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병철(작가)
공주는 ‘구구십리’다. 90리 이내에 아홉 개의 소도시가 포진되어 있단다. 천안, 조치원, 부여, 대천, 대전, 청양, 예산, 온양, 청주가 한 시간 거리이고 지금은 세종시까지 붙어있으니 지리학상 교통의 중심지이다. 그러나 여행객들은 공주에 머물러 유(遊)하지 않고 객창감으로만 작별하니 가히 통행세라도 받아야 할 판이다. 식민지 시대까지는 대전과 대적할 규모였으나 철도가 불발되면서 이제 옛 도읍으로만 남게 되었으니.
먼 옛날 공주는 그렇게 한 나라의 도읍지였다.
고구려 장수왕의 침탈로 개로왕(457년)이 참수당하고 이어 즉위한 문주왕(477)이 수륙교통의 요충지인 공주로 천도하였다. 다시 ‘삼근왕→ 동성왕→ 무령왕’으로 이어지다가 성왕(554)의 사비천도 때까지 백제의 도읍 역할을 맡았다.
금강은 물과 교통을 제공하면서 동시에 공주산성을 지키는 요새의 역할을 맡았다. 곰토템을 받아 이름도 웅진(雄鎭)이었으니, 풀이하면 ‘곰나루’ ‘고마나루’다. 그렇다. 금강은 원래 ‘곰강’에서 비롯되었고 공주는 ‘곰주’, 우금티는 ‘윗곰티’에서 유래한다. (도적이 많아 소를 끌지 말라는 ‘牛禁’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조금은 끼워맞추기 식이고.)
그 80년대에 시국의 서릿발을 피해 공주 터미널에 내리면.
조재훈 교수님은 ‘돌아온 탕아’ 같은 객지 제자와 곰나루 동행을 하시곤 했다. 연미산 고개 따라 물길들이 굽이굽이 궁합을 맞추는 중이다. 사내에게 버림받은 암곰이 두 자식을 양 팔에 안고 강물에 몸을 던진다는 슬픈 전설의 강물이다. 그게 웅진(雄鎭)의 어원이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송림 사이에 곰사당을 세워 국가적 행사로 예를 갖췄다고 한다. 지금도 여기저기 곰 조각이 세워져 흔적을 보존 중이지만.
4대강 공사 이후 체형이 바뀌면서 곰나루 솔숲의 로망이 지워지기 시작했다. 아름드리나무들의 베어진 밑동 너머로 소녀들의 수건돌리기나 연인들의 첫 사랑 고백 풍경이 오버랩되지만 이제는 황망히 흘러간 풍경이다. 새로 심은 나무들 역시 뼈를 키우는 중이지만 왠지 조형물 같다.
관점은 ‘자연 대 인공’이며 ‘개발 대 보존’이며 ‘직선과 곡선’의 차이다. 나는 ‘강변 살자’ 부류의 음유문사는 절대 아니지만 의식 있는 적극적 환경운동가도 못 된다. 어쩌면 생태계 위기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하는 감상주의자일 수도 있다.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려 시도하면 자연도 당연히 거칠게 저항하므로 사라진 늪지에서는 해마다 준설 공사와 지천의 둑 공사를 되풀이해야 한다. 강변을 메우고 자전거 도로를 만들고 호프집 조명을 매달수록 수억 년 고락을 함께 한 생명붙이들과 단절도 고민이다.
다시 기우에 빠진다. 자칫 장마철 공주보에서 막힌 물이 석장리 박물관까지 차지 않을까, 유람선 사고가 나면 강물이 어떤 모양으로 오염될까. 그런 화면들이 제발 소심증의 환각이길 바랄 뿐이다. 가끔 물고기 시신을 건져내는 가위눌림에 시달린다. 보를 쌓아 호수화 된 물의 광합성 부족이 아닌가 불안한 마음이다. 급류 따라 떠밀려가면서 물고기 대가리가 콘크리트 직선에 부딪치는 환청에 시달렸다. 파낸 모래가 급류에 쓸려 다시 높아지는 현상을 접하면서 ‘생명체’라는 화두를 곱씹어 보았던가.
89년, 그 옛 도읍에 복직교사의 이름으로 첫 발을 디뎠고 이제 스무 해가 넘었다.
탄천중학교로 출근하면서 날마다 우금티 고개를 넘었다. 동학년 그해, 동학농민군의 시신이 언덕을 덮었던 그 우금티다. 그때 나는 어두웠다. 구터미널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우금티 고개를 넘을 때마다 시국과 세상에의 분노로 가슴을 싸매곤 했다. 그랬다. 전봉준 ․ 손병희의 20만 군사는 죽창을 들고 일본군의 근대적 무기와 맞서다 비극적 패배를 당한다.
후손들은 일본군의 학살만 기억하지만 관군 역시 적군을 불러들여 제 나라 백성에게 총을 겨누었다. 관군 출신 이두환의 기록에 의하면 밭둔덕에 버려진 시체가 발에 채여 까마귀 밥이 되었다고 했으니 분하고 원통한 일이다.
토박이 친구 조성일(現 커피나무 운영)의 어린 시절, 금학동의 감자밭에 호미질하다 보면 동학년 유골의 흔적이 튀어나오기도 했단다. 지금도 우금티에서는 ‘내 뼈다구 내놔라, 내 영혼 살려내라’ 외침이 쟁쟁하게 울린다. 동학 100주년에 전병철 시인과 유지남 시인 그리고 나까지 공동창작단을 결성하여 우금티에 비목을 세우기도 했다.
젊은 날 후배 시인 이재무와 벗 조성일의 집에 갔다가.
금학동 뒷산 생태공원도 가보았다. 예전의 지막골 수원지 뒤로 나무꾼들의 집터가 시커멓게 남아있었다. 수원지 근방 솔숲에 지게목발 받쳤다가 저물녘 제민천 오일장에 내려와 나뭇단 팔아 성냥이나 양잿물을 바지게에 올려놓고 작대기 두들기며 돌아왔다던가. 빈 바지게 가랑이에 대롱대롱 매달로 온 고등어 한 마리는 아궁이 곁불로 온가족 비린 반찬이 되어 자녁 밥상에 오를 것이다. 지금 수풀은 훨씬 울창하여 멧돼지 가족이라도 만날 판이다. 후배 시인은 돌아오는 금학동 골목길에서 나태주 시인의 집이라며 문패를 가리키기도 했었다.
이번에는 공산성 풍경이다. 타지의 문청 시절 ‘술 따라 정 따라’ 찾아오던 자리다. 백사장 모래 보자기 위로 가끔 사람들의 그림자가 아득한 풍경처럼 보인다. 밤의 을씨년스러움은 또 새롭게 호사스러운 분위기다. 백제문화제 때는 공산성에 경관조명이 점등되어 어둠과 빛이 혼재되기도 한다. 공산성 날맹이에서 강물을 내려다 보면 강물 그 너머로 대학 캠퍼스가 고즈너기 박혀있다. 나는 그 대학도서관과 근방의 시립도서관을 수십 년 동안 들락거렸다.
그러니까 공주가 젊은이의 도시다.
인구 10만 남짓의 소도시에 고등학교의 숫자가 많고 대학 캠퍼스가 군데군데 박혀 있어서 거리마다 젊은 유학생들로 넘친다. 그래서일까, 술값이 싸고 표정이 밝으며 도서관 문화가 잘 발달되어있다. 대학 도서관도 시민들의 이용이 가능하다. 웅진, 강북, 공주도서관 등 대여섯 장소의 시립도서관에서 사물함까지 이용할 수 있으며 네트워크가 발달되어 서로 다른 도서관에서의 반납과 대출이 가능하다.
마곡사는 단풍 풍경이 절정이다. 중년의 어느 날이었던가.
그해 가을 단풍나무를 보고 여덟 살 내 아들이 ‘단풍나무가 너무 새빨개서 무섭다고 했다. 마곡사 입구 다리에서 고개를 내리면 물살 사이로 팔뚝만한 잉어가 지느러미를 부딪친다. 아름답다. 가을을 채워주는 울창한 수풀 색깔이 현란하고 수제비처럼 뚝뚝 떨어지는 은행잎들이 눈부시게 아름답다. 그리고 나는 아름다움에 취할 때마다 눈시울에 젖곤 한다. 풍경의 아름다움은 자칫 그렇게 삶의 지향점을 흐리게 만들기도 한다.
신원사는 청년 시절, 막걸리 낮술에 젖기 위해 완행버스 타던 길이다.
매표소도 없었고 노래방도 없던 시절이 엊그제 같다. 망자 최연진 선생(전 동그라미 회원) 가족과 장마 끝 신원사 울타리를 걷기도 했다. 최선생은 비 그친 신원사 담벼락에서 누렇게 쏟아지는 흙탕물을 보고 ‘아, 진짜 흙탕물이다.’라고 탄성을 질렀다. 녹음방초 계곡으로 누런 물살이 쏟아지는데 다시 ‘흙탕물이 참 예쁘다’고 감탄하는 것이다. 흙탕물의 진위 여부에 갸우뚱대다가 바닥으로 쏟아지는 황톳물 보자기에 모두 취했고 그 바람에 내 아들도 처음으로 흙탕물의 아름다움을 체득했단다. 그러니까 자연의 원단 그 자체만의 신비로움을 만난 것이다. 완두콩처럼 샛노랗던 아이들이 지금은 등푸른 고등어로 헤엄치고 있다. 그네들은 공주에서 잔뼈를 키웠으므로 더 이상 객지에서 깊은 정을 붙이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안개도시 공주의 서정성이다.
마곡사 가는 하천 따라 주룩주룩 피어오르는 안개더미에 파묻혀 8년을 통근했다. 이상하다. 안개 속을 뚫고 가다보면 막혔던 절망이 금세 트일 것만 같다. 마찬가지다. 마티 고개 지나 안갯속 청벽 강물을 바라보노라면 손바닥만 한 섬들이 가슴을 가라앉혀 주기도 한다. ‘밤섬’이건 ‘버드나무섬’이건 ‘때까치섬’이건 아무 이름자나 멋대로 붙여주고 싶은 섬들이 안개 속에 둥둥 떠있는 것이다. 버스 손잡이에 매달려 ‘아름답다’를 반복하며 세월을 보내다가 머리칼에 서리가 내렸고 등이 굽었다. 이 소도시에서 그렇게 해로(偕老)하다가 언젠가 의자를 물려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