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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이해와 자기 성찰(신영복)
세계 인식과 인간에 대한 성찰 중에서 ‘인간’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인간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감히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것은 20년 수형 생활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회화에서는 원근법이, 소설에서는 3인칭 서술이 리얼리즘을 완성한다고 하지만 나는 반대로 1인칭 서술의 리얼리티를 극대화하려고 합니다. 적어도 인간 이해에 있어서 감옥은 대학이었습니다. 20년 세월은 사회학 교실, 역사학 교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인간학’의 교실이었습니다.
오늘 이야기하는 <청구회 추억>은 그 20년 세월의 출발 지점입니다. <청구회 추억>은 1심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사형수로 있는 동안 기록한 글입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 오후 5시 장충체육관 앞에서 만났던 어린이들과의 이야기입니다.
1심 판결에 이어 2심 고등군법회의에서 다시 ‘사형’이라는 선고가 떨어졌을 때 순간 모든 생각이 정지되었습니다. 예리한 칼날에 살을 베이면 한참 후에 피가 배어 나오듯이 순간적인 사고의 정지 상태에 이어서 서서히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중에 청구회 어린이들과의 약속도 있었습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 오후 5시 장충체육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어린이들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연락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어린이들과의 이야기를 적기 시작했습니다. 하루에 두 장씩 지급되는 재생휴지에 적기 시작했습니다. 필기구는 항소이유서 대필을 위해서 교도과에서 빌린 볼펜이었습니다. 육군교도소는 민간 교도소처럼 엄격하지는 않았습니다. 볼펜을 회수하는 것을 며칠씩 잊어버리기도 했습니다. 재생휴지에 그 볼펜으로 적기 시작했습니다. 청구회 어린이들과의 첫 만남부터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기록하면서 그때 그곳의 추억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글을 적는 동안만큼은 행복했습니다.
<청구회 추억>을 읽은 독자들로부터 그 어린이들을 지금도 만나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았습니다.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마 내가 출소한 지 3년째였을 겁니다. 밤 11시쯤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전화기 저편에서 자기가 누군지에 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머뭇머뭇 말을 이어 갔습니다. 내가 금방 알아차렸습니다. 청구회 어린이 중의 한 사람이 맞았습니다. 곧장 물었지요. “이름이 뭐야?” 누구라고 이름을 댔습니다. 내게는 메모첩이 있기 때문에 이름들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반갑게 통화하고 다음 날 학교로 찾아와 만났습니다. 23년 만의 만남이었습니다. 다른 어린이들 소식이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자기도 그 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고 소식마저 모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이미 죽었고 또 한 명은 의정부의 무슨 헬스클럽에서 일한다는 풍문만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나마 오래전의 소식이었습니다. 아마 달동네 어린이들이 우정을 이어 가기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나는 그때까지 서오릉을 찾아간 적이 없었습니다. 서오릉에 간다면 청구회 어린이들과 함께 가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잘됐다. 우리 서오릉에 한번 가 보자.” 서오릉 소풍 때 사진을 찍어 준 후배에게 연락하여 우리는 서오릉을 찾았습니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공원을 개방하지 않았습니다. 이따금 상상했던 서오릉 방문은 아니었습니다. 며칠 후 그날 찍은 사진을 보내 주려고 전화했습니다. 받지 않았습니다. 받아 둔 주소로 우송했습니다. 편지가 반송되어 왔습니다. 수취인 불명이었습니다. 그 후 지금껏 연락이 없습니다. 나는 같은 추억이라고 하더라도 당사자들의 마음에 남아 있는 크기가 서로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힘겨운 삶을 이어 왔을 그들에게 청구회에 대한 추억이 나의 것과 같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남한산성의 1년 6개월은 매우 힘들었던 시간입니다. 그전까지 겪어 온 구속, 취조, 재판, 사형언도 등의 과정은 심신을 피폐할 대로 피폐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1심 재판이 끝나고 눈 덮인 남한산성으로 이송된 이후에도 심신은 고달프기 짝이 없었습니다. 2심 언도 역시 사형이었습니다. 더구나 내가 수용된 1동 8호는 사형수, 무기수만 수용하는 중수형자 감방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동료 사형수들이 한 사람 한 사람 집행되어 떠나갔습니다. <청구회 추억>은 그런 상황에서 기록된 글입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남한산성 1년6개월은 20년 수형 생활을 미리 짊어진 듯 무겁고 침울한 나날이었습니다.
남한산성에서 만난 것은 ‘죽음’이었습니다. 함께 생활하던 사형수 중 다섯 명이 사형 집행되었고, 한 사람은 그곳에서 타살되었습니다. 나도 물론 사형수였습니다. 나는 사형이 집행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혹시 알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 또 스스로 비극을 극대화하는 심리적 충동도 없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은 늘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남한산성은 죽음의 현장이었습니다. 남한산성에 있는 동안 사형 집행된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연이 어느 것 하나 절절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문득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고아로 자랐고 군에 입대해서 장기하사로 말뚝을 박았습니다. 그에게는 창녀 애인이 있었습니다. 그녀가 어떤 아저씨하고 부산으로 살림 차려서 나갔다는 소문을 접하게 됩니다. 무리해서 휴가를 나왔습니다. 소문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녀를 찾으러 부산까지 갔습니다. 그 너른 천지에 부실한 소문으로는 그녀를 찾지 못합니다. 다시 기차 타고 올라옵니다. 부전동 근처를 지날 때 기찻길 옆 달동네에서 밥 짓는 연기가 올랐습니다. 그때는 땔감으로 밥을 짓기도 했습니다. 그 연기를 보는 순간 딴 놈 밥 짓느라고 저기 앉아 있을 그녀의 모습이 눈에 선하여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서 술을 엄청 먹고는 극장 앞으로 갑니다. 극장 파하고 나오는 관객들 머리 위로 부대에서 가지고 나온 수류탄 두 개를 던졌습니다. 공중에 뜬 수류탄 두 개를 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했습니다. '앗! 어떻게 하지? 저게 제발 불발탄이었으면...' 야속하게도 꽝 터졌습니다. 5명이 즉사하고 44명이 중경상이었습니다. 사형입니다.
내가 남한산성에서 그를 만났을 때는 이미 사형이 확정된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1동 8호 사형수 무기수 집금 감방에는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15년 형으로 감형된 헌병 출신 수형자가 있었습니다. 초병 근무 중에 지프차를 정차시키고 검문했습니다. 근무 수칙대로 검문했는데도 화가 난 장교가 차에서 내려 근무 헌병을 구타했습니다. 이따가 올 때 보자 하고 갔는데 정말 올 때 다시 지프차 세우고는 내려와서 구타했습니다. 얻어맞다가 그 장교를 카빈 소총으로 쏘았습니다. 그러고는 나도 죽자는 생각으로 자살을 합니다. 총구를 목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는데 고개를 덜 숙여 실탄이 뇌를 지나가지 않고 얼굴을 관통했습니다. 1심 판결은 상관 살인죄로 물론 사형이었습니다. 그 장교의 시신을 약혼녀가 와서 거두어 가면서 군대 영창으로 찾아와 면회했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 항소를 포기했습니다. 군 검찰관이 항소를 권유했습니다. 너는 근무 중이었고 피해자 과실이 없지 않기 때문에 항소하면 사형은 면한다고 강력하게 권유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소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자기 눈을 기증하겠다는 안구 기증 서약을 했습니다. 검찬관이 대신 항소를 해서 2심에서 15년 형으로 감형되었습니다. 그 사연을 자세히 들어서 알고 있는 그가 교도과장 면담 신청을 하고 자기도 안구를 기증하겠다고 서약합니다. 실낱같은 기대였습니다. 그 이후로 맹인 전도사 한 사람이 케이크를 사 가지고 매주 일요일마다 군목과 함께 1동8호 감당으로 찾아왔습니다. 아마 군목을 통해서 안구 기증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 케이크는 우리도 여러 번 먹었습니다. 먹으면서도 기분이 께름칙했습니다. 전도사는 눈을 원하고 그는 혹시나 감형이 되기를 원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어느 날 교도과장이 그를 불렀습니다. "너 그 전도사한테 눈 준다고 했어?" "안 했어요" "절대 준다고 하지 마. 월남전에서 실명한 병사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의 낙담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한 가닥 희망마저 사라진 것이니 마찬가지였습니다. '틀림없이 죽는구나' 그는 무척 살고 싶어했습니다. 떠난 애인을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다고 해서 군검찰이 부산에 가서 그녀을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그 광경을 보지 못했지만 법정 공판 때 만나게 해 주었습니다. 둘이 껴안고 얼마나 울었던지 눈이 퉁퉁 부어서 돌아왔습니다. 아저씨랑 살림 차렸다는 것은 헛소문이었다고 했습니다.후회 막심했습니다. 결국 그는 사형 집행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를 잊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남한산성 교도소는 목욕탕이 주벽 바깥에 있었습니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새봄이 왔을 때입니다. 주벽에 딸린 쪽문을 통해서 일렬로 죽 늘어서서 맨발로 목욕장으로 향했습니다. 쪽문을 나서자 시야가 멀리 열리면서 푸른 보리밭이 무연히 펼쳐져 있었습니다, 바깥은 벌써 봄이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등 뒤에서 갑자기 내 허리를 껴안으면서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신 중위님, 나 진짜 살고 싶어요!” 그였습니다. ‘푸른 보리밭’은 지금도 내게는 그때의 기억과 함께 ‘생명’의 벌판입니다.
남한산성 육군교도소는 ~ 어느 것 하나 충격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내가 전기고문을 당하다 쓰러진 적이 있습니다. 간신히 정신이 들었을 때입니다. 취조관이 의무실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의료 처치치를 요청하려나 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게 아니었습니다. 아침에 우리 집 애 감기약 부탁했는데 그걸 퇴근하기 전에 내 책상에 갖다 놓으라는 전화였어요. '남의 아들에 대한 전기 고문과 자기 딸의 감기약', 그 극적 대비는 차라리 슬픈 것이었습니다. '나는 절대 결혼하지 않아야지, 저 지독한 가족 이기주의를 난들 어떻게 할 거야' 인간에 대한 실망이었습니다. 권력의 오만함과 잔혹함에 이어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마저 포기해 갔던 절망의 나날이었습니다.
그러나 남한산성에서 남산 취조 현장의 경험을 서로 이야기하다가 놀랍게도 '감기약'이 연출된 수사 기법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다른 사람 역시 비슷한 경험을 토로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더 큰 충격이었습니다. 스스로를 냉혹한 인간으로 연출함으로써 피의자를 몸서리치게 하는 수사 기법은 한 인간에 대한 절망을 넘어서 정치권력 그 자체에 대한 소름끼치는 공포였습니다. 남한산성은 이러한 절망의 끝 부분에 놓여 있습니다.
밤중에 찬 마룻바닥에 엎드려 청구회 추억을 또박또박 휴지에 적고 있는 동안만은 이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청구회 추억은 그 절망의 작은 창문이었습니다. 옥방의 침통한 어둠으로부터 진달래꽃처럼 화사한 서오릉으로 걸어 나오는 구원의 시간이었습니다.
나는 남한산성과 청구회 추억을 뒤로 하고 무기징역형을 시작합니다. 후에 나의 수형 생활을 ‘나의 대학 시절’이라고 술회하고 있지만 그것이 나의 대학 시절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무기징역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기만을 바라던 사형수가 막상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나서 자살하기도 합니다. 약 30여 개 항으로 되어 있는 '재소자 준수사항' 중에 상당히 앞쪽 순위에 재소자는 자살을 해서는 안 된다는 항목이 있습니다. 무기징역을 시작하면서 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동굴로 들어서는 막막함에 죄절했습니다. ~ 암담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차라리 잘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선 이 어둠 속에서는 모든 것을 잊을 수 있겠다는 체념이 마음을 편하게 했습니다. 한 가지 다행스러웠던 것은 우리 시대의 감추어진 칼을 미리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은 소멸의 세월과 대결하는 한 조각 철편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훨씬 후에 알게 되지만 세상의 모든 소멸은 결코 소멸되지 않는 것을 함께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청구회 추억>을 함께 읽으면서 느끼는 감회가 새롭습니다. 우리가 추억을 불러오는 이유는 아름다운 추억 하나가 안겨 주는 위로와 정화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청구회 추억>과 함께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처럼 작은 추억의 따뜻함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작은 추억에 인색하지 말아야 하는 까닭은 추억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뜻밖의 밤길에서 만나 다정한 길동무가 되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추억은 과거로의 여행이 아닙니다. 같은 추억이라도 늘 새롭게 만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청구회 추억> 후기는 다음과 같이 끝납니다.
우리의 삶은 수많은 추억으로 이루어져 있음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모든 추억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를 만나는 곳은 언제나 현재의 길목이기 때문이며, 과거의 현재애 대한 위력은 현재가 재구성하는 과거의 의미에 의하여 제한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더구나 추억은 옛 친구의 변한 얼굴처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것이 추억의 생환이란 사실을 훨씬 나중에야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생각하면 우리가 영위하는 하루하루의 삶 역시 명멸하는 추억의 미로 속으로 묻혀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추억에 연연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추억은 화석 같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부단히 성장하는 살아 있는 생명체이며, 언제나 새로운 만남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이 책 역시 추억을 새롭게 만나고 있는 것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담론 pp 205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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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애닯고 아련한 <청구회 추억> , 속의 아이들이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