쳐서 먹어.”
아, 가슴이 꽉 막힙니다.
어떻게 지어낸들 이렇게 아리게 할 수 있을지요.
먹먹해지는 이 느낌, 이런 삶을 살아내시고도 늘 유머를 잃지 않으시는 준빠님, 존경스럽습니다.
구구절절 사연 많아도 이렇게 감동적으로 쓰긴 쉽지 않지요. 다시 읽어도 가슴이 아립니다.
언제 읽고 댓글도 쓴 것 같은 이 기억은 어찌된 건지 모르겠어요.
가슴이 울컥해지는 글, 준빠표 감동이 아닐수 없습니다.
'추천방'에 올렸던 글을 이리로 옮겼습니다.
그때는 왜 그리 가난한 사람이 많았는지... 요즘 애들은 상상이 안 될 일이지요. 그래도 그때가 인정은 더 풍성해서 줄인 배를 사랑으로 채우며 살았겠지요. 형만한 아우 없다는 말이 실감나게 하는 글입니다.
가슴이 뭉클해 지네요.
잘 읽었습니다.
언젠가는 작은 형님을 만나게 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저도 눈이 오는 날은 유년시절의 향수에 젖곤 합니다. 준빠 선생님, 평생동안 가슴이 짠하시겠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