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방울처럼 갈잎처럼 / 이경수
도톰해진 봄 햇살에 뜰이 기지개를 폈다. 사람들도 창문을 열고 가슴을 내밀었다. 그러다 아예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여섯 살짜리 손녀가 할아버지 손을 잡고 뒷동산에 갔다 오겠다며 손을 흔들었다. 두어 시간이 지나자 차가운 산바람에 얼굴이 발개진 아이가 할아버지랑 들어왔다.
아이의 언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추었지?” 하니
“아니” 하며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뭐야?”
“응, 할머니가 좋아하는 거.”
솔방울 두 개다.
뒤따라 들어온 남편이 조금 상기된 목소리로 설명을 했다. 솔밭을 지나는데 이아가 갑자기 뛰어가기에 뒤쫓아 가보니, 할머니에게 선물할 거라며 솔방울을 줍고 있더라는 것이다.
나는 얼른 받아들고 “이렇게 예쁜 솔방울은 처음 보네. 고마워.” 했다. 그리고 솔방울과 어울릴 작은 소쿠리을 찾아 담아놓고는 눈에 잘 뛰는 자리에 놓았다. ‘네가 준 것이라면 할머니는 무엇이든 소중하게 여길 거야.’라는 무언의 아부인 것이다.
“할머니, 할머니, 내가 반짝거리는 예뿐 목걸이도 사 주고 핑크색 예쁜 가방도 사 줄게.” 하던 아이가 솔방울을 주워 와서 선물이라고 주다니. ‘요것이 할미를 어떻게 보고.’하며 아이 눈에 비친 내 모습을 잠깐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솔방울 주워 들고 온 작은 가슴과 손을 어찌 의심할 수 있을까.
그때도 그랬다. 붓글씨를 배우러 다닐 때였다. 어느 날 아침 교실에 들어서는 나에게 K가 “가을 선물이에요.” 하며 검은 비닐봉지를 불쑥 내밀었다. 봉지에서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을 들여다보니 노르스름한 갈잎이 잔뜩 들어 있다. “정말 가을이 들어있네요.” 하며 좋아하자 옆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와서 봉지 안을 들여다보았다. 피식 웃으며 돌아서는 그들은 하나도 부러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나는 갈잎이 들어 있는 비닐봉지를 들고 와 탁자 위에 쏟아놓았다. 무심한 빛깔로 무심한 냄새로 다가오는 갈잎을 이리저리 건드리며 ‘어째서 이런 걸 내게 주었을까?’ 하고 중얼거렸다. 갈잎이 발끈했는지 바스락바스락 대꾸를 했다. ‘왜겠어. 갈잎과 어울린다고 생각했겠지. 아니면 허물없다 여기고 그냥 주었거나.’ 하지만 나는 ‘아니야 나의 이미지가 순정해서일 거야.’ 하며 착각 아닌 착각을 해보기도 했던 것이다.
그는 아침 산책길에 정갈하게 깔린 갈잎을 보았다. 그것을 보는 순간 누군가에게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길가에 버려진 비닐봉지가 눈에 띄었다. 산책을 함께하던 사람의 핀잔을 들어가며 한 잎 한 잎 주워 담아 들고 왔다.
그는 치장하지 않는 사람이다. 겉치장도 속치장도 하지 않는, 있는 그대로 드러나면 드러나는 대로, 숨기거나 속이려하지 않는 사람이다. 아니 그렇게 살아가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주는 것이다. 포장이나 내용 따위에 시비할 게 아니었다.
가슴 설레는 기억이다. 그때 나는 그 갈잎들을 국어사전 갈피에 끼워 넣고 나머지는 대나무 바구니에 담아 겨우내 곁에 두고 지냈다.
국어사전을 찾아 혹시나 하고 책장을 넘기니 바짝 마른 갈잎이 나온다. 반갑다. 갈잎은 이렇게 그때 그 모습으로 남아서 그와 나의 인연을 이어 주는 것일까. 조심스럽게 사전을 덮는다.
그가 언제부터인가 “고맙다” 라는 말을 해온다. 나 또한 그에게 “고맙다”라고 답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좋은 인연이 이어지고 있는 것에 대한 고마움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이런저런 일로 절뚝거리는 심사를 이야기하며 속내를 다독이곤 한다. 그리곤 서로에게 또 “고마워. 애썼다.”라고 말한다.
때로는 작고 소박한 것이 사람을 설레게 하여 그 연을 길게 이어준다. 말(言語)도 그렇고 선물도 그렇다. 그것은 바라는 것이 없이 꾸미지 않고, 그래서 되레 진심을 느낄 수 있으며, 마음은 본래 욕심을 부리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솔방울을 닮은 아이는 하늘이 나에게 준 가없는 선물이다. 그가 준 갈잎은 또 다른 선물이 되어 다가온다. 나도 누군가에게 솔방울처럼 갈잎처럼 소박한 선물이기를 감히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