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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대가족을 이루던 전통사회에서 가족은 모든 관계의 중심에 놓여있었고, 그것의 확장 개념인 혈연의 끈은 무엇보다도 단단한 결속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면 혈연 의식이 조금은 희미해진 21세기의 시점에서 가족은 어떤 의미일까? 이른바 핵가족으로 대표되는 현대 생활에서도 여전히 '가족주의'는 그 힘을 잃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부분적인 현상이겠지만, 경제적 이익을 통해 뭉친 ‘가족주의’의 실상이 잘 드러난 몇 가지 사회적 현상이 있었다. 예컨대 최근 부동산 가격의 폭등과 다주택자들에 대한 과세를 강화하겠다는 정책이 발표되자, 주택의 상속 비율이 현저하게 높아졌다고 한다. 특히 미성년자들의 비중이 적지 않다고 하는데, 이것을 일컬어 '부의 대물림'이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부모가 재벌이라는 이유로 아무런 능력 검증도 없이 기업을 물려받는 것이 당연시되는 풍토에서, 그 자식의 그릇된 행위로 인해 기업의 대외적 신인도에 영향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러한 문제는 단지 '가족주의'의 차원이 아닌, 자본주의의 문제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자본의 막강한 힘 앞에서 그것도 '부모의 재산도 능력'이라고 떠벌리던 자들의 인식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문득 이 책을 읽으면서, 이른바 지금의 시점에서 '가족주의'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떠올려보았던 이유라 할 것이다.
이 책은 '가족'이라는 키워드로 루쉰이라는 인물의 의식과 문학세계를 점검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저자가 했던 '루쉰과 가족'이라는 강연의 내용을 정리해서 엮은 이른바 '렉처-북' 형식이다. 강연의 내용으로서는 어땠을지 몰라도, 책으로서는 전체적인 흐름이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인상을 받게 되었다. 읽는 내내 '가족'이라는 주제에서 바라보는 루쉰인지, 아니면 루쉰의 삶과 작품을 '가족'이라는 키워드로 분석한 것인지가 분명하게 잡히지가 않았다. 가족과 루쉰을 말하고 있지만, 두 개의 주제가 긴밀하게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예컨대 1부의 '가족이란 무엇인가'와 3부 '핵가족의 성립과 붕괴'는 가족에 대한 이론적 설명과 영화 등 다양한 매체에 나타난 핵가족의 의미를 짚어내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1부에서는 동서양에서 통용되는 ‘가족’의 개념과 그 역사를 짚어보면서, 현대에 그것이 어떻게 변용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이와 함께 3부에서는 루쉰이 잠깐 등장하기는 하지만, 나혜석의 연애담이나 영화 <기생충>과 <하녀> 등에서 나타난 근대 가족의 허상을 설명하기도 한다. 그리고 오늘날의 파편화되어 가고 있는 가족의 문제들에 언급되고 있다. 단지 현상을 제시할 뿐, 거기에서 더 깊은 논의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고 여겨졌다.
'루쉰, 아이를 구하라'라는 제목의 2부에서 루쉰의 생애와 그의 작품 <광인일기>에 드러난 면모를 잠시 분석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내용으로 보아 굳이 '루쉰'과 ‘가족’이라는 주제가 병렬적으로 제시되어 있을 뿐이다. 루쉰의 가족 관계와 그의 글에서 다뤄진 가족의 문제가 언급되고 있지만, 이는 단지 현대 사회에서 저자가 바라보는 가족의 대안을 이끌어내기 위한 과정이라고 이해되었다. 마지막 4부의 '청년과 새로운 네트워크'에서도 루쉰의 <아Q정전>이 거론되기는 하지만, 전통적인 가족관에 대한 인식을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저자의 주장이 이어진다.
하지만 그 결론이 다소 모호해서, 저자가 '가족'이라는 주제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한 상이 잡히지 않는다. 부부를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가족의 구성, 그리고 영화로도 만들어진 <아내가 결혼했다>라는 소설에 나온 이른바 ‘폴리아모리’라고 하는 한 사람이 두 사람 이상의 배우자를 택하는 것을 언급하기도 한다. 물론 혼자 살아가는 1인 가족이 흔치 않은 모습으로 노정되는 현대사회의 모습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상황들을 열거하기는 하는데, 저자가 ‘루쉰’과 ‘가족’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적어도 나에게는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책의 제목으로 제시한 '루쉰'이나 '가족'이라는 두 개의 주제가 충분히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었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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