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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어야할 자리
이 창 훈 (시인)
인간의 마음이 가장 순정해지고 맑아지는 시간은 언제인가요? 해가 뜨며 모든 생명의 기운이 약동하고 솟아나는 아침인가요? 일체의 감상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태양이 머리 위에서 작열하는 정오의 한 때인가요? 아니면 어둠이 모든 것을 집어 삼켜 오로지 이제는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별들만 처연한 눈빛을 빛내는 깊은 밤일까요?
아마도 그 시간은 ‘저물 무렵’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지 않을 것처럼 뜨겁게 타오르던 해가 서서히 제 온 몸을 부스러뜨리며 저무는 순간, 그 순간을 바라보는 인간의 마음 역시 온갖 달뜬 정념을 가라앉히며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이 세계의 하루를, 한 생을 뒤돌아보며 되새김질하기 마련이니까요.
시는 기쁨과 환희의 축복을 말하기보다는 어쩌면 모든 것들이 저물어 가는 순간의 그 슬픔과 처연한 아픔을 나직이 읊조리는 고백의 장르일 겁니다. 그렇기에 아무리 시대가 빈혈을 일으킬 정도로 변하고 인간성을 저버리며 물화物化되고 있다고 해도 결국 유한과 소멸의 운명으로 한없이 어두워질 수밖에 없는 모든 존재들에 대한 성찰과 연민, 가없는 사랑이 결국 시가 있어야할 자리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세기말을 지나 소리없이 2000년대가 들어선 이후 ‘다른 서정’, ‘시의 미래’ 등의 화려한 레토릭을 구사하며 많은 젊은 시인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등장했습니다. 대다수가 다 유명하고 힘 있는(?) 문예지를 통해 작품을 발표했구요. 또한, 일군의 유명하고 유능한 평론가들의 조명과 찬사를 받으며 문단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너무 과문한 탓인지 저는 무슨 암호문 같은 언어와 지나치게 자기 주관적인 세계에서 중얼거리는 개인 방언 같은 그들의 시가 과연 우리 시의 미래인가? 라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시인들의 시들이 주목받은 이후에 중앙이라고 일컬어지는 문단에서 발표되는 시들은 왜 그리 대다수가 어렵고 난해한 언어의 성채를 뽐내고 있는 것인지요? 그 잘나고 어려운 시들이 결국 시의 자리를 저 저잣거리의 많은 사람들은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높은 성 위에 빛나는 표창장처럼 걸어 놓은 것은 아닌지요?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이 서정시의 오래된 원리이자 믿음이었음을 여전히 소박하게 믿고 있는 저는, 여전히 ‘서정’이 있는 자리에 시가 깃들고, 그 서정이 깃든 시들을 풀꽃이 핀 낮은 땅 위의 사람들이 비로소 읽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늘 위기였던 ‘시의 위기의 시대’에 중심이 아닌 변방에서 여전히 좋은 시들은 씌어지고 있으며, 부귀하고 공명한 잡지가 아닌 들꽃처럼 가난한 잡지에서 그런 시들은 묶여지고 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은 그럼에 소소한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1. 울음, 서정이 있어야할 자리
1.
하늘이 울었다
땅도 울었다
미처 피지 못한 꽃봉오리
바다에 깔려
울음 운다
맹골수도 검은 바다가
검은 이빨을 내밀고 있다
바다여, 우리의 꽃을 어서 내어 놓아라
온 나라에 비가 온다
모두 다 잃어버린 가슴에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다
-<이성교 「모두 다 잃어버린 가슴에」 시인정신 2014년 여름호>
1.2.
울음은 세수하면서 울어야 하리
헛간 고쳐 엉성하게 양계할 때
엄마는 이고 나간
알이 깨어진 채 돌아온 적 있었다
그날 엄마는
앵두꽃처럼 붉은 눈썹 달고
급히 엎어놓은 세숫대야 수돗가에 놓는데
장터 바람이 쇳소리로 쏟아졌다
바꾸어 온다던 쌀 대신
비릿한 물살이 양은 대야에 부딪히고
엄마 손바닥을 치고 엄마 뺨을 치고
튕겨 나온 물방울들은
제각각 울음으로 태어나고 있었다
젖지 않으려고
스스로 젖은 곳으로 찾아 든 울음이
나르시스의 신열처럼 피어올랐으리
밑동이 잠기도록 젖어야 꽃은 피리,
한때는 엄마의 세숫대야 겁 없이
물기 닦아주던 나는
이제,
샤워기까지 털어놓고 세수하는 나는
언제나, 어머니 경지에 다가설까
-<이미화 「울음세수」 시인정신 2014년 여름호>
1.3.
반지를 잃어버린 노인들이 망가진 세탁기, 그 통 큰 여자를 밖으로 끌어낸다 여자는 큰 덩치의 안간힘으로 버티다 빗물 질척거리는 바닥에 팽개쳐졌다 대성통곡하듯 입 크게 벌어졌는데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눈물인 양 땟물만 흘러나왔다 반지를 어디에 숨겼지? 통이 커도 여간 큰 게 아니라며 은혜의 집 노인들 여자를 눕혀놓고 함부로 뒤진다 속엣 것을 모두 게우게 했다 몸의 저 밑바닥에서 나온 동전과 단추 몇 개 금간 사랑 잃어버린 세월 밤마다 찾아오는 허리 통증과 어깨 결림…… 지독하다 아무리 찾아도 반지는 없다 오지랖 넓은 가슴통이 빗물로 축축하다 굵어지는 빗줄기에 진저리치며 노인들 돌아섰다
고물 수거차가 왔다, 녹이 슨 밑동
휑하니 가슴을 드러낸 통돌이 세탁기를 들어올린다
벌컥벌컥 맹물을 마셔대던
홑이불이며 빨랫감을 한 아름 받아 안던
몸집 큰 일용직 밀양 댁을 부축해 응급차에 태우듯
-<정미 「통 큰 여자」『시인정신』2014년 봄호>
중국의 시인이자 문장가였던 한유는 시인을 가리켜 ‘잘 우는 능력’을 지닌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시를 쓰는 자아와 그 자아를 둘러싸고 그 자아와 관계 맺는 대상과 세계와의 동일성에서 파생하는 인간적인 반응과 정서를 표현해내는 것이 시이고 ‘서정’이라고 믿는다면, 그 때 가장 ‘인간적인’ 정서가 바로 울음이 아닐까요? ‘잘 우는’ 능력이란 결국 자아를 둘러싼 대상과 세계의 아픔과 통증을 민감하게 감각해내 연민하고 슬퍼할 줄 아는 마음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원로시인 초대석에 실린 이성교 시인의 「모두 다 잃어버린 가슴에」는 감출 수 없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 울음에 대한 시입니다. 한창 흐드러지게 꽃 피는 봄에 ‘미처 피지 못한 꽃봉오리’들이 이빨을 드러낸 ‘검은 바다’에 깔려 죽어간 가슴 아픈 세계의 고통에 대해 울음으로 답하고 있습니다. 아마 시인은 그 비극적 참사(4월 16일)가 벌어진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 이 시를 썼다고 보여지는데, 고통과 아픔으로 죽어가는 대상과 ‘검은’ 빛으로 상징되는 죽음과 폭력의 현실 앞에서는 언어의 조탁과 뛰어난 상징은 허위와 사치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핏물 같은 ‘비’가 ‘온 나라에’, ‘모두 다 잃어버린 가슴에’ 내리고 있는 상황에서는 ‘바다여, 우리의 꽃을 어서 내어 놓아라’라는 명령형의 어조로 직접적이고 절절한 소망을 토로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시의 마음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미화 시인의 「울음 세수」도 대상의 ‘울음’을 통증으로 느끼며 잘 포착해낸 시입니다. 식구의 생계를 위해 ‘헛간을 고쳐 양계’를 시작했을 때 엄마의 희망은 둥글게 부풀어 올랐을 것입니다. 그 부풀어 오른 ‘알이 깨어진 채’ 장터에서 돌아온 후, 울음을 감추고 씻기 위해 ‘급히 엎어놓은 세숫대야’에 쏟아졌다는 ‘장터 바람’과 ‘비릿한 물살’은 오래 전 엄마의 핍진한 가난과 힘들게 꾸려갔던 생계를 울음과 물기의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오래 전 그 엄마의 나이에 어느덧 다다른 것으로 보이는 시인은, 독백하듯이 ‘언제나, 어머니 경지에 다가설까’라고 반문하지만, ‘스스로 젖은 곳으로 찾아 든 울음’의 아픔을 공감하고 연민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밑동이 잠기도록 젖어야 꽃은’ 비로소 필 수 있다는 생의 통찰에 이르고 있습니다. 울음이 단지 값싼 자기 연민에 갇혀 있지 않고 진정 삶을 뒤돌아보고 생을 희망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힘이 될 수 있음을 이 시는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미 시인의 「통 큰 여자」는 착하게 살아온 한 존재의 울음을 예민하게 포착하여 드러낸 시입니다. 시작부터 숨김없이, 덩치 큰 구식 세탁기를 ‘통 큰 여자’로 빗댄 비유가 우선 주목을 끌면서 우리의 주의를 환기합니다. 도입부에 ‘망가진’이라는 너무도 분명한 설명적 진술 뒤로, ‘큰 덩치의 안간힘’으로 버티다가 끝내 ‘빗물 질척거리는 바닥’으로 팽개쳐지고 ‘대성통곡하듯 입’을 크게 벌려도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라는 비유적인 서술을 보십시오. 마치 쓰임이 다한 인간의 노동이 진창으로 내몰리고 이제 잔인하게 버려지는 아픈 모습이 연상되지 않으십니까? 저는 ‘통 큰 여자’의 오래된 노동과 생존이 이제 그 쓰임을 다하고 폐기처분되는 모습에서 한평생 뼈빠지게 ‘타자’를 위해 일해야만 했던 어머니의 삶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지극히 개인적인 상념으로 ‘몸집 큰 일용직 밀양 댁’이라는 마지막 비유에서 현재진행형인 사회문제의 하나인 ‘밀양 송전탑’을 떠올렸습니다. 크고 거대한 도시의 밤을 환하게 밝히기 위해 그 먼 시골에 건설해야 한다는 한전의 대형 송전탑을 반대하며 이미 다 늙은 몸으로 싸우고 있는 밀양의 여러 할머니들의 힘없는 모습이 묘하게 오버랩 되었습니다. 어쨌든 ‘반지’를 찾으려고 ‘통 큰 여자’를 둘러싼 채 ‘함부로 뒤지며’, ‘속엣 것을 모두 게우게’ 하는 폭력의 모습에서, 사용가치가 아닌 교환가치로 기계와 인간의 노동을 대하는 근대 이후의 잔인한 표정을 다시 한 번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휑하니 가슴을 드러낸’ 그녀가 흘리는 ‘땟물’은 소리없이 뚝뚝 떨구는 눈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2. 죽음 같은 일상, 익숙해지는 생활의 지면
2.1.
그 속에 들어서면
수 만권의 책과 사전이 꽂혀 있고
한때 애먹였던 적분積分도 입력되어 있다
노래와 게임이 펼쳐지는 별천지
지나간 기억이나 얼굴도 모여 있다
은행보다 신속해 번호표 없이 수시로 드나든다
손끝 하나로 죽어나가는 지루한 시간
그곳은 음지에 핀 음란향이 짙은 곳
나는 그녀에게 집중한다
잠시 외면하면
스팸문자들이 검은 먼지를 날리고
시도 때도 없이 자지러지게 소리를 질러댄다
그녀에게 붙잡혀
하차 역을 놓치고 거슬러간다
이 집요한 중독증
습관이 더듬더듬 어둠을 밀치고 있다
잠자리에 들 때까지
이제 손끝으로 세상을 걷는다
-<최태랑 「스마트폰」 시인정신 2014년 여름호>
2.2.
소파에 누운 사자가 코를 고네
움켜쥔 리모컨이 누 떼를 향하네
어디로 불지 방향을 종잡을 수 없는
초원의 바람 같은 야생의 수컷
고삐 묶어 가축으로 길들였네
…… (중략)……
오프로드의 지프 시동을 걸며
부르짖던 포효는 언제 잦아들었나
속속들이 등골 뽑힌 수사자
헝클어진 초록 갈기 듬성듬성하네
오후 네 시의 가죽소파가 코를 고네
-<최정란 「남편」 시인정신 2014년 여름호>
공원묘지가 보이는 집이다
이보다 더 적적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이보다 더 붐빌 수 없다
문상을 다녀가는 사람들이 들른다
한때는 사람이었던 조용한 사람들과
아직 풀이 자라나지 않은 새로운 사람들
오래 전에 죽은 사람들이 심심하면 찾아와
잘 지내지?
죽기보다 더 힘든 그의 삶을
궁금해 한다
한겨울에도 꽃들로 울긋불긋한 공원을
종일 바라보는 삶이란
얼마나 떠들썩한지
도대체 이보다 더 색깔 있게 살 수 있는지
-<최정란 「전망좋은 집」 중에서 시인정신 2014년 여름호>
세상엔 참 다양한 사람이 존재하고 그러한 사람들이 서로 부대끼며 다양한 생각을 하며 복잡한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는 믿음은 어쩌면 잘못된 판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빠르고 세련되며 더 화려하게 변하는 매체의 발전은 오히려 인간의 다양한 무늬를 하나의 모습으로 획일적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생각이 점점 분명히 들기 때문입니다. 자연에서 멀어지고 더 이상 ‘힐링’이니 ‘여가’가 아니면 더 이상 숲으로 가지 않는 도시 속의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살아내는 일상이란 사실 너무나 비루하고 생명의 기운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출퇴근 시간의 지하철을 타면 그 안의 사람들은 딱 두 부류로 정의내릴 수 있을 겁니다. 피곤에 졸고 있는 사람 아니면 이어폰을 꽂거나 그러지 않았거나 휴대폰(스마트폰)을 보고 있는 사람. 그리 오래지 않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지하철에서 사람들은 종이로 만든 책이나 신문 등의 인쇄매체를 가방에서 꺼내어 읽곤 했습니다.
최태랑 시인의 「스마트폰」은 그런 풍경마저 이제 소멸될 수밖에 없음을 아프게 되새기게 하였습니다. 누군가를 직접 대면해 만나고 이야기 나누고 함께 나누던 일상의 세세하고 다양한 풍경은 이제 ‘수 만권의 책과 사전이 꽂혀 있고’, 열어서 보기만 하면 ‘노래와 게임이 펼쳐지는 별천지’인 이 손바닥 만한 매체 안으로 빨려들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지나간 기억이나 얼굴’도 편리하게 저장되어 있으며, 직접 실무적인 일로 찾아가야만 했던 은행마저 찾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이 시대 매체의 첨단의 끝에 이른 스마트폰은 반복적이고 지루하다고 느낄 법한 일상마저 ‘손끝 하나로 죽어나가’게 하는 마법의 기계로 작동하며 화려함을 뽑냅니다. 그러나, 잠시만 외면해도 ‘검은 먼지를 날리는’ 스팸문자, ‘시도 때도 없이 자지러지게 소리를 질러’대며 ‘잠자리에 들 때까지’ 집요하게 손끝으로 만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그녀, 그녀가 피어나는 곳이 ‘음지’이고 ‘음란향’이 짙은 곳이라는 진술은 그녀에게 중독된 사랑이 죽음에 다름 아님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러기에 이 시는 손끝 하나로 죽어나가는 ‘지루한 시간’의 일상이 어쩌면 느리게 음미해야 하는 소중한 순간일지 모른다는 소박한 역설의 진리를 생각하게 해주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바쁘고 고단했던 평일의 일상을 거친 후, 또다시 다가온 주말의 오후도 별반 활기찬 생명의 기운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습니다. 최정란 시인의 「남편」은 주말의 죽음과도 같은 일상의 풍경을 재미있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생존과 가정의 존속이라는 틀을 유지하기 위한 일상의 노동은 어쩌면 누구에게나 당연한 숙명이자 엄숙함이겠지만, 그 텔레비전의 네모난 화면처럼 규격화된 삶에서 벗어나 ‘오프로드의 지프 시동을 걸며’ 떠나겠다는 주문 역시 비루한 현실을 벗어나고 별을 꿈꾸는 인간으로서 너무나 존중받아야할 소망일 겁니다. 그러나, 온갖 매체와 반복되는 일상의 발목으로부터 ‘종잡을 수 없는 / 초원의 바람’ 같은 야성을 회복하고 싶다는 절절한 소망과 한때 ‘부르짖던 포효’는 기억 속에서나 떠올릴 수 있는 오래 전의 일일 뿐이고 허망한 넋두리가 되어 방 안을 맴돌 뿐입니다. 머리가 많이 빠진 듯 ‘듬성듬성’한 사자의 초록 갈기가 결국 나른한 오후 네 시, 끊임없이 꿈꾸는 위반과 이상을 아래로 잡아끄는 늪처럼 안온한 가죽소파가 되어 코를 골 수밖에 없다는 전언은 오히려 너무나 직설적이고 섬뜩해서 동병상련의 통증을 뼈아프게 전해줍니다.
비루한 현실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의 삶의 모습이 결국 안온한 죽음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는 게 위의 두 시였다면 최정란 시인의 또 다른 시(「전망 좋은 집」)는 죽음의 일상을 매일 반복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또 다른 일상을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는 시라고 생각합니다. 자연의 품에서 벗어나 바쁘고 현란하게 반복되는 도시의 일상이 곧 죽음 같은 삶이지만, 도시의 삶은 죽음의 알리바이를 지우고 죽음 자체를 지금 여기의 일상에서 다소 멀고 조용한 곳으로 추방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소위 ‘전망 좋은’ 곳마다 만들어지는 것이 공원의 묘지들일 겁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적적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 곳은 ‘이보다 더 붐빌 수 없는’ 죽음과 그 죽음을 추모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분주합니다. 고요하고 평온한 죽음의 자리를 ‘얼마나 떠들썩한지’ ‘종일 바라보는 삶’을 산다는 건, 결국 죽음 같은 일상이 죽음 이후에도 지속되는 끔찍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2.3.
파도의 혀 끝에 전대를 맨 어시장 한켠
물간 생선 두어 궤짝 포갠 자리가 전부인 듯
그녀의 행동반경에 대하여
늘어선 횟집 수족관 사이
불하받은 듯한 평 지면에
제 몸 하나 꽉 조인지 십 수 년째
누가 봐도 저이의 책무란
제 몸을 풀어 빼곡이 필사본을 남기는 일이리라
칼질 난무한 생계의 도마 아래
종일 저 자리 떠나지 못한
질긴 생이 토막 나 있는지도 모른다
와락 밀려드는 파도의 각질은
오랫동안 굽은 등으로 부서지고
깊어지면 익숙해지는 생활의 지면 뒤
굳어진 남루는 긁어낼수록 사방으로 튀어
새하얀 마른 비늘로 종일 비리다
나선형 골목을 따라
발라낸 내장을 들고 사라지는 그녀
당도한 저녁이 몇 줄의 행간을 첨부할 때
몸이 잠시 빠져나간 자리
열고 닫힌 괄호 속처럼 고요하다
-<천융희 「생활의 지면」 시인정신 2014년 여름호>
점점 비루해지고 생명력이 거세되어만 가는 일상의 풍경은 번잡한 도시를 벗어난 변두리의 공간이라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생존의 노동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바닷가 마을의 일상은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은 생계의 늪으로 점점 빠져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말입니다. 천융희 시인의 「생활의 지면」은 그런 핍진한 노동의 일상을 스산하게 보여주는 시라고 생각합니다. 수족관을 달고 있는 횟집이 늘어선 어촌 마을이 있습니다. 어시장 전체가 ‘전대를 맨’ 듯 생존의 질펀한 노동이 땀 흘리는 공간입니다. 그 공간에 ‘불하받은 듯한’ 자그마한 땅에 ‘제 몸 하나 꽉 조인지 십 수 년’이 넘은 아낙이 있습니다. 분명 그녀의 오래된 노동은 한 가족의 생계와 핍진한 가난의 현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을 겁니다. 1980년대 이후 풀뿌리 민초들의 질박한 노동의 모습을 희망과 낙관의 모습으로 형상화한 그 많은 시들이 떠오를 법도 하지만, 이 시는 그런 노동의 성스러움과 낙관의 기대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오히려 너무나 무미건조하고 냉정하게 그녀의 노동이 되돌이표로 반복되는 끔찍함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종일 저 자릴’ 떠나지 못한 ‘토막 나 있는 질긴 생’의 그녀, 그런 그녀의 굽은 등에 매일 와락 부서지는 ‘파도의 각질’, 그리고 ‘깊어지면 익숙해지는 생활의 지면’ 뒤로 ‘굳어진 남루’란 표현들을 보십시오. 부드러움과 이어짐의 생명성과는 정반대로 반복되는 노동의 일상이 만드는 결과는 온통 굳어짐과 딱딱함이라는 반생명성의 성질로 귀결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발라진 내장을 들고’ 그녀가 사라진 빈 공간, ‘몸이 빠져나간 자리’의 고요함은 잠시의 적막함이나 휴식의 의미가 아닌 그로테스크한 섬뜩함과 공포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건 죽음의 데드마스크를 닮았습니다.
3. 비루한 일상 속 사랑, 다시 시작하는 삶의 존엄함
3.1.
네게 닿아야만 해
네 섬에 이르러야 해
달팽이가 오글오글 모인 그곳에서
살고 싶어
분꽃을 따서 섬의 귀에 걸어주고 싶어
붉은 목련 모가지를 꺾어 섬의 발치에 놓을래
내 발과 네 발
맞대일 수 있을까
발가락 사이로 참방거리는 파도소리를 만질 수 있을까
허벅지에 너를 누이고 귀이개로 노 저어가는
휴일의 아침
오랜 방황 끝에 돌아온, 탕자의 발에 향유를 붓는 소리처럼
방금 전 네 속에 흘려 부운 말 알아들었니
아, 너의 고른 숨이 내 소리의 뱃전을 친다
나를 밀어낸다
동굴 속에 날아드는 박쥐같은 잠
머지않아 오랫동안 들 수 있잖아
날, 귀 담아줘
거실 창에 쏟아지는 탱글탱글한 햇살에 눈 감지 말고
방금 전 네 속에 흘려 부운 말
이제 네 섬에 닿았다고 눈을 떠
나를 바라보아줘
-<정온 「외이도」 시인정신 2014년 여름호>
비루한 일상의 평일이 고단한 잠으로 이어지는 휴일의 아침 풍경을 가지고 쓴 시가 한 편 있네요. 정온 시인의 「외이도」가 바로 그런데요… 빼어나게 아름다운 사랑의 시라고 생각했습니다. 처음 이 시를 읽고 엉뚱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제목 ‘외이도’에서 가운데 (이)를 빼고 싶다는 이상한 상상. 물론 외이도는 ‘귓구멍의 어귀에서 고막에 이르기까지의 S자 터널 모양’의 신체부위입니다만, 저는 ‘외도’라는 단어를 무의식중으로 떠올렸습니다. 시 속의 화자는 휴일날 늦은 아침에 아직 일어나지 않은 남편의 귓밥을 파 주고 있습니다. 사실 매일매일 바쁜 일상의 노동과 그 삶의 현장은 가정이라는 공간에서 보자면 ‘외도’의 현장이 아닌가요? ‘오랜 방황 끝에’ 돌아온 ‘탕자’ 같은 남편의 잠자고 있는 귀에, 화자는 잔잔하게 호소하는 듯하지만 절박한 독백의 어조로 사랑의 밀어를 흘려보내고 있습니다. 허벅지에 사랑하는 사람을 누이고 귀를 파는 휴일의 풍경은 아름답고 훈훈하면서 동시에 묘한 통증을 불러일으킵니다. 잠자고 있는 ‘너의 고른 숨’이 ‘내 소리의 뱃전’을 치며 나를 밀어내고 있으니 말입니다. ‘동굴 속으로 날아드는 박쥐같은’ 잠은 가정으로부터 외도(?)할 수밖에 없었던 평일날 일상의 고단함의 자연스런 결과이겠지만, 사랑하는 사람과의 소통을 단절시킬 수밖에 없는 죽음의 유사현상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날, 귀에 담아줘’라는 표현이나 ‘이제 네 섬에 닿았다고 눈을 떠 / 나를 바라보아줘’라는 독백의 말들은 깊은 잠(죽음)의 수렁으로 서서히 빠져드는 사랑의 대상에게 절박하게 호소하는 듯하고, 절규하는 듯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불러일으킵니다. 또한, ‘외이도’의 ‘도’가 섬을 의미하는 중의적인 느낌이 더해지면서 ‘섬’과 ‘섬’ 사이가 주는 소통의 단절과 절망감은 통증을 유발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시가 지극한 사랑의 시라고 생각합니다. 고단하게 몸을 누인 사랑하는 사람에게 허벅지를 내주고, 귓밥을 파주며 ‘네 속으로’ 흘려 부운 말들은 지극한 사랑의 메타포가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닿을 수 없는 섬일 것 같지만 ‘발가락 사이로 참방거리는’ 파도는 섬과 섬을 오며 가며 이어주고 있는 인연이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3.2.
눈 내리는 겨울 산수화같이
물기 말라 헐거워진 숲이 있다
가을이 숲에 내려올 무렵,
땡볕을 분주히 달려온 여자
병원 복도 한켠에 그림같이 앉아 있다.
방사선 냄새 가득한 방에서 엿가락처럼
구멍 숭숭 난 뼈의 단면을 들여다본 후
숲 속 봄은 깊어서 더 우거졌는데
새들의 지저귐이 들어차고 넘쳤다는데
무겁던 햇살은 뱀 허물 벗듯 무게를 덜고
숲 웅덩이 마른 껍질이 침묵처럼 버석거린다
한참 그림으로 앉았던 여자가 일어서자
멈춰진 시간이 우르르 살아나고
모서리가 다 닳은 삶이 다시 일어서고
성긴 숲의 바쁜 갈무리로 저녁연기 자욱하다
푸르름이 그득했던 숲이 헐거워지기 시작하자
알뜰하던 둥지와 옹골찬 가슴을 가진 여자가
훌훌 털리고 안간힘으로 버티는 계절
-<박언숙 「갱년기」 시인정신 2014년 여름호>
모든 인간에게 무엇보다 평등한 단 하나를 꼽으라면 시간이겠지요. 존엄한 삶과 생존을 위해 반복적으로 보내온 노동과 일상은 정신없는 세월의 흐름과 함께 흘러가기 마련입니다. 박언숙 시인의 「갱년기」에는 그런 덧없는 시간을 보내고 이제 노년기로 접어드는 중년의 여성의 삶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한때 부지런히 ‘땡볕을 분주히 달려온’ 삶이지만, ‘가을이 숲에 내려’오는 조락의 계절에 ‘눈 내리는 겨울 산수화’같이 죽음의 겨울로 점점 다가서는 여자. 폐경과 우울과 ‘방사선 냄새 가득한’ 병원에서 ‘구멍 숭숭 뚫린’ 뼈의 단면을 들여다보게 되는 삶. 그러니 ‘그림’같이 고요히 앉아있는 여자의 모습은 죽음의 정물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 시는 죽음의 풍경으로 정물처럼 사라지는 삶을 그리는 시는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무겁던 햇살이 뱀 허물 벗듯 무게를 덜고’, ‘숲 웅덩이 마른 껍질’이 침묵처럼 버석거린 후에 죽음의 정물처럼 고요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어야할 ‘그림’, 그 ‘그림으로 앉았던’ 여자가 일어선다는 표현을 보십시오. 그렇게 ‘모서리가 다 닳은 삶’으로 죽음의 풍경에 다가서던 여자가 일어선 후에 ‘멈춰진 시간이 우르르’ 살아난다는 진술을 읽어보십시오. 그건 바로 갱년기가 다시更 시작하는 시간年으로 가는 회한과 성찰의 귀중한 시간이라는 시인의 인식에서 온 것일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물기 말라 헐거워지’고 ‘성긴’ 숲의 이 늦은 듯한 ‘갈무리’에서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희망(‘저녁연기’)의 존엄한 불씨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모든 것들이 ‘훌훌 털’린 것만 같은 조락의 계절에서 안간힘을 다해 버티는 여인의 모습은 눈물겹게 아름다움 그 자체가 아닐는지요? 생은 죽음을 견디며 끊임없이 다시 시작하는 생성의 순간이라고 말하는 희망의 시라고 생각합니다.
이창훈 :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1년 [시인정신] 신인문학상. 시집 『문 앞에서』 외 1권. 현재 남양주시 심석고등학교에서 열정적인 문학교사로 아이들을 만나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