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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구약에서의 영성: 하나님의 임재를 중심으로
이상에서 살펴본대로 구약에서의 영이해에 기초로 구약성서의 영성은 영/육의 합일체로서 인간이 하나님과 갖는 교제(communion), 인간의 존재 전 영역에서의 하나님과의 만남(encounter)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 개념을 좀더 구체적으로 역사적인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야훼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chosen people)인 이스라엘의 삶 속에서의 구원자이신 하나님과의 만남과 교제로 볼 수 있고, 이를 신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가 구약성서의 영성이해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구약성서의 하나님은 역사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계시의 신"(deus revelatus)인 동시에 자신을 숨기시는 "감추어져 있는 신"(Deus abscconditus)인 상반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실재(elusive Presense)로 나타난다.
이처럼 구약신앙은 이스라엘의 역사속에 개입하셔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 그들과 선민으로 관계를 맺으시고, 이러한 관계를 파기한 이스라엘과 새로운 관계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역사로 이 역사는 이스라엘의 구체적인 역사의 자리였으며 그들의 삶속이었다.
제1절 에덴동산에서의 하나님의 임재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주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끌어(이카츠) 에덴에 두셨다. 이카츠는(취하다, 데리고 오다)에서 파생한 말로서 아담의 전인격을 인도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있을 곳은 에덴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그 곳에 두사(야니헤후) 그것들을 다스리며(레아베다흐) 지키게 하셨다. 이는 '지배하다', '통치하다'라는 뜻인데, 인간만이 다른 피조물들을 주관할 수 있는 권위와 능력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또 아바드(일하다, 경작하다, 봉사하다)의 단순 부정사로 우리가 늘 말하는 문화명령이다. 문화가 영어로 culture인데, 이것은 cultivate(경작하다)에서 나온 말이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땅에 흔적을 남기게 되는데, 인간의 역사는 결국 인간의 흙에 대한 경작의 결과 생기게 된 것이고, 그 흔적이 이어져서 문화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역사 가운데서 행한 모든 흔적은 하나도 남김없이 남게 된다. 여기에서 또한 심판의 기준과 상급의 기준이 남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스리다’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동사 ‘아바드’는 땅을 경작하여 가꾸는 인간의 근면한 모습을 보여주며. 지키다’에 해당하는 샤마르’는 창조된 원형 그대로 보존해야 하는 사명을 말하고 있다. 전자가 개발의 측면을 보여준다면, 후자는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 곧 개발이 결코 창조의 본질을 파괴해서는 않됨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은 범죄로 말미암아 대신(對神)관계를 비롯하여 대인(對人)관계가 단절되었고 급기야는 축복된 땅으로부터 추방되는 비극적 운명을 겪게 되었다.
먹지 말라(로 토칼)는 말씀은 이는 단순 부정으로서 결코 먹어서는 안된다는 강한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 흔히 우리는 선악과 자체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는데 이 명령을 통해 깨닫는 바는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 그 '실과' 자체에 있지 않고 그것을 먹고자 하는 '의지'와 '행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선악과는 선과 악을 구분짓는 나무의 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치 길중앙에 새겨진 중아선 처럼말이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을 따라 좌로나 우로나 지우치지 말ㄹ라고 하셨는데 이처럼 선악과는 인간의 순종 불순종을 구분짖는 언약의 상징인 것이다.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은 최초의 행위 언약이다. 시내산 이후에 율법이 주어지기전까지 이것은 율법의 역할을 한다.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은 인간의 본분이다.그러나 그 말씀에 순종하면 영원히 살 것이다. 그러나 결국 아담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하고 말았다. 우리가 명심해야할 점은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실과를 따서 먹었느냐 안먹었느냐의 행위 이전에 하나님과의 언약을 믿었느냐 믿지 아니하였느냐는 믿음의 차원에서 보아야만 한다는 점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아담을 찾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은 항상 하나님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이 질문을 던지시며 아담을 찾으실 때는 상황이 달라져 있었다. 죄와 함께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제한 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죄많은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인간이 범죄함으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된 직후에 계시 되었다. 성경은 최초의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며 하나님 한분만 섬겼고, 동물제사를 드렸음을 말해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죄는 오직 제물의 피를 흘림으로서만이 사해질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창3:21). 즉 대속의 제물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아담의 아들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 아벨은 양을 잡아 드렸거 가인은 땅의 소산불로 하나님께 드렸으나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의 선택하심으로(창4:1-7) 빌소 제사의 방법과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을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아벨의 피있는 제사는 믿음으로 받아들여졌고(히11:4) 노아(8:20), 야곱(창31:54) 그리고 출애굽 전까지 히브리인들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벙을 알았고 실천했다.(출10:25)
구약의 신앙은 생활속에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영적으로 살아있는 관계속에서 항상 생동감이 넘쳤음을 성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하나님과 인간의 살아있는 관계속에서 구약의 영성은 '다스'( )와 '셰키나'( )라는 용어로 집약될 수 있다. 그리고 구약종교의 후기에 나타난 종말신앙도 포함된다. '다스'는 '지혜'로 번역할 수 있어, 하나님의 계획을 분별함을 의미하고, '셰키나'는 햇빛이 물체에 접촉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인간속에 와서 자신을 드러낸다는 의미로, 이러한 자기실현은 햇빛처럼 어디에나 임재하게 된다.
제2절 모리아산에서의 하나님의 임재
성경 창22:7부터 나오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리는 기사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임재와 영성의 계시는 어떤 것일까?
이삭은 아버지에게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라고 물어 본다. 이는 (1) 이스라엘의 제사 제도가 이미 모세 시대 이전부터 시작되었음을 증거해 주며 (2) 아브라함의 경건 생활과 제사 행위를 통해 이삭이 제사를 드리는 절차와 방법, 필요한 제물에 대하여 소상히 알고 있었음을 나타내 준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하나님이...친히 준비하시리라고 답했다. 이삭의 질문에 대한 거짓말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사전에 이삭을 대신할 다른 제물을 준비해 놓으시겠다고 자신에게 말씀하셨다는 뜻도 아니다. 다만 이것은 앞으로 되어질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온전히 그리고 선하게 이루어질 것임을 믿는 확신에 찬 대답일 뿐이다(히11:17-19). 하지만 모리아산 정상에 이르렀을때는 이삭을 결박하여 칼을 빼들었다. 이로써 이삭은 아브라함이 자신을 제물로 삼아 제사를 드리려 한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혈기 왕성한 이삭은 하려고만 하였다면 노쇠한 아버지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삭은 아버지의 뜻에 묵묵히 순종하였는데 아마 아브라함의 행위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작정된 것임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삭의 순종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스스로를 대속 제물로 십자가에 내어 주기까지 한 그리스도의 순종(빌 2:8)과 속죄 사역(사 53:5)을 예표한다.
그러자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났다. 일전에 하갈에게 현현하셨던 분(16:7)과 동일한 성육신(成肉身) 이 전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라고 다급히 부르신다. 다급한 반복은 사태의 긴박성과 함께 이름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분명히 보여 주기 위함이다. 즉 이삭은 결코 죽임당해서는 안 되며 아브라함은 약속의 상속자인 이삭을 통해서만 진정 열국의 아비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해 준다(17:5). 이때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의 임재는 우리에게 성육신하기 이전의 그리스도를 보게한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곳을 여호와 이레라고 하였다. 이는 '여호와께서 돌보신다'는 뜻으로 8절에 의거하여 명명한 이름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쓸 것을 미리 아시고 때에 따라 공급해 주시는 분(마 6:25-32)임을 찬양한 기념비적 이름이다. 그리고 여호와의 사자는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라고 17절에서 말한다. 맹세라는 것은 본래 자기보다 높은 자가 아니면 절대자의 이름을 걸고서 하는 것이 관례이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맹세의 권위가 서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개 인간들은 최종적으로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곤 한다(삼상 19:7;왕상 1:30;느 13:25;사 19:18). 그런데 하나님께 있어서는 자신보다 더 높은 이가 없다. 그분만이 절대자이시며 지고자(至高者)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은 자신을 가리켜 맹세할 수 밖에 없는데 자신의 영원한 삶과 존재를 담보로 맹세한 그 약속은 결코 변개(變改)될 수 없으며(삼상 15:29) 또한 가장 엄숙히 시행될 것이다(히 6:13-17).
"하늘의 별과...같게 하리니 네 씨가...문을 얻으리라,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의 근원이 되리라,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고 하시며 육신의 번민과 애정을 극복하고 하나님을 경외한 아브라함의 믿음의 순종을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셨다. 이러한 인정은 누구든지 악에 물들지 아니하며 믿음의 길을 달려간 자이면 다 받을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자들을 자신의 영광의 자리에로 초대해 주실 것이다(마 25:21).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관련해서 번제는 이스라엘의 한 전형으로 굳어져 갔다. 이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다.
족장시대의 제의는 주로 하나님께서 족장과 그 가정에 대해서 언약을 세운 개인제단과 가정제단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가 족장들의 가정이었다. 그리고 히브리 족장들은 예언자, 제사장 왕으로 불리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받았으며 그리고 작은 단위의 씨족국가 형태의 왕이었다. 여기에서 족장은 제사장으로 제사를 주관하고 집행하였다.
족장들의 제의는 사람들이 말하듯이 극히 단순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모든 셈족 사이에서 그렇듯이 그 제의의 중심은 짐승제물이었다. 그러나 이 제헌은 어느 곳에서나 조직적 제관없이 씨족의 직장 자신의 손으로 거행되었으며 결코 어떤 지방색을 띤 제의가 아니라 부조전래(父祖傳來)의 씨족신 제의였던 것이다.
족장들의 제의의 주요특징 중 하나는 신과 계인적 관계, 곧 '계약'을 맺는 관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각 경우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자기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요구와 약속을 했다. 또한 족장들의 제의의 특징은 씨족 또는 가족간의 강한 연대의식이다.
족장시대에 있어서 야훼 하나님께 드리는 제의의 제단에는 희생의 제물이 제의 의식의 중심이었는데 다음 성경 구절에서 제사의 방법등을 알 수 있다.
"야훼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3년된 암소와 3년된 암 염소와 3년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새끼를 취할지니라 아브라함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창 15:9∼10). 또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드릴 때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야훼께서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창 22:5∼10).
이상에서 보는대로 족장시대에는 족장자신이 제사장이 되어 거룩한 장소에서 흙이나 돌로 단을 쌓고 희생제물을 드림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여기에 응답하시어 언약을 세웠던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초보적이고, 개인적이며, 가족적이지만 인격적인 하나님께서 인간과 교제하시기를 원하셨고, 인간은 이에 제사로서 응답하였다.
제3절 시내산에서의 하나님의 임재
출애굽기 19장에서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전에 하나님께서 호렙 산 떨기나무 사이에 나타나셔서 처음으로 모세를 부르신 후 그에게 다시 말씀하신다. 이는 전에 주셨던 예언이 성취되는 첫번째 단계이다(3:4-12).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 이곳 시내산에서 자신을 경배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이 사실을 잊지 않은 모세는 시내 산에 도착하자마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산 위로 올라갔는데, 이는 앞으로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을 경배해야 할 것인지를 계시받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은 먼저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고 하시는 말씀으로 그 임재를 드러내셨다. 여기에서 '이르고'와 '고하라'는 말은 각각 히브리어의 '아마르'와 '나가드'로서 '너는 말해야 한다'와 '너는 알려야 한다'는 뜻의 강한 명령형 동사이다. 즉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분명히 말하여 알려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미의 임재가 아브라함에게는 개인적 족장가정의 문제와 연결하여 나타나시고 말씀하는 것으로 드러나지만 모세에게 임재하시는하나님은 백성의 대언자로 세우기 위해서 나타나시는 임재인 것이다. 족자적 차원에서 이스라엘 전체를 위한 공동체적 목회의 관점에서 모세에게 말씀하는 것이다. 또한 히브리 민족의 이름이 애굽에 내려간 히브리 민족의 직접적 조상인 야곱 족속과 그 야곱의 언약적 칭호인 이스라엘 자손(창 32:24-28)이라는 두가지 칭호로 사용된 점에 유의해야 한다<창 10:21-32강해, 히브리인과 이스라엘인>. 실로 하나님은 인간과 계약을 맺고 구원하시되 그때 그때마다 무계획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세우신 당신의 의지와 공의에 따라 구원 사역을 행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또 이스라엘 나라를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시는 것으로 전우주적인 하나님의 임재로 이어질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70인역은 이구절을 '왕 같은 제사장직' (바실레이온 히에라튜마)이라는 의미로 번역하였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행하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위해 특별히 선택된 민족으로서(4:22) 하나님과 열방 사이를 중재하는 제사장이 됨과 동시에 그들을 다스리는 왕권을 가지게 된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말이다. 그러나 육적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써 그 특권을 상실하였으며(롬 11:20) 오늘날 이 특권은 영적 이스라엘, 즉 하나님을 믿는 성도(집합적으로는 '교회') 모두에게 주어졌다(벧전 2:9). 이것이 백성들에게 전달 되어 졌을 때 그들은 일제히 응답하여 가로되 "다 행하리이다"고했다. 그러자 하나님은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임재하셔서 그 모든 대언의 말씀을 믿게 하셨다.(출19:16)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은 하나님의 존재의 영광과 그 위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초자연적인 현상들로서 큰 뇌성(시 77:18;104:7)과 번쩍이는 빛(마 4:16;행 9:3;딤전 6:16)을 의미한다. 성경에 나타나는 이런 표현은 종종 인간의 연약함과 대조하여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계시할 때에 사용되었다(시 77:18;97:4;계4:5;11:19). 즉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비록 무형의 존재이지만 시내 산에 임재할 때 우뢰와 번개 따위를 동반하고 나타나심으로써 인간들에게 자신의 위엄과 영광을 가시적(可視的)으로 드러내 보이셨던 것이다. 한편 여기에서의 '빽빽한 구름'이 히 12:18에서는 '흑운(黑雲)과 흑암'으로 묘사되었다<9절>. 그리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게 들렸다. 성경에서 나팔 소리는 대개 천사들에 의해 들려졌다(계8:6, 7, 8, 10, 12;9:1, 13;11:15). 이 당시에도 하나님께서는 인간 역사의 시공(時空) 속에 당신께서 친히 개입하시는 것을 위엄스럽게 선포하는 수단으로써, 당신의 종들인 천사들로 하여금 나팔을 불도록 하셨을 것이다(Knobel). 동시에 이 나팔 소리는 감추어진 뜻을 이제 밝혀 계시할 것이라는 일종의 예고 행위이기도 했다. 한편 성경은 예수께서도 장차 재림하실 때에 천사와 함께 하나님의 나팔 소리 가운데 이 세상에 임재하실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다(마 24:31;고전 15:52;살전 4:161). 그러자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었다. 또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영ㅆ는데 시내 산 전체가 온통 연기로 뒤덮였음을 뜻한다. 즉 하나님께서 불 가운데 임하셨으므로 초자연적인 연기가 나타나 시내 산을 덮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신명기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마치 맹렬히 타오르는 화염같이 온 산에 충만히 퍼져 있었다고 묘사하였다(신 4:11).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셨다. 히 12:29에서는 이 구절과 관련하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고 묘사하였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불의에 대하여 진노하시며 심판하시는 질투의 하나님이심을 암시한다(신 4:24). 불 가운데 강림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도 동일한 사실을 느끼고 깨달았을 것이다. 온 산이 크게 진동하였고
하나님은 음성으로 대답하시었다더(출19:19) 그리고 여호와께서 다시 모세를 부르셨는데 이는 이방 종교와 여호와 종교와의 차이점을 보여준다. 즉 이방 종교에서는 먼저 인간이 신을 애타게 찾음으로써 신과 인간 간의 관계가 성립되는 반면, 여호와의 종교는 하나님께서 친히 먼저 인간을 부르시고 찾아 주심으로써 양자간의 교제를 성립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도 하나님께서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백성들을 대표하여 모세를 중재자로 부르심으로써 그들과의 교제를 속개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날 하나님의 임재를 보고 그 영광 앞에서 두려워 떨었으며 성결을 위하여 자신들의 몸을 도사렸다.
야훼께서 말씀을 계속하셨다. "너는 나의 옆에 있는 한 곳, 그 바위 위에 서 있어라. 나의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바위틈에 집어넣고,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너를 나의 손바닥으로 가리워 주겠다. 그 뒤에 내가 나의 손바닥을 거두리니, 네가 나의 등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얼굴은 볼 수 없을 것이다."(출33:21-23)
그 때에 야훼께서 구름에 싸여 내려오셔서, 그와 함께 거기에 서서, 거룩한 이름 "야훼"를 선포하셨다. 야훼께서 모세의 앞으로 지나가시면서 선포하셨다. "야훼, 나 야훼는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한 하나님이다.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며, 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이다. 그러나 나는 죄를 벌하지 않은 채 그냥 넘기지는 아니한다. 아버지가 죄를 지으면, 본인에게 뿐만 아니라 삼사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출34:5-7)
이 구절들은 바로 하나님의 자신의 드러냄과 감추이심의 존재적 특성을 잘 드러내 보여주는 대표적인 구절로서 그 양면성이 서로 대조적인 표현(얼굴:등)으로 잘 나타나 있고, 아울러 그 속성(은혜, 불쌍히 여김/긍휼)도 잘 묘사해 주고 있다. 이것은 바로 다름아닌 야훼 하나님의 존재양식과 계시양식의 특성을 나타내주는 표현들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영성의 근원인 이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역사의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그 이해를 시도해야 한다. 즉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는 구원행위를 통해서 이스라엘과 구체적인 역사적 관계를 가진 분으로서 약한 자와 억눌린 자를 돌보시는 신이라는 것이다.
야훼 하나님의 이스라엘 역사속에서 그 백성들을 이집트의 압제와 바빌론의 속박에서 해방시킨 구원자로서의 구원행위에서 "해방의 영성"(spirituality of liberation:정의, 공의, 자유의 정신)을 엿볼 수 있으며,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여 부르시고 관계를 맺으시는 계약의 행위에서 "창조의 영성"(spirituality of creation: 살롬의 정신)을 찾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선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배반하고 그와의 관계를 파기시킨 관계단절이라는 파멸의 상태에서 그들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시는 그의 적극적인 관계회복의 행위에서 "새창조의 영성"(spirituality of new creation:화해의 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 이를 기초로 구약성서의 영성을 해방, 창조, 재창조의 영성으로 정리할 수 있다.
제4절 회막시대의 하나님의 임재
성경 출애굽기 40:16부터 나오는 회막에서의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에게 또 다른 여호와의 영광을 보게 한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산에서 모세에게 지시하신 대로(25-31장) 마침내 성막이 세워지고, 모든 기구들이 배치되며, 또한 제사장이 성별되어 그 직무를 수행하게 되기까지의 모든 성막 봉헌식이 완료되는 장면이다. 이러한 결과가 있기까지 모세는 두 번이나 40일씩 금식했고(9:24:18;34:28), 백성들의 범죄와 이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 등(32:1-35) 숱한 어려움을 겪었다. 실로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 온전히 이루어지기 까지에는 무수한 수고와 인내가 따라야 함을 암시한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다 제자리에 놓였을때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해졌다. 구름은 성경에서 종종 하나님의 임재를 표현하는 상징으로나타났다(19:16;24:16). 여기서도 구름은 하나님이 회막, 즉 성막에 임재하셨음을 나타 내는데. 곧 성막이 완공됨으로써 비로소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심이 가시적(可視的)으로 표현된 것이다. 한편 여기서 구름이 덮인 곳이 성막(미쉬칸)이 아닌 회막(오헬 모에드), 즉 '만남의 장막'(the tent ofmeeting)으로 표현되었음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만나러' 오셨음을 표현코자 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여호와의 영광은 하나님 자신 또는 하나님 속성의 외부적인 표현이다(33:18).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에 나타난 것은 여러가지 의미를 지니는데 곧 다음과 같다. ① 하나님의 인치심을 의미한다. ② 하나님의 거룩케 하심을 의미한다(29:43, 44) ③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의미한다. ④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의미한다(33:14) 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의미한다(36-38절;민 9:17). ⑥ 하나님의 섬김받으심을 의미한다(6:7;29:45, 46;창 17:7). ⑦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의미한다(신 29:5). ⑧ 하나님의 승리케 하심을 의미한다(34:10, 11;신 2:31-36;3:1-4). 한편이 성막 위에는 항상 구름 기둥이 있어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상징적으로 나타내 보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광야 생활 중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는 안내자의 구실까지하였다.
모세는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은 이스라엘의 지도자이자 대표자이다. 그러나 그러한 모세조차도 하나님의 영광 앞에는 나아갈 수 없었다. 이는 죄인인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음(왕상 19:13;사6:5)을 보여 준다(33:20-23)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ㄱ 때문이다. 아마도 여호와의 영광은 성막의 내외(內外)에 가득찬 구름 속에서 찬란히 빛나는 광채의 형태로 나타났을 것이다(34:30-35;고후3:7-11).
그리고 나타난 그 구름은 이스라엘을 인도하기 시작 하였다. 이스라엘은 구름의 향방에 따라 움직였다(민 9:15-23). 하나님은 이같이 이스라엘을 앞서서 인도하셨고, 멈추어 서서 이스라엘을 훈련시키셨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만을 따라야 했고 결코 하나님보다 앞서서 나아갈 수 없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들도 이 광야 같은 나그네 인생길(벧전 1:1, 17;2:11)에서 우리 자신의 노력이나 지혜, 의지보다도 영적 구름 기둥 즉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을 따라 충실히 살아가도록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회막에서 배워야할 하나님의 임재이다. 우리는 결국 언제나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살아갈 때 결구 가장 올바른 영성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하겠다.
제5절 성전시대의 하나님의 임재
성경 열왕기상 8:63에서 부터나오는 성전 봉헌식과 솔로몬의 감사 제사에서 우리는 다시한번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와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보게 된다. 성전을 완공한후 솔로몬은 화목제의 희생을 드린다. 우리가 아는대로 원어로는 '제바흐 쉘라밈'인데, 이 용어는 제사 후 그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제사에만 쓰였다(삼상 1:21;20:29 등). 신 27:7을 보면 "또 '쉘라밈'(화목제)을 드리고 거기서 먹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레 7:15에 의하면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 희생의 고기"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쉘라밈'은 "샬롬"으로서 하나님과 삶과의 화목(혹은 평화)를 의미한다. 이 때 이 "샬롬"을 위하여 소가 이만 이천이요. 양이 십 이만이라는 엄청난 제물이 드려졌다. (1)보통의 화목제와 달리 성전 낙성식이라는 역사적 대사건을 위한 제사일 뿐 아니라,(2) 이 제상에 참여한 사람들은 '하맛 어귀에서부터 애굽 하수까지'의 전 국민(가장및 대표들)으로 나타나고 있고(65절), (3) 원래의 번제단만으로 감당할 수 없어서 성전 앞뜰 가운데를 구별해 특별히 사용해야 할 정도였기 때문에(64절). 이렇게 많은 제물이 드려진 것이다. 일천번제 이후 여호와께서 기브온 산당에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신 방식은 밤에 꿈을 통해서였다(3:5,15)
그리고 기브온 계시에 이어 두번째로 하나님의 계시가 솔로몬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꿈을 통해서였다. 성전은 성전 완공과 더불어 바로 봉헌되어 졌고, 솔로몬의 봉헌 기도(8:22-53)에 대한 응답으로 불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희생 제물을 사르고 또한 여호와의 영광의 빛이 성전에 가득임함으로써(대하 7:1) 일단 상달되었다고 볼 수 있다. 솔로몬을 향한 하나님의 두번째 계시는 과거 솔로몬의 봉헌 기도(8:22-53)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한편, 본문(3-9절)과 병행 구절인 대하 7:12-22에서는 보다 자세하게 하나님의 메시지가 주어져 있다.
임재하여 하신 말씀의 내용은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그곳에 나의 이름을...두며 나의 마음을 그곳에 두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음'(레브) 하나님의 마음이 항상 거기 있어서 백성들을 마나주시겠다는 약속이었다. 이전에는 모세나 선지자들만이 하나님을 만났으나 이제는 백성 누구라도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찾아오면 이제 만나 주시겟다는 약속인 것이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처를 정하신 곳이다. 그리고 결국 이것은 후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성취되어진다.
박근원 교수는 이러한 '셰키나'에 근거를 둔 영성으로 유대교 역사 후기에 이 세상에 아무런 희망이 없을 적마다 하나님께서 이 역사속에 찾아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종말신앙(apoclyticism)과 비슷한 사상이 태동하여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상으로까지 발전되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상적 근거가 신약의 종말론적 메시지와 함께 시작되는 예수님의 사역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반이 된다.
그러므로 구약성서의 영성을 탈 역사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며 이해하려는 소극적인 자세에서 우리의 삶의 현장속에서 역사의 주로서 활동하고 계시는 하나님과 적극적인 만남을 모색하는 적극적인 자세로 구약영성을 이해해야 한다. 구약성서의 영성은 하나님의 계약백성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이해에 그 기초를 둔 것으로,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부름받은 자로서의 합당한 삶,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즉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감을 최선을 다해 이룩하는 의미있는 삶을 영위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도 좋다.
제5장 신약에서의 영성
예수님에게 있어서 율법은 모세를 통해서 주어진 것으로서 인간의 죄성을 전제하고 주어진 것이었다(마19:1-9, 막10:2-9). 따라서 이제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함께 이루어진 새창조 안에서 율법은 그 기능을 다하고, 새로이 창조된 인간은 율법의 준수는 영성을 이루어가는 방편이 더 이상 아니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율법의 완성은 하나님 나라에로 부름받은 새로운 존재의 변화의 결과였다. 정결의 개념에 대해서도 아무리 철저히 율법을 지켜서 레위기적 정결을 이룬다 하더라도 내면적인 정결을 이루지 못하면 참된 정화에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다. 영성생활의 목적은 내면적인 정화에 있는 것이지, 형식적인 행위에 있지 않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당시의 정례화된 율법과 형식을 거부하는 행동을 취하게 되었을까? 모세에게 주어진 율법은 타락한 죄인의 하나님 형상회복이라는 대 전제하에 주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이 상실된 인간은 내면적인 변화없이 외형적인 준수에 머무르게 되었다. 앞서서 살펴보았듯이, 구약의 영성은 하나님의 형상이 상실내지 왜곡된 인간을 새로운 관계속에서 만나주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의 역사이다. 즉 새창조의 영성이라고 살펴보았다.
이러한 새창조의 역사의 구심점이 곧 예수님이시다. 신약의 영성을 근본적으로 그리고 전체적으로 결정지어 주고 있는 근거는 예수님 자신이 종말론적인 비전 안에서 조망(眺望)했던 새창조의 현실이다. 하나님의 결정적인 구원 사건이 일어날 "그 날", "여호와의 날"을 대망했던 예언자들은 종말론적인 유형론(eschatological typology)에 따라서 새 창조의 출현을 기대했다. 즉, 하나님의 구원의 날이 이르면, 타락된 원 창조가 회복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서 원 창조의 회복이지만, 가히 "새 창조"라고 부르기에 충분한 사건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이러한 예수님의 새 창조의 역사는 부활로서 증명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부활은 성령의 인도와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에서 비롯된 역동적 활동이었고, 이어서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과 초대교회에 이러한 영적 힘이 계승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새창조의 역사는 강력한 성령의 역사이다. 부활신앙에 활력을 부여한 원동력이 바로 성령의 역사이다. 그 하나님체험의 역사가 바로 오순절날 성령의 역사이다.
제1절 예수의 몸(교회시대의 영성)
예수님의 첫 사역의 모습은 대단히 역동적이다. 흔히 3대 사역이라 불리는 "선포, 가르침, 치유"중에서 치유는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마태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Jesus went throughout Galilee, teaching in their synagogues, preaching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and healing every disease and sickness among the people. News about him spread all over Syria, and people brought to him all who were ill with various diseases, those suffering severe pain, the demon-possessed, those having seizures, and the paralyzed, and he healed them(Matt. 4: 23- 25).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사역의 연장선 상에 병든 자는 항상 따라 다녔고, 병든 자들에게 주님은 언제나 치유를 행하셨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그의 치유사역에는 몇가지 신학적인 특징이 있다.
신약성서에서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처음으로 치유사역을 행하셨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9: 35절에서 ". . . and healing every disease and sickness."라고 하였다. 치유는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고(마 8:3), 또한 주님은 치유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셨다(마 8:7). 특히 의사였던 누가는 예수님의 치유를 의사의 시각을 통해 관찰하고 기록하기를 "해 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히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눅 4:40)라고 하였다. 즉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서 치유가 자연스럽게 행하여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예수님의 치유 행위를 공관복음은 거의 일치하게 기술한 특징이 있다.
제2절 예수님의 영성능력의 비결
1.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성
"왜 예수는 병자를 치유하셨는가?"의 질문은 대단히 세속적인 부분이긴 하나 예수님의 치유동기와 관련이 있다. 더필드와 반 클리브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병고치신 기적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들은 다섯가지 이유를 제시했는 데, 첫째는 주님의 말씀의 약속 때문에(Because of the Promises of His Word), 둘째는 주의 뜻을 계시하기 위하여(In Order to Reveal His Will), 셋째는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기 위하여(To Manifest the Work of God), 넷째는 예수님의 동정심 때문에(Because of His Compassion), 다섯째는 주님의 능력 뿐만 아니라, 그의 자원해 하시려 하는 의지를 믿는 믿음 때문에(Because of Faith-Not Only in His Ability, But Also His Willingness)로 보았다. 배상길은 치유사역의 동기와 필요성을 고침받기를 원하는 많은 병자들이 있다는 것에서 찾았다. 그러면 예수가 고치신 이유는 무엇인가? 배상길은 치유의 이유를 여섯가지로 제시했는데,
첫째는 긍휼의 표현때문에, 둘째는 자비를 부르짖는 데에 대한 반응으로, 셋째는 믿음에 대한 응답으로, 넷째는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다섯째는 성경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여섯째는 악한 영에 대한 적개심(hostility)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의 치유동기는 주님의 사랑의 표현의 수단이기도 하다. 그리고 예수님의 치유사역에는 그 사역의 목적이 있다. 존 윔버(John Wimber)와 케빈 스프링거(Kevin Springer)는 "복음을 확증하고 동시에 교회를 세우는 것이 신유의 목적"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신유의 목적이 단지 그것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되어야 함을 주장하였는데,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의 표현(마 14:14; 20:34; 막 1:41). .자신에 관한 그리스도의 주장이 진실된 것임을 증거하는 것(마 8:14-17; 눅 5:18-26),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였음을 보여주는 것(마 4:23).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마 11:1-6).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영적으로 행하시고자 하는 바를 육체적인 차원에서 보여주는 것(마 9:1-8).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만드는 것(눅 10:8-12). 복음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위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눅 7:1-10). 이 모든 일들은 그리스도께서 자 신의 한 몸안에서 교회를 세우시는 사역인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의 여성도 교회를 세우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단순히 자신의 문제해결이나 ㅍ안의 셰계만을 구하는 영성의 추구가 되어서는 중세의 수도원운동과 별 다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치유와 기적의 목적은 제자들은 물론 오늘 이시대에 이르기는 모든 신앙을 가졌거나 갖고자 하는 자들에게 신앙고백을 하도록 했고, 지금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하지 않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하나님의 치유는 믿는 자들을 통해 계속해서 일어나야 한다.
2.메시아로서의 영성
예수님은 성서의 여러 본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르렀다고 선언을 하였다. 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메세지는 세 공관복음서의 일치된 내용이다. 제임스 칼라스(James Kallas)는 "하나님의 나라"의 사상이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에 있어서 중심적이며 가장 중요한 첫번째 설교의 내용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는 Kingship, 곧 Kingly Dominion, 혹은 The Supremacy을 의미하고 구체적인 개념으로 왕국을 의미하며, 공간적이며 실제적인 국가(a static entity)를 나타내는 것이다. 게하르더스 보스(Geerhardus Vos)는 그 하나님의 나라에 "the threefold essence"이 있다고 했는 데, 첫째는 구원을 나타내는 능력의 범위요, 둘째는 "righteousness"의 범위이며, 그리고 셋째는 "a state of blessedness"라고 하였다. 특히 예수님의 이적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중에 하나인 구원-능력의 범위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명백하게 드러냈을 때 이 이적들은 그 목적이 있는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신 것을 표시하는 기호(signs)이다. 그 본문들 중에서 치유와 관련지어 언급한 매우 중요한 구절은 누가복음 11장 20절에서 보여주는 "But if I drive out demons by the finger of God, then the kingdom of God has come to you"라는 구절이며, 그리고 또 중요한 구절은 누가복음 7장 18절에서 22에 나타난다. 감옥에 갇힌 세례요한이 자기의 제자들을 주님께 보내어 주님께 "Are you the one who was to come, or should we expect someone else?"라고 질문하였고, 주님의 대답은 "Go back and report to John what you have seen and heard: The blind receive sight, the lame walk, those who have leprosy are cured, the deaf hear, the dead are raised, and the good news is preached to the poor."라고 하였다. 세례 요한에게 주었던 예수님의 대답은 예수님의 활동속에 나타난 이적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헤르만 리더보스(Herman Ridderbos)는 예수님의 답변은 "예수는 당신이 행하시는 질병의 이적적인 치유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고 있음을 명백히 제시하고 있다고 하였다. A. M. 헌터(A. M. Hunter)는 세례 요한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증거해 주는 바는 예수님의 능력의 행위들이 눈을 가지고 볼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한 표적으로 이해를 하였고, "이적들은 무엇에 대한 표적인가?"의 질문에 "이적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현존에 대한 표적들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각종 표적들(눅 7: 22)은 하나님의 나라의 "활동들"로 보았고, "이적들은 행동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로 보았다. 한편 예수님은 이 세상을 "the Kingdom of God"과 "the Kingdom of Satan"가 대립하는 장으로 보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로 이해를 했고, 마귀를 "이 세상의 통치자"로 보았다. 결국 이세상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육체적인 질병들 속에서 예수님은 마귀의 개입을 지적했고, 또한 예수님이 귀신들의 축출로 치유를 통해서 사탄의 결박을 깨트려버렸음을 보여주고 있고, 이는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의 표적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제시를 하였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치유는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는 마귀들을 쫓아내고 질병을 치료하는 예수님의 활동들 속에서 증명되고 있다.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은 수세를 그 시점으로 한다. 예수님의 수세는 여러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그 중에서 수세 후에 예수님께 성령이 임하신 장면은 매우 중요하다(마 3: 16; 막 1: 10; 눅 3: 21-22). 예수님이 성령을 받으신 것은 그의 삶을 성령에 이끌리도록 했다(눅 4: 1). 성령은 예수가 유혹(Temptations)을 받는데 나타나셨다(막 1: 12-13). 또한 성령의 능력안에서(in the Power of the Spirit) 예수는 갈릴리로 돌아갔다(눅 4: 14). 그리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포로된 자에게는 자유를, 눈 먼 자에게는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에게는 자유를, 그리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도록 했다(눅 4: 18). 실제로 예수님이 치유사역을 하실 때에는 그 장면을 목격한 자들이 예수님께 권세와 능력이 있음을 보고 증거하였다(눅 4: 36). 즉 예수님이라 할지라도 성령을 힘입어서 기적을 행하신 것이다. 누가(Luke)는 사도행전에서 이러한 모습을 잘 묘사했다. "how God anointed Jesus of Nazareth with the Holy Spirit and with power, who went about doing good and healing all who were oppressed by the devil, for God was with Him"(행 10: 38).
3.목자로서의 영성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이 지구상에 계시는 동안, 그의 사역은 그의 육신이 나타나는 영역만으로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이와 동일한 하나님의 능력을 다른 사람들에게 덧 입혀 줌으로써 예수의 동정심과 능력의 놀라운 영향력이 확장되게 되었다.
고 하였다. 이런 표적은 주님의 공생애가 마친 이후에도 부활하고, 승천한 후에 제자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할때 "주께서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막 16:20)"라고 기록했다.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누가는 승천 직전의 주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는다고 증거했다(행 1:8). 제자들은 오순절날에 주님이 주시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었다(행 2:1-4). 사도들을 중심으로한 예루살렘 교회는 기사와 표적이 많이 일어나면서 부흥되었다(행 2:43-47). 사도들의 이러한 사역에 대해 더필드와 반 클리브는 "우리들은 사도행전에 신유와 관련된 하나님의 뜻이 더욱 많이 계시되어 있음을 인식해야 하겠다"고 하였다. 제자들 중에 베드로(Peter)와 요한(John)은 성령의 충만함을 힘입어서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를 치유했다(행 3:1-10). 이러한 치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의 지체인 베드로를 통해서, 그 앉은뱅이를 향하여 손을 뻗치시고 고치신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와같이 주님이 제자들을 통해서 행하신 치유는 다른 제자들에게도 확산됐다. 빌립(Philip)의 사마리아(Samaria) 선교를 통해서 나타난 표적은 사도 이외의 제자들에게서 나타난 최초의 표적이었다(행 8:5-8). 아나니아(Ananias)는 대제사장의 공문을 가지고 다메섹(Damascus)를 향하던 사울(Saul)이 강한 빛에 의해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에 안수하여 사울의 눈을 다시 뜨게 헀다(행 9:1-18). 베드로는 욥바(Joppa)의 선행과 구제를 잘하던 다비다(Tabitha)가 죽자 그를 기도하여 살렸다(행 9:36-42). 그리고 바울(Paul)과 바나바(Barnabas)는 루스드라(Lystra)의 선교 중에 나면서 앉은뱅이를 걷게 하는 기적을 행했다(행 14:8-10). 이미 이방인들 중에 행하여진 표적과 기사는 첫 예루살렘 공의회에 보고되었다(행 15:12). 바울은 사역중에 희한한 능을 행하기도 하였다(행 19:11).
사도 바울(Paul)은 이와 같은 기사와 이적과 하나님의 치유를 성령의 은사와 겯들여서 설명을 한다.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행함을(고전 12:9-10)"주신다고 하였다. 즉 성령은 그 은사로 우리 모든 믿는 자에게 치유를 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치유에 대한 역사적 근거는 그 사역을 망설이는 모든 자들에게 새로운 힘을 가져다 준다. 교회의 역사는 치유에 대해서 무조건 긍정적인 흔적만을 남긴 것은 아니었다.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내려오는 치유에 대한 기록들은 치유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하나님의 계속적인 치유를 믿고 시행하는 자들에게는 새로운 힘을 제공해 준다. 그러므로 본 연구자는 교회사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치유에 대한 흔적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제3절 바울의 영성훈련과 치유
주님의 사역 초기에 제일 먼저 하신 일을 제자들의 부르심이다. 열 두제자를 부르셔서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쫒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악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다(마 10:1)."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과 함께 제자들에게 전도여행을 시키실 때 "가면서 전파하며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쫒아내되(마 10:7-8)"라고 당부하셨고, 실제로 제자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쳤다(눅 9:6)." 예수님이 병고치시는 사역을 제자들에게 확장시켜 놓으셨다. 오순절의 성령강림과 더불어 인간의 영성은 성령과 더 친밀한 관계에 놓이게 된다. 진리의 영이시며 보혜사이신 성령(요14:16)은 인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신다(요14:26). 성령은 또한 인간에게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심으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게도 하신다(엡1:17-18). 이런 의미에서 Lewis Sperry Chafer의 "그리스도인의 참된 영성이란 곧 성령충만한 상태를 의미한다."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성령의 역사가 예수님의 영성, 즉 새창조의 역사를 이끌어가는 주역인 것이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영성생활을 하나님의 뜻대로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을 통하여 새로운 창조, 즉 원 창조의 회복이 실현되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 새창조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에게 있어서 영성 추구의 출발점이었다. 이러므로 예수님의 영성을 "새 창조의 영성"(new creation spirituality)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새창조의 영성의 출발점은 구약의 메시야 사상에 뿌리를 둔 종말론적인 근거를 가진다. 또한 새창조의 영성적 노력이란 구원받은 성도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자기자신을 변화시켜 나가는 일련의 삶의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교회가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강력하게 증거되었다. 즉 부활로 증명된 예수님의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곳곳에서 성령의 역사와 더불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신약의 영성-새창조의 영성-에서 핵심적인 인물은 사도 바울이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고 회심하는 영적인 체험이 풍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체험이 한 인격을 실증적으로, 외적으로 인식하는 사건이라는 것을 명백히 함으로 기독교의 영성을 바르게 정립하였다. 바울의 영성이해는 헬라철학의 범주에 머물지 않고 '십자가의 신비주의'로 승화하여 비로소 기독교 영성의 역사적 기반을 수립하였다.
바울에게서 볼 수 있는 신비주의적인 영성은 "교제의 신비"(Communio Mystica)라는 말로 표현된다. 즉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그에 대한 복종 및 그와의 교제의 관계에서 사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예수님의 새 창조의 영성은 개인의 주관적인 하나님체험도 되지만 그것은 공동체적 체험이 되어야 함도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영성의 모델이신 예수님안에서 우리 모두가 지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간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고전12장, 엡1:21-22).
사도 바울은 이러한 새 창조의 영성회복이 곧 만물의 회복으로까지 보았다. 정학봉 교수는 이러한 새창조의 영성을, 타락한 인간이 본래의 위치와 신분-즉 만물을 관리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의 회복으로 보았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회복이 나아가 우주만물의 질서를 회복할 수 있는 길로 본 점은 "새 창조의 영성"의 범위를 폭 넓게 해석하였다고 하겠다.
제4절 요한의 영성신학과 치유
반면에 요한은 그가 기록한 복음서에서 공관복음보다 기적과 치유에 대해서 적게 기술하였다. 그러나 요한이 기적과 치유에 대해서 관심을 적게 가진 것은 아니다. 요한복음의 첫 기적사건은 2장 1절부터 11절에 이르는 가나 혼인 잔치의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은 매우 드라마적 요소를 가진 대표적인 기적사건이다. 그리고 요한복음의 최초의 치유는 4장 46절부터 54절의 왕의 신하를 고치심이고, 5장 2절부터 9절에는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된 병자를 고치심, 6장 2절은 불특정하나 다수의 병자들을 고치시는 장면과 9장 1절부터 12절에는 나면서 소경된 자를 고치고, 11장 1절부터 44절에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장면을 매우 길고 자세하게 기술을 하였다. 신약성서의 이러한 기록들은 예수님을 치유자로 묘사하는 결정적인 증거로 볼 수 있다. 즉 신약성서는 예수님의 모든 사역이 치유와 관련이 있으면서, 또 다른 독특한 신학적 견해를 가지고 기술하였다. 특히 치유자 예수를 구원자로 이해한 점이다. 오랄 로버츠는 그의 또 다른 책 God Still Heals Today-And Here's How He Heals You에서 하나님의 치유와 구원의 관련성을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Do you know that the word "save" as used here in the Greek, the original New Testament language, is the root word for both "save" and "heal"? In other word, salvation and healing both come from the same root word . . . Jesus came to save from sin and to heal the effects of sin in this world, which include sickness and disease in any form. Jesus is our complete Savior.
초대교회의 영성은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나타난다. 하나는 관조적이며 정적인 것이며 다른 하나는 동적이요 실천적인 영성이다. 공관복음서에서는 주로 회개의 세례(막1:4), 마음의 청결(마5:3)로서의 회개(Metanoia)와 청빈생활을 통해서 찾아볼 수 있고, 사도 요한에게서는 빛과 어두움가운데서 빛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에게로 향한 십자가 사랑안에서 그 영성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하여 요한의 영성은 하나님 신비주의(God-Mysticism) 혹은 성령 신비주의(Spirit-Mysticism)로 표현된다. 내적이면서도 정적인 영성의 개념이었다. 그러나 바울에게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의 연합과 또한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하기 위한 것으로서(골1:26) 표현되었고, 그 속에서 역사하는 성령은 동적이고 실천적인 삶으로 이끌었다. 즉 동적인 영성으로 표현되었다. 사실 이러한 것은 예수님의 종말론적인 개념하의 새창조의 영성을 이루는 두 가지 영성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종말론적 개념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내면의 영성, 정적인 영성을 갖게 하였고, 새로운 질서를 향한 새창조적 영성은 그들로 하여금 성령의 역동적인 삶을 살게 하였던 것이다.
초대교회 기독교는 당시의 헬라철학의 흐름인 플라톤주의와 영지주의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신플라톤주의의 핵심은 인간이 금욕적인 삶을 통해서, 세상의 삶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정신적인 격리의 삶을 산다면 영원의 세계와 통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보다는 자신의 금욕적인 삶을 통해 영원을 소유한다는 점에서 비기독교적인 것이었다.
이와함께 영지주의와의 투쟁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힘겨운 투쟁이었다. 그들의 공통적인 주장은 영지(靈知 : Gnosis)인데 이것은 영성이고 영적인 것을 가지고 영을 가르치며 구원을 가르치는 것이다. 영성이란 면에서 볼 때 그것은 이미 기독교와 대립되는 것이었으며 기독교는 이 영지주의를 인하여 커다란 시련을 겪게 되었다. 문제가 된 것은 이원론(二元論)이다. 이것은 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으로 모든 것에는 두 가지 원리가 있는데, 빛과 어두움, 선과 악등이 주장되었다. 여기에서 도출된 결과는 물질세계 즉 우리의 지상생활에 관련된 것은 모두 악한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악의 물질세계를 극복해야 해방되고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요한을 중심으로 볼 때 초대교회의 영성은 금욕적 방법을 강조하는 이단사상에서 기독교 영성을 지키려는 노력의 기간이었고, 이런 연고로 기독교 신학의 기초를 닦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마음을 청결과 단순성을 중요시하였고, 동적인 영성보다는 관조적 정적인 영성운동의 흐름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제6장 영성목회에서의 리더쉽
현대인들의 삶이 무의미하고, 방황하는 근본원인은 그들의 영적인 갈등이 해결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질문명, 과학, 정보, 지식의 발달도 그들의 영적 갈증을 채워줄 수는 없다. 그 근본원인은 "하나님의 상실"이다. 그러므로 현대목회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문제중 하나는 그들의 영적, 정신적 갈등을 해결해줄 수 있는 "하나님 상"(Imago Dei)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현대목회에서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영성적 목회임을 알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영적인 갈증을 해갈할 수 있다는 것은 곧 하나님과의 만남의 접촉점이 영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곧 영성(Spirituality)에 대한 이해로의 출발이다.
영성은 자기초월의 능력을 지닌 인간이 하나님, 인간, 자연과의 제반관계속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영적 심성으로서 인간의 삶의 전체 지향성과 관계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단지 선한 인간성의 함양, 즉 자아실현이 아니라 하나님을 체험하는 초월성인 것이다.
영성은 이웃과 피조물(자연)과의 관계속에 이해되는 수평적 영성과 하나님과의 관계의 지향성을 가진 수직적 영성으로 조화이다. 즉 우리 속에 이루어지는 어떤 성품이라기보다는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과 교제하는 삶의 과정 전반이요,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를 고쳐 나아가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이뤄나가는 과정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들속에 들어가 삶의 과정에 참여하는 관계성인 것이다.
요약하면, 영성이란 인간속에 하나님을 섬기는 생명의 특질로서, 참 영성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가는 삶이다. 구체적이면서 공동체속에서 실천되어지는 삶 전반을 가리켜 말한다. 즉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성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해가는 인간의 정신일체를 포괄한 삶 전체를 가리킨다고 하겠다.
성서적으로 나타나는 영성에 대한 개념으로 구약에서는 영, 육의 합일체로서 인간이 하나님과 갖는 교제(communion), 즉 관계성속에 이해되고 있으며,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하나님과의 관계체험속에서 일그러진 하나님의 형상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생명의 본질로서 오신 "새창조의 영성"(new creation spirituality)이라 말할 수 있다. 성서속에 나타난 영성 역시 하나님과의 관계체험속에 이뤄지는 삶의 전반적인 변화의 과정임을 제시해 주고 있다.
초대교회의 영성은 관조적이면서도 동적인 영성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의 이원론적 사상의 배경은 기독교영성의 흐름에 영향을 주어, 결국 수도원운동으로 대표되는 내세지향적이고 상상적, 정적인 영성으로 발전하게 된다. 수도원 운동은 전통적인 영성신학의 자료와 영성생활의 진수를 영성가들과 수도공동체를 통해 기독교에 제공하였다고 볼 수 있다. 중세는 영성이 다양화되고 영성이론이 조직적인 단계로 발전하면서 교리이해와 신학적 기초를 닦아놓는 계기가 되었다. 수도원운동에 이어 새로운 영적 각성 운동이 종교개혁을 통하여 이룩되었다. 종교 개혁기의 영성은 말씀중심의 영성으로 대표되며 기존의 영성적 흐름을 새롭게 바뀌어 놓았다.
그러나 근대이후 중세의 영적인 관점이 점차로 정적이고 상상적인 것에서 동적이고 실천적인 것으로, 초자연적인 성향에서 자연적인 것에로, 신중심에서 인간중심으로 교체되면서 교회와 세속, 종교와 과학, 정신적 가치와 물질적 가치간에 팽팽한 긴장과 대립의 관계가 조성되었으며 이것들 간의 조화와 재해석의 문제에 대한 각성으로 영성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다.
즉 현대의 다양성속에서 인간의 영성에 대한 신학적인 이해로부터 그 훈련에 이르기까지 근본적인 요구와 갱신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러한 다양화된 사회속에서 목회적 영성의 필요성은 더 절실하게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목회는 하나님의 삶을 실현하기 위한 봉사라고 볼 수 있다. 영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하나님의 본질을 삶의 현장에 실현시키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목회와 영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속에서 이해되어지는 "봉사와 사귐"으로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다. 여기에 영성과 목회의 접촉점이 있다. 왜냐하면 사람의 영이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삶을 이 세상에서 실현하는 교역(목회)에 참여하려면 반드시 영성훈련을 통하여 영성의 깊이에 서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목회적 관점에서 본 영성의 특수성으로 영성이란 "신비적 합일"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또한 자아실현성을 가진다. 그러나 합일로써 자의식이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인격화(人格化)된다는 것이다. 또다른 하나의 특성으로 우주자연 회복으로의 영성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주적 그리스도가 되시며 만물을 회복시키시는 분이시다. 이러한 특수성은 하나님, 이웃, 자연과의 관계성을 회복시킬 수 있는 접촉점을 제공한다.
목회적 영성의 필요성은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목회란 하나님, 인간, 자연과의 관계성숙을 이끄는 사역이다. 그렇다면 중재자로서의 영성개발은 필수적이자 절대적이다. 이에 대한 미래적 목회의 영성개발을 샤르댕(Teilhard de Chardin)의 우주와 세계적 영성으로의 이해를 살펴보았다. 샤르댕은 그리스도는 단지 인간의 구원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구속과 영광을 취하기 위한 '전체성'으로서의 우주적 그리스도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미래적 목회는 대신적(對神的), 대인적(對人的), 대물적(對物的) 관계의 회복으로의 목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이해에 기초하여 목회적 영성개발의 구조적 모델로 포스터(R. Foster)의 내면적, 외면적, 공동체적 훈련으로 구분되는 3단계 영성훈련법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포스터식 구조모델은 수평적인 관계성을 강조하고 있음을 볼 때에 '영적인 지향성'(spiritual direction)으로서 수직적 모델도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몰트만의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론적 신학구조로 대신적, 대인적, 대물적 영성의 차원에서의 영성개발의 모델을 심화시켜 로렌스 크랩(Rawrence J. Crabb)의 "공동체를 통한 성품개발 모델"을 통한 영성훈련의 기초를 살펴보았다. 즉 영성개발모델로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의 해결과 공동체훈련을 통한 대인적, 대신적, 대물적 관계회복의 방안을 제시하였다. 특히 포스터식 '경축훈련'은 예수님의 '종말론적 유형론'(eschatological typology)에 근거한 새창조적 영성의 실천적 측면에서 더욱 개발되어져야 한다고 본다.
한국교회가 물량화, 외형화, 집단화되면서 보다 내적이고 영적인 관계회복측면에서 영적인 개혁의 필요성으로 영성은 현대 목회의 중요한 과제로 등장하였다. 이에 대한 해결과제로서 전체교회적 방향성을 살펴보며 미래적 목회를 위한 영성개발의 모델로서 인간의 전인성에 중점을 둔 목회상담과 치유목회의 관점에서 전인목회(全人牧會)모델을, 또한 영성과 기독교교육의 차원에서 웨스트호프(John H. Westerhoff)의 신앙공동체-문화화모형(FE모형)을 제시하여 보았다.
즉 전인모델이란 인간의 영에 전인성(全人性)을 두고 인간의 영과 성령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인간은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존캅(John B. Cobb)의 원리를 기초로 한 하나님과의 관계지향성 모델이다. 이것의 실천적 방안으로 목회상담과 치유목회의 양면을 살펴보았다. 또한 영성교육과 관련하여 기독교교육의 갱신차원의 모델로 전인적인 관계에 기초한 FE모형을 살펴보았다. FE모형은 인간간의 수평적관계의 증진을 통하여 수직적 관계를 도모하는 전인교역의 기초교육뿐만아니라 신앙공동체교육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이상에서 고찰해 본 바에 의하여 현대적 목회에서 지향하여야 할 기독교 영성과 영성개발에 대하여 몇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다고 본다.
첫째, 인간의 영성이 지니는 특수성은 현대목회가 영성적 목회가 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즉 하나님과의 신비적 합일, 자아실현성, 영성의 우주성은 하나님의 형상회복으로서의 인간의 수직적 관계회복의 요구와 공동체를 통한 대인적, 대물적 관계회복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현대목회는 필연적으로 인간의 영혼의 요구인 하나님과 인간과 우주자연과의 관계회복을 지향하는 '영성적 목회' (Spiritual Ministry)가 되어야 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외향적, 물량적, 말씀중심적, 권위형목회에서 인간의 전인성 차원의 관계성과 내적, 영적인 목회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둘째, 영성은 훈련에 의해 증진될 수 있으며 지속적인 개발과 양육과정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현대교회에서 영성훈련에 관한 방법이 다각적으로 제시되고 훈련되고 있다. 그러나 개신교는 신학적 정립이나 구체적인 영성훈련방법에 관한 연구가 미비한 실정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영성목회'를 위한 신학적 기초로서 영성신학의 정립과 실천적인 영성훈련법이 계속적으로 연구되어져야 한다고 본다. 그 방안의 구조적 모델의 하나로 포스터의 영성훈련방법 3단계를 적용할 수 있다고 본다.
셋째, 영성훈련의 방법으로 대인적, 대신적, 대물적 측면을 살펴보았지만 목회의 장에서 특히 공동체 훈련에 힘써야 할 것이다. 한국인의 심성상 개인적, 내면적 성향에 비교하여 볼 때, 공동체를 통한 영성의 개발은 교회공동체의식의 회복과 관계성을 증진시킬 수 있다. 존 메쿼리는 공동체로서의 영성개발의 현장으로서 교회에 의미를 부여한다. "교회는 성령의 건축하는 사역이 가장 강력하게 발현되는 성장의 현장(growing Point)이다. 그러므로 교회안에서 참된 영성이 모든 것을 헤치고 나와서 참으로 영적인 인간성의 새로운 성품들을 내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성령의 공동체로서 완전한 인간성의 발달을 위한 환경이어야 한다" 공동체 영성개발을 위하여 신앙공동체-문화화모형(FE모형)의 신학적 원리를 기초로 공동체를 통한 성장모형을 실제방법을 적용할 수 있다고 본다.
넷째, 현대적 영성목회는 인간의 영에 중심을 둔 전인성(全人性)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별히 치유목회와 목회상담측면에서 살펴본 전인교역모델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인간의 영성을 중심으로한 영성목회는 앞으로 더욱 영성신학과 심리학등과의 폭넓은 대화를 통하여 그 기반을 확장시켜 나가도록 하여야 하겠다. '전인성'에 중심을 둔 인간의 '영'에 대한 이해로서의 영성목회는 신적, 사회적, 우주적인 새로운 관계성을 모색하는 인간관과 세계관에 큰 영향을 줄 것이라고 본다.
영성운동훈련을 지도자로서 목회자의 영성개발이 가장 급선무일 것이다. 교역자는 기본적으로 영성에 있어서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교역의 전문화(professionalism)은 기술세계로부터 기인한 상호작용의 모델로 통제와 예측에 높은 가치를 두는 교역이다. 그러나 전문화모델은 초월성을 배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전문화 교역의 모델위에 영성적 교역모델이 상호보완되어야 한다. 전문화 교역은 현재의 다양성의 요구에 부응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카리스마적인 초월성을 갖춘 영성교역에 있어서는 더욱 훈련되어지고 개발되어져야 한다.
앞서서 우리는 목회와 영성의 상호필연성을 살펴보았다. 교역자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서있는 중보자요, 인간을 들으며 동시에 하나님을 들어야 하는 자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하나님앞에 서는 훈련을 쌓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을 청종하는 것이 하나의 삶의 스타일이 되기까지 고난당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도움을 전달하는 은혜의 통로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목회자가 교역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전달의 통로로서 사역을 충실히 감당하기 위해서 신학적 기초가 분명히 서 있어야 할 것이다. 그의 영혼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인도해야 할 목회자라면 분명 하나님의 말씀과 성서적 삶의 적용을 충분히 전달해야할 신학적인 사고를 소유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목회자는 영성신학의 정립을 필요로 한다고 하겠다.
영성과 신학이란 개념의 연합이 영성신학이다. 그러므로 영성신학의 올바른 정의를 내리려면 두 가지 개념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져야 한다. 영성의 개념을 앞서서 홈즈의 표현대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성차원에서 살펴보았다. 특히 목회와의 연계성에서 영성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성속에서 하나님의 교역을 실현하는 중간 매개체로서 또한 하나님의 삶을 실현하는 과정에서의 목회를 위한 힘과 깊이를 주는 것이 영성임을 알았다.
영성이란 개념은 '영'(Spirit)이나 '정신'(pneuma)이란 말마디로서 신령한 능력, 즉 초자연적인 능력을 지칭하는 성서적인 용어와는 일치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진정한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고, 그 분을 통하여 성삼위에서 이르는 영성일 뿐이다. 이는 영성생활의 생명적인 원리인 창조된 은총이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올 뿐아니라, 영성생활에 정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다 자신들이 처한 종교적 위치에 관계없이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성신학은 신적인 계시진리와 개개인의 종교체험에서 시작하여, 초자연적 생활의 본질을 밝히고, 그 성장과 발전을 위한 지침을 규정하며, 영성생활의 시초에서 완성에 이르기까지의 영혼들의 진보과정을 설명하는 신학의 한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영성신학이 다른 신학과 다른 분야 특히 조직신학이나 교의학과 차이점이 있다면 체험을 중요시한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영성신학은 추상적인 이론적 신학이 아니라 "체험의 신학"( a theology of experience)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영성신학은 그리스도인의 영성적 삶에 관계되기 때문에 기독교 윤리와 관계되며, 목회자의 영성과 교인들의 영적 성장과 훈련에 관계되기에 실천신학, 특히 목회학과 기독교 교육에도 관계되고, 기독교 신앙(영성)의 본질의 규명에 관계되기 때문에 조직신학과 불가분리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영성신학은 체험에 바탕을 둔 하나의 새로운 "종합신학"(comprehensive thology)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에티엔느 질송(Etiemnne Gilson)은 이러한 전통적 신학개념을 다음과 같이 영성생활 신학에 응용하였다. 원래 영성생활은 하나님의 생명이 영혼과 상통하는 통교이기 때문에, 여기에 관한 언급은 그 무엇이나 하나님에 관한 학문, 즉 신학으로 연결된다. ‥‥ 영성신학이 사변적인 학문인 만큼 그것은 결국 신적 생명의 본질과, 이 생명이 영혼과 상통하는 일반 범칙들을 다루게 되고 이러한 이론과 지식들과 연관된다. 또 이것은 성스러운 학문이고, 특히 신학의 한 특수부분인 만큼 방법론에 있어서 신학 자체의 방법이외의 다른 방법을 쓰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교회가 보존하고 해석하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출발하여 교리적으로 전개된다. ‥‥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를 둠으로써 영성생활의 신학 자체도 권위에 의거하여 전개된다. ‥‥ 영성신학은 모든 영성생활이 따라야 하는 법칙들을 교리적으로 언급한다. 이런 법칙들은 그 기원과 목적에서 추론되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영성과 신학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두 길이다. 얼핏보면 그들은 서로 다르지만, 결국 그들은 일치한다. 영성은 기도, 예배, 훈련에 의해 향상된다. 이러한 수단들에 의해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초월하였으며, 그들의 인간 존재는 고양되었고, 그들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법을 알았다. 신학은 반면에 지적탐구에 의해 향상된다. 그것은 지적 성실성을 신뢰하는데 대한 곤란은 인정한다. 그렇지만 신학의 길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이것 역시 그들을 초월하도록 하는 훈련임을 발견한다. 역동적인 신학은 그것이 지적인 사랑의 정열에 의해 고무되어지기 때문에 과학적 훈련이 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에 관한(about) 지식으로 만족할 수 없으며, 그것은 적극적으로 하나님에 관하여 잡담하는 것을 싫어한다. 하나님 지식은 우리 친구들에 관한 지식처럼, 결국 교제에 근거를 둔 지식이어야 한다. 하나님 지식은 하나님 사랑과 병합된다는 것이다.
결국 영성신학은 지성과 영성이 조화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심화시켜 삶의 현장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교역을 실천하는 영성분야라 하겠다. 목회의 현장에서 필연적으로 만나는 모든 영적인 문제를 효과적으로 다루는 지식을 습득함이 목회자의 신학적 기초로서의 자질향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개신 교내에서는 영성에 대한 관심이 시작되지 얼마되지 않아 신학적 이론은 있다고 하지만 미비한 형편이고, 그 또한 실천적 영성분야보다는 사색적, 지성적 연구에 멈추는 안타까움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영성신학은 바로 생활과 관련되는 세상 한복판에서 하나님을 만나면서, 하나님 안에서 이웃과 만나면서 하나님의 뜻을 식별하고, 또 이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고, 그래서 투신해 들어가는 생활하는 신앙과 직결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박홍교수의 말은 흥미롭다.
그렇다면 목회자가 교역을 위한 영성으로서의 신학을 어떻게 이해하고 정립할 것인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영성신학은 사변적인 동시에 실천적인 것으로 그것이 애덕의 완성과 관련되는 그리스도교적 생활을 다루기에 매우 실천적인 학문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영성신학의 연구 목적이 학자를 배출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그리스도인을 양성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학적으로 엄밀하고 체계적으로 연구되어져야 한다.
프랑스의 영성신학자 루이 부이에(Louis Bouyer)는 영성생활이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초월하여 감각적인 세계가 아닌 또 다른 실제에 접근하며, 영적인 실재를 우리 삶속에서 자각할 때 이루어진다고 말하였다. 영성생활의 이러한 특성 때문에 영성은 현대 사회에서 종종 다음과 같이 오해되기도 한다.
첫째, 심리주의로의 오해이다. 즉 영성을 우리 의식의 어떤 상태라고 생각하여, 우리 의식을 인위적으로 고양시키려고 하거나 어떤 변이의식 상태로 빠뜨리려고 하는 것이다. 불건전한 집단에서 그 신도들을 열광주의적인 분위기 속에 빠뜨려 놓고서는 영성집회라고 주장하는 태도들이다. 오먼(J. Aumann)도 이점을 지적하여 심리학적인 연구가 과학적일지는 모르지만, 심리학자는 흔히 연구된 현상의 원인들을 찾아내지 못하고 오직 수립된 서술과 통계에 만족한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목회현장에서 영성을 지도해야할 목회자로서는 영성적 지식을 습득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역사의 다양성속에서 이해하되 그 기준을 성서와 성령의 감도에 철저하게 의지해야 한다.
둘째로, 혼합주의로의 오해이다. 여기서는 모든 궁극적인 체험은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기독교영성과 타종교의 영성을 혼동하고 있다. 기독교영성의 독특성을 무시하는 것이다. 이 사람들의 맹점은 모든 종교체험이란 그 종교의 정신(idee)과 대단히 밀접한 관계에 있으며, 모든 종교에서의 영성생활은 그 종교에서 생각하는 궁극자에 대한 체험이고, 그 궁극자의 실현과정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혼합주의적인 경향은 특히 정상적이고 부수적인 신비체험 현상과 비상하고 카리스마적인 현상들을 구별하지 못하게 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셋째, 전문주의적인 태도가 있다. 이것은 두 번째 태도와는 반대로 영성을 지나치게 전문화시키며, 세분화시켜 생각한다. 그래서 이들은 이들이 속한 단체의 영성만을 배타적으로 중요시하며 폐쇄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들이 속한 수도단체나 운동단체의 영성만이 중요한 것이며, 다른 것은 무시하는 태도이다. 그러나 기독교 영성의 본질은 하나이며, 그것은 변경시킬 수 없는 사실이다.
넷째, 영성은 영혼의 문제만을 다룬다는 편협적인 사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총체적 삶을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면을 도외시한 채 영혼의 영역에 가두는 영성신학은 수정되어야 한다. 그러한 영성신학은 인간 삶의 전 모습을 단지 영혼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영적 만남으로 축소시키게 된다. 영성신학은 영혼과 육체를 함께 포함하는 전인적인 영성을 다루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목회자는 영성에 대한 철저한 탐구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실제적인 삶의 적용의 요령을 습득하는 것이 중요하다. 만일 이것이 학문적인 연구로만 끝난다고 하면, 그것은 개인의 영성지도에 있어서 개인의 필요에는 전혀 맞지 않거나 영혼이 성령의 인도대로 따르는데 장애거리가 될 수 있다.
제7장. 교회에서의 치유 목회의 중요성
하나님은 인간을 전인적 존재로 창조하셨다. 성경은 인간에 대한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이론을 전개하지 않는다. 그러나 철학이나, 의학적, 심리학적인 관점보다 더 높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영적 존재로서,하나님과 관계성이 있는 전인적인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말하고 있다.
성경에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전인적으로 응답하는 존재라고 말하며, 인간은 하나님에게 은혜를 받거나 징벌의 대가로 고통을 받을 때도 몸과 영혼이 함께 느끼는 전인을 전제로한 영적존재로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7)기독교 인간관은 우주 안에서 특별한 위치를 갖게 끔 창조한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이해가 된다. 칼빈(calvin)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인간이해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때문이며 처음 하나님의 형상을 지성의 빛과 마음의 방정(芳情)과 모든 부분의 정상적 상태를 통해 나타난다고 하였다. 즉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때 그것은 영적인 형상이라는 것이다. 헨리 다이슨은 이를 더 구체화하여 영적이고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형상이라고 규정하였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함은 '하나님과의 동질적' 의미로서가 아니라 위임 통치자의 권한을 부여받은 것을 말하며, 다른 피조물과의 구별된 것으로 우리의 본래적인 의(Righteousness)와 지식(Knovlege) 과 거룩함(Holiness)(골3:10, 엡4:24)과 일반적인 본선에 영성을 포함시키는 것이다. 19) 그러므로 영육간에 전체적인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난다는 점에서 인간은 통합성의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두가지 신학적 특성을 가진다. 첫째, 인간은 하나님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를 통하여 나타내시지만, 인간이 지닌 하나님의 형상을 통해 드러내시기도 한다. 이것은 인간 그 자체가 하나님을 드러내 보인다는 뜻이며, 인간속에서, 인간을 통하여 하나님이 보여 진다는 말이다. 둘째, 인간은 하나님을 대표한다. 안토니 후그마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대 인간이 피조물 세계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권위를 나타내도록 창조되었다고 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대표자로서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증진시키고 그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입장을 지지하고 순종하며 변호하고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일들에 대하여 힘써야 한다.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불순종이 하나님의 형상에 치명적 상처를 입혔으며, 피조물을 다스리는 주권도 상실해 버렸다. 자유의지의 오용으로 불행의 쇠사슬이 생기게 되었고 이것이 병들고 비참한 인간을 만들게 될 것이다.
타락의 결과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어 하나님 앞에 설 위치를 상실하였고 자신에 대해서는 수치감, 타락감, 불결감을 갖게 되어 스스로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 헨리 디아슨은 이것을 도덕적 파괴라고 말하고 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와 타락이 모든 인간에게 전가되어 인류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되었고, 죄책감과 평안함이 결여된 병리적 상태에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채 살아가게 된 것이다.
제1절 치유목회의 의미와 중요성
인간의 타락으로 스스로 행위 언약에 의한 구원은 불가능하게 되자 하나님으 두 번재 언약인 은혜의 언약을 맺으셨다.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약속하시며, 또한 죄인은 신앙적으로 이것을 받아들이고 순종의 생활을 하도록 약속한 것이다.
믿음을 통해 회개하고 거듭나서 인간성의 원형을 회복하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성을 회복하는 것이 치유목회의 초점이 되며, 또한 죄로 인하여 상처난 하나님의 형상을 그리스도로 인하여 회복시키는 의미에서 곧 치유가 되게 하는 것이다. 23)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후 모든 인간은 영혼과 육체가 구원을 기다리는(받아야 하는)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요컨대 성경은 인간을 전인으로 말하거 있으며 타락한 인간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성르 회복할 수 있으며 전인적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치유목회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오늘날 건강에 대한 관심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의 최대의 관심사가 되었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각종 프로그램들은 사람들의 지대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건강을 위한 관심에 비례해서 알 수 없는 질병들은 사람들의 건강에 대한 관심을 무력화 시키고 있다. 동양인들은 "生老病死"를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 "낳아(生) 늙고(老) 병들어(病) 죽게(死) 된다"는 것인데, 이는 곧 인간이 이 땅에 태어나서 살다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결국 병으로 인해서 찾아 온다고 보았다.
제2절 치유의 방법
이러한 질병에 대한 용어들이 성경에서 살펴보면, 구약에서는 질병을 "disease, diseased, diseases"이란 용어로 표현했는데 "disease"는 히브리어 " (ch l y)"이고, "diseased"는 히브리어 " (ch l )"와 " (ch l h)"로부터 번역되고, "diseases"는 히브리어 " (madveh)"와 " (tach l w)"로부터 번역됐다. "ill"이란 용어는 히브리어 " (ra )"로부터 번역됐고, " (r a )"에서 유래했고, 그 밖에 " (y ra )"와 " (tsach n h)"도 함께 "ill"의 용어로 번역했다. 그리고 구약에서 사용된 질병의 용어 "sick, sickness"의 경우에, "sick"는 " (ch l h)"로부터 번역된 "diseased"와 그 의미가 일치되고 있으며, 그리고 "sickness"의 의미로 사용된 용어도 "disease"로 번역된 " (ch l y)"와 일치한다.
한편 신약에서 질병의 용어로 사용된 "disease, diseased, diseases"중에서 "disease"로 번역된 헬라어는 " (malakia)"이고, "diseased"로 번역된 헬라어는 " (asth n )"이며, "diseases"로 번역된 헬라어는 " (n s s)"이다. "ill"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로마서 13장 10절에 한번 사용된 " (kak s)"뿐이다. 그리고 "sick, sickness"로 사용된 용어에서 "sick"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이미 "diseased"로 번역된 " (asth n )"로써 17회 사용됐고, 이 단어는 " (asth n s)"에서 유래됐다. 그 밖에 " (paralutik s)"도 11회 사용됐다. 그리고 "sickness"로 번역된 단어도 "diseases"로 번역된 " (n s s)"와 일치된다.
결론적으로 성경에 나타난 질병에 대한 어의를 통한 분석은 심리학자들이나 상담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심리적 의미, 육체적 의미, 환경적 의미로 분류해서 이해하는 것을 거부한다. 이 세 "질병"의 의미로 사용된 용어 "disease, illness, sickness"는 상호교환적(Interchangeable)으로 사용되었다.
클라인 벨(Howard Clinebell)은 요10:10의 "풍성한 삶"이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그의 백성들에게 주고자 하는 근본적인 선물임을 강조하면서 이러한 풍성한 삶을 살수 있게 도우려면 상호 연계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존재의 여섯가지 차원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고 한다. 이 여섯 개의 차원들은 첫째, 인간의 정신정서, 둘째 육체의 차원, 셋째 타인과의 친밀관계, 넷째 자연환경과의 건전한 관계, 다섯째 단체와 사회구조와의 관계, 여섯째 우리 인생의 영적인 차원들이다. 그는 윌리암스(Daniel Day Williams)의 '연쇄의 원리'(the principle of linkage)에 따라 인간을 전인적인 존재로 이해한다. 이 원리에 따르면 인간은 전인적 존재로 피조되었기에 인간의 어느 한 부분의 경험은 다른 모든 부분의 경험에 연쇄적인 반응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이다. 육체나 정신의 어떤 움직임은 그 부분 자체의 움직임이지만 결국에 가서 인간 존재의 영적인 중심인 전인(the whole person)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연쇄의 원리의 중요한 의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문제는 한 부분의 문제라 할지라도 전인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영적인 성장도 여섯차원의 어느 하나에서 성장이 일어나면 이것이 곧바로 다른 차원들을 격려하고 지지하여 성장을 촉진시킨다. 현대목회현장의 다양성을 이해하고 문제해결을 위한 방안뿐만 아니라 영적 성장의 모델로서 전인목회모델은 그 실효성이 충분하다고 하겠다.
(1) 전인성의 근본원칙 : 상호작용
인간은 그 존재와 성장에 6개의 차원을 가지고 있어서, 이 차원들은 상호작용을 통하여 전인적인 성장을 촉진시키며 또는 수정해 나간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영, 육의 이분법적 개념으로 영성을 이해하려고 했던 것을 지양해야 한다. 정신과 육체는 상호작용을 통해 성장을 촉진시킨다는 것이다. 에반스(Frederick Evans)는 정신과 육체가 상호작용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로 플라스보 효과(placebo effect)를 설명한다.
인간의 전인성을 효과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전인성의 3가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 전인성(Holism), 개방적 공동작용(Open Synergy), 동질성(Isomorphism)이 그것이다. 전인성(Holism)은 인간의 6가지는 인간의 존재와 성장차원에 있어서 분류일 뿐 실재 인간은 이 모든 것을 합친 것 이상의 새로운 정체성(Identity)을 가진다. 또한 전체를 이루는 6차원은 함께 작용한다. 이를 공동작용(synergy)라 한다. 동질성이란 인간구조의 여러 지체들이 공유하는 목적과 가치의 공통분모(commonality)를 말한다. 이러한 원리하에 각 차원들의 성장이나 문제는 전인성장이나 문제를 형성하며, 궁극적인 문제를 제기하며 진정한 인간성숙의 길을 모색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상호작용일 뿐이지 동등한 위치를 점할 수는 없다. 전인성(全人性)의 중심은 인간의 영(靈)에 두어야 한다. 존캅(John B. Cobb)은 기독교적 존재의 특성을 "영에 중심을 둔 영적인 실존" 이해에 있다고 보았다. '영'에 중심을 둔 인간이해는 예수와 그의 공동체의 부활과 성령의 경험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인간은 그들의 전체 정신 상태안에서 작동하는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안에서 새로운 존재적 구조를 경험하게 되었다. 성령안에서 인간은 신과 서로 내재적이면서도 서로를 향하여 완전히 책임적이면서 상호 동일성을 지니게 되었다. 성령은 인간의 인격성에 새 힘을 주시는 분으로서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영적인 인간은 자기 초월성(Selftranscendence)을 지니게 되며,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고 보았다. 결국 존캅이 말하는 영의 전인성은 인간의 육체와 정신의 상호작용 차원을 초월하여, 인간의 영과 성령과의 상호작용에 초점을 둔 점이다. 그의 전인성개념은 성령에 의한 인간생활의 조화를 이루는 삶으로 이어진다고 본 것이다.
와이즈의 Pastoral Care에서도 그 중심적 대상은 영이다. 인간의 영은 자신, 타인,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의 - 의미, 가치, 의무 등의 말로써 표현되는- 인간 전존재의 '통일적 종합체'(Syntesis of unity of a man's total being)로써, 최상의 차원에 놓여져야 한다 하였다.
전인성의 개념은 인간의 전체적 특성을 상호작용, 즉 관계적 측면에서 고려하여 인간을 이해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며, 그 중심적 개념은 영이라 점은 목회의 장으로서의 영성을 적용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여 준다고 하겠다.
(2) 전인적 인간이해에 기초한 전인교역(全人敎役)
전인교역은 인간의 전인성에 기초하여 인간의 근본문제가 무엇이며, 이 문제를 어떻게 전인적으로 도와 나갈 것인가를 다룬다. 특별히 전인교역은 목회자가 문제에 부닥친 인간을 어떻게 하나님과 인간과 피조물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주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이 교역모델은 인간 존재의 근본을 관계성에 두고 창조주와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 그리고 피조물과의 관계인 3단계의 차원에서 근거하여, 관계성의 증진과 파괴에 따라 성장(그리고 치유)과 결함이 어떻게 발생하고 해결될 수 있는가 하는 점에 기초하고 있다.
전인교역에서 목회자는 교회에서 행하여지는 예배와 설교, 목회, 상담등 모든 목표는 결국, 인간의 이와 같은 영을 강화시켜주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의 새로운 관계 구조속에 놓이는 인간의 영은 자기 자신의 욕망과 정서나 의지들을 포괄하면서도 이 모든 것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새로운 지향성(New direction)을 향하여 나아가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영이 중심이 된 인간은 자아로 하여금, 여러 가지 인간생활의 정신적 요소들과 조화를 이루는 전인성(Wholeness)에 의하여 결단을 내리게 된다. 영에 중심을 둔 전인성(Wholeness)을 완성하는 것은, 단순히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인간의 개성화나 인간 잠재능력의 개발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보다 기독교 신학의 차원에서 "하나님의 형상"(창 1:27)대로 지음받았다는 복음의 말씀을 이루어 가는 것이라고 와이즈는 말한다.
결국, 전인적인 인간이해에 기초한 전인목회의 응용성과 방향성을 몇가지 제시해 보자.
① 전인적인 관점에서 영적 차원의 통합적인 방향성의 인도에 따라 교역해야 하며, 부분교역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② 모든 문제들은 상호작용을 통해 전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며, 특히,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기 때문에 모든 문제속에 수직적인 삶의 차원을 더하게 할 때에만 진실한 교역이 될 수 있다.
③ 이러한 교역은 공동체의 교역이 될 때에만 그 실효를 거둘 수 있는 것이다. 즉 교회공동체가 교역의 책임을 지고 각 신도들이 받은 분량과 은사대로 봉사할 수 있도록 하는 도움의 구조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때 교역자는 교회의 도움의 구조를 지도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담당할 것이요,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하는 일인목회의 구조를 가져서는 전인목회는 불가능하다.
④ 교역자의 최종적인 관심은 인간 자체를 비인간화시키는 모든 조건들과 환경들과 장애요소들이다. 즉 인간의 풍성한 삶에 장애를 가져오는 것은 어떠한 것이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대항하여 이겨야 하고, 전인적인 인간회복에 교역의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전인교역은 인간의 '인격'(Personhood)의 차원에서는, 각 개개인의 고유성(Privacy)과 공동체성(Communication)과 자각성(Awareness)과 자율성(Spontaneity)을 성취시켜 줄 수가 있다. 또한 표에서 제시하는 전인교역의 모델에서 보듯이 인간의 전인성에 바탕을 둔 전인교역은 영적 성장의 위한 목회상담과 치유목회가 종합적으로 응용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3) 전인교역으로서의 치유목회
M. T. 켈시는 치유목회는 "예수님의 성육신의 논리적 결과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구약의 "야훼 라파"(치유의 여호와)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청종할 때는 건강(살롬)을 허락하시고 불순종 할 때에는 재앙과 질병을 내리겠다는 약속을 담고 있다(출15:26). 신약의 예수님의 기본사역중 치유사역은 복음서중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치유의 개념이 영적 구원에만 한정된 의미로 사용되어진 것이 아니라 전인적(全人的)인 치유요, 전환경적(全環境的)인 치유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현대에 와서 치유의 문제는 목회에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클라인벨은, 교회사에 나타난 목회의 기능은 다음 네가지로 요약하였는데, 첫째 치유(Healing), 둘째 지탱(Sustaining), 셋째 인도(Guiding), 넷째 화해(Reconciling)의 기능이다. 과거에는 치유의 기능이 인도의 기능에 비하여 부차적으로 취급되었으나 현대목회에서는 치유의 기능과 함께 네가지 목회기능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보았다. 인도목회기능이 서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전인목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치유는 전인교역모델의 네바퀴중 하나이다.
클리프트는 인간의 정신의 재통합을 이루도록 하는 '상징'의 기능을 기독교의 성령 (Holy Spirit) 이해에서 찾고자 하였다. "성령이 현존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자신의 의식적인 의지와 충동을 뛰어넘을 수 있는 조력자가 우리에게 계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그는 말한다. 조무남목사도 치유는 단순한 육체의 질병을 고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 혼, 육의 온전하고 흠 없기를 바라는 구원의 사역이며, 하나님의 영이 사람들에게 돌입해온(롬8:11) 것을 알 수 있게 나타나는 표적이라고 봄으로써, 치유의 전인성을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치유목회는 전인교역의 한 방편이다. 치유사역의 원리도 전인적이어야 한다. 즉, 영, 혼, 육의 어느 한 부분의 작용은 전 영역에 영향을 주며, 서로 유기적 관계에 있으므로 치유사역은 전인적, 전환경적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은 고찰을 통하여 오늘의 현대목회에서 인간의 전인적 치유와 영성생활의 지도사이에 놓여 있는 중대성을 충분히 시사해주는 것이다. 다양성의 현대사회에서는 심리학이나 상담학, 현상학에서 말하듯이 단순하게 현대인을 해석할 수 없다. 특히 현대인의 불안과 갈등의 원인들이 보다 정신적, 내면적, 영적인 면으로부터 발생하고 있는 점을 보더라도 영적 지도자로서 인간의 영성을 지도하고 육성해야 하는 목회자에게 있어서 치유목회는 절대적인 과제라고 본다.
이상 살펴보았듯이 전인교역모델은 인간을 다각도로 이해하고 해석해야 하는 목회현장의 다양성내지는 전문성을 보여준다. 다양화되고 전문화된 목회현장에서 영성목회의 수행은 많은 부분에서 인간의 차원을 넘어선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성령의 도움이라는 사실이다. 목회상담이나 치유목회는 수평적, 수직적 관계성을 회복시켜주는 중요한 방편으로서 적용되어져야 한다고 본다.
제3절 치유목회의 결과로 나타난 교회의 영성
신약에 나타난 영성을 이해하기 위해선 필수적으로 예수님의 영성적 삶을 모델로 삼을 수밖에 없다. 그 이유로 류기종 박사의 말을 빌리면, "기독교 영성은 한편으로는 성서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인 복음에 기초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삶과 그의 깊은 영적 체험에 기초한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는 기독교 영성의 원천이며 또한 궁극적 모범이요, 모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전통적인 기독론 연구분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집중되었으며 인간인 예수님의 고뇌와 내면생활, 종교적인 체험에는 관심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임을 문상희 교수는 지적하고 있다.
영성을 언급할 때 그 구심점은 그리스도와 성령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므로 신약의 영성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체험과 그리고 제자들의 부활체험과 초대교회의 성령강림사건에 있다. 케이는 "예수"란 책에서 "예수님의 교훈의 핵심은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체험"이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체험의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기록은 성서에서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간접적 체험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상과 선교활동, 그 분의 삶속에서 추측해 볼 수는 있다. 특별히 요단강에서의 세례사건과 광야에서의 시험기사는 예수님의 하나님체험을 제공해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세례요한을 통해 요단강에서 비둘기 같은 성령으로 충만한 세례를 통하여 예수님은 성별되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영적 능력의 도래를 체험한 것이다. 마가복음에는 "예수에게"(to him), 마태와 누가는 "예수위에"(on him), 마가는 "예수속으로"(into him) 들어왔다고 표현한다. 마가의 기사는 성령이 예수님 속으로 들어가서 머물러 있음을 암시한다. 이는 세례받던 그날 예수님에게 성령이 강림했다가 거두어간 것이 아니다. 예수님안에서 성령이 계속 머물러 있게 된 것을 말한다. 중요한 것은 복음서들이 한 목소리로 증언하듯이, 이 사건에서 예수님은 성령에 의해서 종말론적인 사역을 위해 준비되었고, 또한 종말의 시작과 함께 새로운 창조가 시작된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예수님이 본 "하늘의 열림"의 환상은 종말론적인 새로운 창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게 있어서 회개의 표시였던 그 세례가 예수님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를 주었다. 즉, 그것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원 사역을 위해서 부름을 받는 소명(召命)사건이었다.
이 사건 후에, 예수님은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신 후 마귀의 시험을 받았으나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고 공생애 사역에 들어가신다. 광야에서의 40일을 통한 영성수련을 통해서 그는 사탄을 유혹을 극복하였고, 그 영적 승리는 상실된 에덴낙원 상실이후에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원형적 삶을 회복시켜 주었다는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즉 잃어버렸던 에덴낙원의 궁극적 회복을 이루리라는 재창조적 영성을 보여주는 좋은 실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하나님체험 사건을 통하여 중요한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그 하나는, 이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은 자신안에서 약동하고 있는 하나님의 성령을 체험했다. 두 번째 예수님의 신앙체험은 하나님의 아들이란 의식이다(막1:11).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특별한 아들로 인식하고 있으며, 아들로서의 권한을 자의로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그 분의 방법에 따라 사용할 것임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교훈, 선교, 사상, 그리고 행동은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 즉 신앙체험의 외적 표현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전한 것은 바로 이러한 체험이었다. 예수님은 영성생활에 있어서 "은밀성"을 강조했다. 그가 영성생활에 있어서 은밀성을 강조한 이유는 영성생활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가장 우선적으로 나와 하나님 사이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영성생활의 모습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단편적으로밖에 볼 수 없다.
예수님은 당시의 정형화되어 있던 영성생활 관습들을 대폭 무시했다는 사실이다. 아침, 오후, 저녁에 드리는 정례적인 기도나 일정한 날짜를 정하여 지키는 정례적인 금식의 관습을 무시했던 것 같다. 기도의 경우 형식화된 기도를 거부하고 진실된 기도를 중시했다. 금식의 경우에는, 광야를 떠난 후 거의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기에, 왜 당신들은 금식을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봉착하였던 것이다(마9:14-17, 막2:18-21, 눅5:33-39).
그러나 예수님 자신은 분주한 시간중에서도 틈틈이 홀로 떨어져서 기도를 했다는 전승은 복음서 전승 전체 속에 나타난다. 예수님은 정례화된 기도를 거부했지만, 다른 한편 언제나 기도하는 삶을 살았다. 예수님의 기도 생활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증거 중 다른 하나는 "아바"(abba)라는 용어이다. 이 용어는 기도에 있어서 예수님의 하나님 체험의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예수님은 기도의 경험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친밀성을 느끼고, 그러한 독특한 감정을 이렇게 어린아이의 용어로 표현했을 것이다. 그의 기도는 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열려있고 친밀한 기도였다. 예수님은 또한 그의 제자들을 이 친밀성의 관계안으로 불러 들였다. 초대 교회는, 성령안에서 신자들도 예수님과 같은 열린 관계로 들어 갈 수 있다고 믿었다.
성령은 사도들이 행한 이적적인 치유에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미 약속된 성령은 마침내 제자들에게 강림했고(행 2: 1-4), "wonders and signs"이 많이 나타났다(행 2: 43). 제자들을 통해서 나타난 구체적인 치유 사역은 사도행전 3장에 나타난다. 성전미문에 앉아있던 앉은뱅이가 성령에 이끌림을 받았던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서 고침을 받았다(행 3: 1-10). 바울은 성령에 의해서 나타나는 치유를 은사로 표현했다(고전 12: 4-11).
홈즈(Urban T. Holmes)는 현대 교역의 위기의 원인을 네가지로 분석하였다. 첫째, 지금까지 신학교육은 인간 이성의 능력에 너무 강조점을 두어 삶의 문제 해결은 인간 이성의 능력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둘째, 산업혁명의 결과로 자연 공동체의 와해에 있다. 셋째, 교회가 인간 삶의 중심에서 나변으로 밀려난 데 있다. 마지막으로 문화의 각성(disenchantment)에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의 유일한 대안의 교역의 영성적 차원에서 극복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컬리(Iris V. Cully)는 "영적성장을 위한 교육"에서 서론적으로 '방황하는 현대인'을 심각하게 묘사하고, 영성개발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목회신학은 'Seelsorge'(영혼의 병의 치료)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왓슨(Watson)은 20세기에 들어서 '영혼의 돌봄'(The Care of Souls)이란 개념을 사용하였다. 1950년대를 거치면서 힐트너(Seward Hiltner)는 로저스(Rosers)의 인간잠재성 심리학, 화이트헤드(Whitehead)의 과정신학과 연계하여, 목양적인 개념(Sheperding Concern)을 치료(Healing), 지탱(Sustaining), 인도(Guiding)의 차원으로 발전시켰고, 와이즈(C. A. Wise)는 에릭슨(Erikson)의 성장발달론에 기초하여, 목회자와 교인사이의 보다 인격적인 관계에 중점을 둔 '패스토랄 캐어'(Pastoral Care)를 발전시켰다. 이상과 같은 목회신학적인 맥락은 모두 인간의 영혼의 내면을 돌본다는 점에서 영성(靈性)과 밀접한 관계에 놓인다. 와이즈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개념을 확장하여 성령의 개념으로, 그리고 성령의 사역을 인간 목회자의 역할에 직결시켰다. 그는 말하기를 "개인의 영혼속에서 결실되어지는 성령의 덕목들은 목사들이 맺고 있는 관계속에서 형상화되고, 표출된다."고 하였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성령은 목사의 영혼을 통하여 인간의 깊은 무의식적 욕구들에 말을 건네시고 영혼의 성장을 야기시킬 수 있다."고 하였다. 이기춘교수는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질적 미성숙임을 지적하고, 그 해결책으로 목회자 개인의 내적인 자아를 성숙시키고, 영혼을 돌보는 목양적인 목회(Pastoral Care)형태의 개발이 시급하다고 역설하였다. 결국 목회자의 영성개발의 필연성은 하나님의 목양사업을 위한 중재자로서 절대적이다. 목회자에게 있어서는 목회의 장은 곧 영성개발의 장이요, 영성개발지도의 자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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