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페셜 프로그램에 많이 관여도 했기 때문에, 이 프로그램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 좀 꺼려지기는 합니다만,
이 프로그램은 중요한 문제를 지나치고 있습니다.
발해가 등주를 공격한 것이, 아주 대단한 사건이라고 생각하고, 첫 해외원정이라고 뻥치는데, 이건 좀 아니라고 봅니다.
백제가 먼저이니까, 첫 해외원정은 아닌 것이고.
더 중요한 문제는 발해가 왜 등주와 마도산을 공격한 후에, 철군을 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너무 소홀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대당강경책을 내건 무왕이 마도산 전투 이후부터는 당나라에 대해서 유화정책을 펼칩니다. 사신도 보내고.
그리고 무왕의 아들인 문왕은 철저하게 당나라와 친하게 지내는 정책, 다시 말해 대문예가 주장한 정책을 따릅니다.
왜 그럴까요?
발해가 당나라를 공격할 무렵에, 돌궐과 거란의 움직임을 주목하면 답이 쉽게 나옵니다.
등주를 공격할 때와, 마도산 전투 이후의 차이는 당나라가 거란에 대한 지배력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발해는 당나라가 거란을 제압하고, 직접적 위협이 될 상황이 되자 타협을 한 것입니다.
발해는 이때 당나라의 힘을 보고 적절하게 전쟁을 중지시켰습니다. 이것이 발해가 당나라와 대전쟁을 하지 않은 이유입니다. 이것은 아주 현명한 정책이었습니다. 발해는 이때 당나라로 부터 얻은 것과 얻지 못한 것이 분명하게 있었습니다. 당나라도 발해에 대해 강요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고, 양국은 이를 바탕으로 안정적인 국제정세를 유지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을 모르고, 무조건 우리가 쳐들어간 것만이 최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국제정세는 시시각각 변하는데, 현재 우리 스스로가 너무 고지식하게 쳐들어가고, 승리하고, 이것만을 과장해서 역사 해석을 치우치게 보는 것이 그것이 문제입니다.
첫댓글 저도 등주 습격 사건이 발해사의 흐름과 단층을 지닌채 홀로 부각되는 것을 바람직하게 바라보지 않아, 이 글의 논지에 공감합니다. 그런데, 사소한 부분이긴 합니다만...백제가 요서,산동 등 중국 대륙 방면으로 진출했는지는 그 사실 여부 조차 매우 불확실합니다. 오히려 발해의 경우는 사실에 의심의 여지가 없고 그 경위 또한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백제는 비교 대상으로 부적절하지 않을까요?
제 생각은 와카타케루님과는 조금 다릅니다. 제가 책을 통해 접한 백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한강을 중심으로 한 작은나라 백제가 아닌, 산둥반도을 지배했던 백제(백개의 제국을 다스린 나라)입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너무 식민사관이나 서양식 역사고증으로 보려고만 하는 시각이 우리나라 고대부터 내려오는 역사서를 위서로 취급해버리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이 카페에서 만큼은 민족고유의 역사서(단군고사 등등)를 집중해 조명했으면 좋겠네요.
지금까지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글쎄요...ㅎㅎ 제국이 황제국이던 여러나라이던 백제의 濟자와는 한자가 다릅니다. 그리고 언급하신 역사서가 고대부터 내려오는게 아니라, 근대에 쓰여진 책을 고대의 것이라 우겨서 위서 취급 받는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이 카페는 '민족고유의 역사서'를 조명하는 것을 금지하지는 않습니다만, 이미 충분히 반박 논지를 갖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조명을 시도하면 반박 견해가 들어오기 때문에 '집중'까지는 어려워지지요.ㅎ 구리넷같은 곳에서는 집중이 가능합니다만...
선생님 말씀의 의도는 충분히 공감이 갑니다. 역스에서 등주와 마도산 전투를 다룬다면 그 이후 정책의 변화까지 언급해야 균형이 맞는 것이죠. 오로지 등주공격만 다뤘다는 것은 그 의도 뻔하죠. 바람직하지도 않고... 그런데 한편으로 등주공격 사건은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문예의 주장처럼,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상대와의 전쟁에서 일시적으로 당을 위협하고 실제로도 큰 피해를 입혔으니 말입니다. 그 영향으로 당은 신라에 도움을 청해야 했고, 또한 그 후에 발해가 당과 화친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발해의 위협이 없는 상태였다면 그처럼 상당히 대등한 위치에서 수월하게 화친할 수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선생님께서 '백제의 해외원정'을 이토록 직접적으로 언급하신 경우가 없었던것 같은데...무슨 의미가 있는건지 궁금하긴 하네요. 개인적으로는 수많은 주장 가운데, 왜가 소위 백제의 용병으로서 활동했듯이 백제가 남조의 용병으로서 요서,산동 등에서 활동했다는 썰이 가장 타당하지 않은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백제 해외원정은 그 성격을 어떻게 보느냐는 논란이 될 수 있으나, 남제서에 기록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해야 합니다. 또 하나 수양제가 고구려에 보낸 조서에서, 고구려가 수나라 해군 기지들을 습격한 일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역시 해외원정에 해당되지요. 이를 방증하는 증거도 있고, 또 발해의 등주 공격보다 먼저 고구려가 등주를 공격했다는 이야기가 등주 지방에서 전해오기도 합니다. 이와 관련된 전설도 많고. 그런데 맨날 장문휴 등주공격만을 강조하다 보니, 그 이전의 역사를 무시하고, 모르고 지나가고 있는 것이 아쉬울 뿐이지요.
전설 등은 차치하고라도, 고구려가 수나라 해군기지를 공격했다는 조서의 내용은 발해의 등주공격 보다도 확실히 덜 알려져 있는것 같습니다. 발해사를 강조할 때에, 등주공격과 고구려영토의 1.5배라는 이야기가 꼭 등장하던데, 전 후자에 대해서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나다. 고구려가 흑수부근이나 부여의 북쪽 지역을 통치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얘기하면, 혹자는 거기서 얻어먹을게 뭐 있기에 거기까지 기어올라가냐면서 발해의 영역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더군요.
발해가 그러한 지역들을 통치할 수 있었다면, 주변세력에 대한 통제가 더욱 확고했던 고구려 또한 그 지역에 대한 통치를 했었을 것아라는 점은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설사 발해 영토가 더 넓었더라도 문명의 높은 수준을 영위할 수 있는 기반이 되는 평양과 요동에 대한 지배가 불분명한 영토 넓이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다만 부족한 발해사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의미가 큰것 같습니다.
음...그런데 수나라 해군 기지를 습격한 사건을 '방증하는 증거'란 무엇인지 궁금하네요. '증거'에 대해선 기억을 더듬어봐도 들어본적이 없는것 같은데...여쭤봐도 '영업상 비밀'이라 온라인상에선 말씀해주시진 않을것 같아요.^^;;
수양제의 조서에 고구려가 거란의 무리와 함께 바다 수비병들을 죽였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게 확실히 주목받지 못하는것 같습니다. 신채호가 조선상고사에서 고구려가 거란 병사를 이끌고 산동 반도를 습격했다고 한 것과 연결되는 듯한 느낌입니다. 여하간 등주 공격을 최초의 '해외'원정이라며 강조하는 것이 아쉽다는 점에 동감입니다. 이전에도 외국 원정은 수차례 있었는데 단지 최초로 바다밖으로 나갔다고 해서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대규모 원정도 아니였구요.
흑수말갈이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었다는 기록도 그렇고, 확실히 저도 고구려가 아무르강 유역에 대해서 직/간접적 지배를 했다고 봅니다. 발해보다는 정도가 약할지 모르겠습니다만... 더불어 발해 영역이 동북으로 광범위해서 고구려보다 조금 넓다는 것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고구려의 중심이였지만 발해는 중점적으로 경영하지 않은 요동,평양 지방은 한사군 전후부터 중국 선진 문화에 강하게 물든 곳으로써, 동굴속에서 살며 낮은 수준의 문화를 가지고 있던 흑수말갈인들보다 훨씬 월등하지요.
여기서 방증이란 말은 폭넓게 정황상 그럴 가능성이 높음을 보여주는 자료들을 뜻으로 사용했습니다. 당시 수, 당 시기의 전쟁 상황에서 고구려가 발해만 일대의 수, 당의 해군기지를 사용했기에, 두 나라가 이에 대비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방증할 자료가 있다고 한 것이고, 이것을 설명하려면 역시 무지 길게 써야 하니까, 여기서는 더 언급하지 않는 것이지요.
발해의 등주공격당시 장문휴장군이 이끄는 2만의 병력은 수군의 힘을 빌렸습니다.그런데 통설대로라면 당시 발해의 남경남해부는 함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2만의 병력을 당시의 병선으로 수송할려면 한반도를 한바퀴 돌아 서한만을 거쳐서 발해를 횡단하여야 하는데 이게 가능하다는 얘기일까요? 그리고 이 사건 이후로 이어지는 신라수군의 활동은 산동반도의 동북쪽 해안이 되는데 이때의 신라 성덕대왕은 당나라의 영해군사라는 직책을 하나더 갖게됩니다.당시 적극적으로 발해와 당나라 사이에 끼어든 신라의 활동을 면밀히 검토한다면 잘못된 발해와 신라의 영역이 밝혀질것입니다.이성적인 토론이 되길 제안합니다.
꼭 군대를 수도에서 출전시켜야 하는 법은 없잖아요. 역스를 인용한 본문에서 박작성을 언급하고 있는데...좀 착각하신듯.
남경 남해부는(南京南海府)는 발해의 수도가 아닙니다.수군병력을 총괄하는 중심이지요.때문에 함흥의 남경남해부설로는 등주공격이 불가능하다는 얘기지요.역스의 주장대로 박작성을 병력의 출발지로 지적하였다면 적어도 수백척의 함정을 무리없이 기항시키고 운항하기엔 현 호산장성인 박작성은 불가능하다는 얘기입니다.따라서 박작성의 위치를 지금의 호산장성으로 가설하는 문제도 재검토가 요구되는 사항입니다.
발해의 남경 남해부가 한반도 함흥이라...
근거가 무엇인가요?
발해의 동경용원부가 종성이나 함흥이고, 이 함흥도 한반도 동해안의 함흥이 아닙니다.
요사 지리지 동경도 해주 임명현은 발해 남경 남해부라 기록되어 있지요. 고구려 당시 사비성이 있는 지역이고 후한 시에는 안평 그리고 전한 시에는 낙랑군 해명현, 또 우거 조선 시에는 열구가 있는 곳이지요. 또 금 박색부이고 청 장하직예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