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안티오코스 4세의 등장부터
세론의 패배까지의 마카베오 가문
2마카 4-7장; 1마카 1,10-3,26; 다니 11,22-33
(기원전 175~166년)
전반적인 상황
안티오코스 4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히브리인의 박해 시대가 시작된다. 그 원인은 다양하다. 다른 민족들과 히브리인들의 전통은 당연히 달랐으며 그 속에서 히브리인들은 다른 민족들에 동화되기를 거부했다. 거기서 발생한 선입견과 차이점도 한 원인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경제적 요인(안티오코스 4세는 로마에 진 빚을 갚고 로마 원정을 지원하기 위해 세금을 올려야 했다. 따라서 다른 민족의 신전뿐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의 보물에 눈독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과 정치·군사적 요인(적국 이집트와의 국경 지대에 자신들에게 충실한 민족을 두어 정치·사회적으로 안정된 상황을 구축해야 했다)도 중요하다. 여기에 유다 내부의 ‘친헬레니즘파’도 유념해야 한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이념적 확신에 의해,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정치적 차원에서 개인적 이득을 얻으려고 유다 세계를 주류 문화에 통합시키는 데 협조하려 했다. 차차 보겠지만 이 ‘파당’에 속한 인물들이 안티오코스 4세를 자극하고 종교적 박해를 유발시켰다. 이 시대에 대한 사료는 마카베오서와 요세푸스 플라비우스의 저술들이다. 다니엘서 11장도 이 시대에 대해 언급한다. 마카베오기 상·하권의 날짜들은 ‘그리스인들의’, 즉 기원전 312년에 시작된 셀레우코스왕조의 연대 측정을 따른 것이다.
32.1 안티오코스 4세가 셀레우코스 4세를 계승하다. 야손과
메넬라오스의 음모. 안티오코스 4세의 첫 이집트 원정
(2마카 4-5장; 1마카 1,16-28; 다니 11,20-28)(기원전 175~169년)
1) 셀레우코스 4세가 죽자 동생 안티오코스 4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대사제 오니아스의 형제인 야손은 자신이 대사제직을 얻으려고 새 왕에게 돈을 바친다. 거기에다 예루살렘을 헬레니즘화하려는 정치적 계획을 왕에게 제시했다. 안티오코스 4세가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전례 없이 오니아스 3세는 왕의 개입으로 대사제직에서 물러나 다프네로 도망을 가야 했다. 야손이 대사제직을 수행하는 동안 안티오코스 4세는 예루살렘을 한 번 방문했다(방문 날짜는 불분명하다).
2) 대사제로 임명된 지 3년 후에 야손은 몇 가지 논의를 하러 메넬라오스라는 사람을 안티오코스 4세에게 보낸다. 그런데 메넬라오스가 성전 보물 창고에 있는 많은 재물을 주겠다고 약속하여 대사제로 임명되었다. 그는 예루살렘에 입성했고 야손은 도망쳤지만, 메넬라오스는 왕에게 한 약속을 지킬 수가 없었다.
3) 메넬라오스는 이어서 안티오키아를 두 번째 방문했다. 그는 왕이 자리를 비운 사이 대리인 노릇을 하던 안드로니코스를 설득하여 오니아스 3세를 죽이게 했다. 오니아스 3세는 추방되고서도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횡령을 고발했던 것이다. 이를 알게 된 안티오코스 4세는 안드로니코스를 죽였지만 메넬라오스는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4) 기원전 169년 안티오코스 4세는 팔레스티나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지 않는 프톨레마이오스왕조의 활동을 사전에 봉쇄하고자 이집트 원정을 시도했다. 이집트로 내려가는 도중 그는 티로에서 메넬라오스를 고발하는 예루살렘 주민들의 대표를 만났다. 그러나 메넬라오스는 왕에게 큰돈을 바쳐 사면되고, 오히려 그를 고발한 자들이 처형되었다.
5) 이집트 원정은 안티오코스 4세의 우세로 끝났지만 이집트를 군사적으로 완전히 정복할 수는 없었다. 그는 시리아로 돌아가는 길에 예루살렘에 들러 많은 보물을 가져갔다.
32.2 안티오코스 4세의 두 번째 이집트 원정. 야손의 예루살렘 점령. 안티오코스 4세의 가혹한 박해(2마카 5,1-7.42; 1마카 1,29-64; 다니 11,28-39)(기원전 168~167년)
1) 기원전 168년 안티오코스 4세는 다시 이집트 원정에 나섰다. 승세가 보였지만 로마 사절이 개입하여 이집트를 떠나라고 명령했다. 안티오코스 4세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고 군대를 철수했다.
2) 안티오코스 4세가 아직 이집트에 있을 때 그가 죽었다는 헛소문이 떠돌았다. 요르단 강 건너편에 피신해 있던 야손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여 점령에 성공했다. 그러나 안티오코스 4세가 이집트에서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에 야손은 도망쳤다. 마카베오기 하권 5장 9절에 따르면 그는 스파르타로 쫓겨 가서 죽었다.
3) 이집트에서 돌아오던 안티오코스 4세는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반란으로 여겼다. 그는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약탈했으며 반대자들을 제거하고 성전을 철저히 수탈했다. 이듬해(기원전 167년) 그는 미시아의 수령 아폴로니우스가 이끄는 군대를 보내 일을 마무리하게 했다. 그는 성벽 일부를 철거하고 아크라Akra라고 불리는 성채와 주둔군의 진지를 구축했으며, 자신은 나중에 사마리아에 정착했다. 이 요새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성전에서 가까운 예루살렘 북서쪽 언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안티오코스 4세는 유다를 강제로 헬레니즘화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를 공표했다. 예루살렘 성전은 올림포스의 제우스 신에게 바쳤는데, 성경은 그 제단을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1마카 1,54; 다니 9,27; 11,31)으로 규정한다. 그리짐 산에 있는 사마리아인들의 신전도 이와 비슷한 운명에 처해졌는데, 그 신전은 나그네의 수호신 제우스에게 바쳐졌다. 율법의 기본 규정들(안식일, 할례, 음식 규정들)을 지키는 것도 금지되었다.
32.3 반란의 시작. 마타티아스와 유다 마카베오.
유다인들의 초반 승리(1마카 2,1-3,36)(기원전 167~166년)
이런 조치들은 유다 백성의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반란의 불꽃은 모데인(리따에서 동쪽으로 12킬로미터 떨어진 현재의 모디임Modi’im 근처)에서 시작되었다. 그곳에서 왕의 관리가 주민들에게 새로운 종교 관행을 따르도록 설득했다. 그러자 지역 유지였던 사제 마타티아스가 이교 의식을 거행하려던 히브리인과 왕의 관리를 죽였다. 마타티아스는 자기 아들들인 요하난, 시몬, 유다, 엘아자르, 요나탄과 저항하는 백성들을 데리고 유다 광야의 외진 지역으로 피신했다. 저항자들 중 어떤 이들은 안식일에 싸우는 것을 거부하다 몰살당했다. 그래서 마타티아스와 부하들은 안식일에 공격을 당하더라도 방어할 수 있도록 정비했다(1마카 2,29-41). 반란은 확산되었고 마타티아스가 죽자 지휘권은 그의 아들 마카베오라고 불리는(이로써 전체 가문이 마카베오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유다에게 넘어갔다. 유다는 미시아의 수령 아폴로니우스와의 첫 전투에서부터 승리를 거두었고, 아폴로니우스는 전장에서 죽었다. 그러자 코일레 시리아 군대의 지휘관 세론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소집했다. 무기뿐만 아니라 수적으로도 불리한 유다인들은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지형을 이용하여 벳 호론 근처에서 매복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자 세론의 군대는 필리스티아인들 지역까지 도망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