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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정체성과 사명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고전 9:1-2)
고린도 교회에 대한 바울 사도의 편지는 읽을수록 마음이 아플 때가 많습니다. 바울 사도의 전도와 양육을 통하여 오늘까지 살아온 고린도 교회에는 바울 사도의 사도권을 거부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예수님의 직접적인 제자가 아니라고 하고, 사도가 아니기 때문에 보수를 받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2절에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 몰라도, 여러분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 됨을 주안에서 인친 것이 바로 너희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의 존재 자체가 바울이 사도임을 인친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주장합니다.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그는 복음을 영접한 후 율법주의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또 그는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행 9:3). 그리고 주 안에서 열심히 일한 결과로 고린도 교회가 서게 되었습니다.
3절 이하에서 그는 자기에게 사도의 권리가 있지만 그 권리를 다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손으로 일하며 교회에는 짐을 지우지 아니하려고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목회자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의무에 대해서는 구약성경은 물론 예수님의 말씀까지 들려주면서 가르쳤습니다. 모든 교회는 주와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는 전임 사역자들의 생활을 보장해 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사역자들은 자기 생활에 매이지 않고 전적으로 교회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것도 힘주어 가르쳤습니다.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첫째는 정체성에 대한 것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정체성에 따르는 책임입니다. 달리 말하면 자기 신분에 따른 책임과 의무입니다.
사도는 사도의 위치에서 받은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을 잘하면 “내가 사도가 아니냐?”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목회자는 목회자의 위치에서 받은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을 잘 감당하면 교인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고, 주님 앞에서도 기쁜 마음으로 찬송을 드릴 것입니다. 가정에서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가지는 권리와 짊어지는 책임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가지는 권리와 짊어지는 책임이 있습니다. 교수와 교사는 학교에서 교수와 교사로서 가지는 권리와 짊어지는 책임이 있습니다. 정치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국회의원들은 국회의원으로서 가지는 권리와 짊어지는 책임이 있습니다. 법조계의 판검사들도 가지는 권리와 짊어지는 책임이 있습니다. 행정부의 공무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아가 의사는 의사로서, 과학자는 과학자로서, 기업인은 기업인으로서 가지는 권리와 짊어지는 책임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가르치는 죄들이 무엇입니까? 자기 위치에서 자기의 권리는 지나치게 주장하면서 자기의 의무 혹은 책임은 내던지는 결과라고 말해도 될 것 같습니다. 왕이 된 자가 왕의 권리의 한계를 넘어서서 백성들로부터 자기의 유익을 빼어내거나 백성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제사장이나 선지자들 가운데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으며, 장로들이나 부자들 가운데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의 예언서들을 읽으면 심지어 나라가 위태로운 때에도 지배층에 있던 사람들은 약자들을 괴롭히고, 그들의 생명과 재산을 빼앗으려고 애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성경을 배우며 하나님을 믿노라고 하는 사람들, 안식일에는 예배를 드린다고 하며, 절기를 지킨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슬픔과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오늘날 기업하는 사람들이 노동자들의 수고로부터 부당한 이익을 가져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이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가 하면 의사들이 불필요한 수술을 권하고, 과잉 진료를 유도하며, 치료 기간을 길게 만든다는 말도 듣습니다. 환자를 사랑하고 그 생명을 위하여 헌신하는 좋은 의사들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떤 의사들은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자기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고 생각해도 틀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최근에 마음이 착잡했던 사실은 판검사들이 정치와 너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자기의 양심과 법의 근본정신을 저버리고, 선입견에 의한 정치적인 판결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대학 교수들이나 유명한 언론인들이 정치에서 학문적, 혹은 양심적 중립을 지키지 않고, 자기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서 완전히 기울어진 주장만 하고, 상대방은 철저히 무시한다는 것을 전 세계에서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과학자들이 의약계와 연결되어서 이상한 실험을 하고, 편파적인 논문을 쓰고, 정치가들과 연결되어서 왜곡된 주장을 사실처럼 선전한다는 말도 들립니다.
(그래서 말하기 싫은 표현이지만 “네가 교사냐? 네가 목사냐? 네가 의사냐? 네가 판사냐? 네가 국회의원이냐? 네가 장관이냐? 라는 말들이 나오고, 더 심한 말까지 나온다고 할 것입니다.)
세계에서 ‘부정선거’라는 말이 많이 들리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나라마다 분명히 ‘선관위’가 있는데, 사실은 그 선관위가 앞장서서 부정선거를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여러 나라에 ‘인권위’가 있는데, 그들은 오히려 정상인들의 인권을 유린하고, 범죄자들의 인권을 옹호하는 일을 많이 합니다. 어느 나라에는 ‘**진실규명위원회’가 있는데 그들이 말하는 진실은 자기네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만 받아들여지고, 자기네들의 주장과 반대되는 것은 아무리 진실이더라도 묵살되고, 거짓으로 간주됩니다. 이런 것들도 정체성과 그에 따르는 책임 혹은 의무와 관련하여 생각할 때에 심히 안타깝고 착잡한 마음을 갖게 해 줍니다.
성경에는 “내가 누구관대”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는 목자로 80세가 된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라고 질문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며,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낼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위치에서 겸손히 “내가 누구관대”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나중에 하나님께 순종하여 큰 사명을 잘 감당하였지만 이 부름의 시간에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대단히 무력한 자라고 제대로 이해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그는 미디안이라는 학교에서 겸손의 덕을 배웠던 것이다”(Keil). 한편 또한 이 말은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바로에 대한 모세의 두려움과 의기소침을 반영한 탄식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철저히 자아를 부인하는 자를 들어 귀하게 쓰시는 역설적 방법을 많이 사용하십니다(욥 5:11 낮은 자를 높이 드시고 애곡하는 자를 일으키사 구원에 이르게 하시느니라).
바울 사도는 자신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9-10)
그가 고린도 교회에 보낸 이 편지에서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1-2)라고 쓴 것을 기억하게 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정치가나 종교인이나, 과학자나, 의사나 판검사나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의 정체성을 확실히 하고, 그에 따른 권리를 주장함과 동시에 책임과 의무를 다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자기의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한다면 우리나라가 얼마나 좋은 나라가 되고, 자신은 사랑과 존경을 받게 될까요? 사실 그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모든 것을 심판하신다는 것을 알고 믿는 사람이라야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자기의 모든 행위에 대하여 자신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역사에 대하여 책임을 지게 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진다는 의식이 없다면, 누구라도 자기의 유익 혹은 자기편의 유익을 위하여 정당한 권리 이상을 사용하고, 정당한 책임은 회피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막강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겪은 일(좀 길지만 인용합니다.)을 기억하기를 소원합니다. 제발 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고 자신을 돌아보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심판하시는 분이심을 기억하기를 소원합니다.
“왕께서 보신 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높이는 하늘에 닿았으니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먹을 것이 될 만하고 들짐승은 그 아래에 살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었나이다. 왕이여, 이 나무는 곧 왕이시라. 이는 왕이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창대하사 하늘에 닿으시며 권세는 땅 끝까지 미치심이니이다. 왕이 보신즉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이르기를 ‘그 나무를 베어 없애라. 그러나 그 뿌리의 그루터기는 땅에 남겨 두고 쇠와 놋줄로 동이고 그것을 들 풀 가운데에 두라.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고 또 들짐승들과 더불어 제 몫을 얻으며 일곱 때를 지내리라’ 하였나이다. 왕이여, 그 해석은 이러하니이다. 곧 지극히 높으신 이가 명령하신 것이 내 주 왕에게 미칠 것이라.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 그 때에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다. 또 그들이 ‘그 나무뿌리의 그루터기를 남겨 두라’ 하였은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 그런즉 왕이여, 내가 아뢰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다 나 느부갓네살 왕에게 임하였느니라. 열두 달이 지난 후에 내가 바벨론 왕궁 지붕에서 거닐새 나 왕이 말하여 이르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이 말이 아직도 나 왕의 입에 있을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내려 이르되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왕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하더라. 바로 그 때에 이 일이 나 느부갓네살에게 응하므로 내가 사람에게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이 독수리 털과 같이 자랐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이 되었더라.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고 경배하였나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 그 때에 내 총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내 나라의 영광에 대하여도 내 위엄과 광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나의 모사들과 관원들이 내게 찾아오니 내가 내 나라에서 다시 세움을 받고 또 지극한 위세가 내게 더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은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경배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라”(단 4:20-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