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는 다른 문화에
적응하셨다. 우리도
그렇게 할 의지가
있어야 한다.
(연중제23주일2024.9,8강론)
이사35:4-7; 야고2:1-5; 마르7:31-37
오늘의 복을 말씀 이야기에서
예수께서는 이교도 지역에
계시는데, 마르코 복음 사가는
우리를 위하여 예수께서
그 지역에서 행하셨던 치유에
대한 매혹적인 설명을 기록해
주셨습니다.
바로 언어장애를 가진
청각장애인의 경우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사람을 조용한
한 쪽으로 데리고 가셔서 손가락을
그 사람의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 사람의 혀에 손을
대십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하여 한숨을
내쉬신 다음 무어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그 말씀은 마르코
복음 사가와 함께 있던
청중들에게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말씀을 하시자 그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이 치유됩니다.
마태오나 루카 복음 말씀에는
기록되지 않은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들은 놀랍게도 당대 이교도
세계에서는 흔히 볼 수 있었던
마법 치유에 대한 설명과 비슷합니다.
그러한 유사성이 바로 다른 복음
사가들이 그 내용을 생략한 사실을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모든 내용에서 우리가
얻어 가질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어찌하여 예수께서는 그 지역의
사람들에게 친숙했을 특정한 관습적인
치유 방법들을 채택하심으로써
그 지역 문화에 스스로를 수용하실까요?
복음 말씀에서 이와 같은 예수님의
수용에 대한 다른 예를 찾아볼 수가
있을까요?
실질적으로 예수께서는 듣는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메시지를 금방
잘 알아듣게 해주시기 위하여 끊임없이
그 문화에 적용하시는 방법을
시용하셨습니다.
많은 비유 말씀들은 어떻게 예수께서
농업, 또는 가정 생활에서 친숙한
이미지들을 취하시는 지에 대한
놀라운 예들을 제공하는데, 이를
테면, 농부가 그의 씨를 뿌리기 위해
들로 나가거나, 주부가 귀한 동전을
엉뚱한 데다 잘못 놓고 애태우며
찾는 등의 이미지들을 당신의
가르치심을 설명하시는데
사용하십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예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경험에
적응시켜서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해주시는 말씀을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도록 해 주십니다.
즉 그렇게 말씀해 주심으로 인하여
그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자기네 자신의 문화에 있는
친숙한 개념들과 이미지들과 쉽게
연관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다른 예는 동방 박사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즉 동방의
천문학자들이 예루살렘의 갓난 예수
아기를 방문한 이야기로 – 마태오
복음 말씀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동방 문화 출신의 초기 그리스도교
교인들은 쉽게 현자들과 자기네들을
동일시했을 것이고, 그런 방식으로,
그 사람들이 찾고 있던 메시아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수용을
표현하기 위해 최근 수십 년 동안에
단어 하나가 형성되었습니다
– 바로 “문화화(文化化) 혹은,
문화적응(文化適應) inculturation”
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문화화 혹은 문화적응”
이라는 용어는 종종 “육화(肉化),
화신(化身), incarnation” 이라는
용어와 관련이 있습니다.
달리 말씀을 드려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들 중 하나가 되셔서,
사람의 몸과 사람의 살을
취하심으로써, 우리에게 가까이
오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만약 복음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서
이질적인 것으로 남아 있지
않으려면, 세계의 다양한 문화에서도
복음 이 “살을 취해야” 합니다.
그렇게 그 문화에 맞는 살을 취하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주요한 도전이
됩니다. 그 문화에 맞는 “살을
취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장애물은
복음 말씀이 비록 동양에서
유래되기는 했지만, 수 세기 동안
서양 문화에서 살을 찌우고
꽃피웠다는 사실이 됩니다.
선교사들은 전통적으로 복음 말씀을
서양 문화의 옷으로 포장하여
사람들 앞에 내놓아 왔습니다.
선교사들의 그러한 선교 방식은,
예를 들어, 동양과 아프리카의
교회에서 서양 건축과 예술 작품을
사용하거나, 현지 문화와 관련이
없는 예배 스타일을 부과하는 결과를
낳게 해주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전례에서
라틴어 대신 현지언어 사용에
대한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문화의
방향으로 적응시키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을 통하여
드러나 보이는 예수님의 행위는
종종 우리의 방식이 최선의 방식이며,
다른 사람들은 그저 우리의 방식에
순응해야 한다고 믿는 것에 대한
반성을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자신과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을
이해하시기 위해 실질적으로 자신의
행동 양식을 그 다른 문화의 양식에
적응시키시는 모습과 마주하게 됩니다.
가끔 가다가 “문화 제국주의”라고
불리는 것은 식민지 시대가
지나가면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때때로 그러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위해 스페인이나
베트남어로 미사를 집전하는 것에
대해 원망을 듣기도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 문화에서
비롯된 표현들을 사용하여 우리
자신의 본당 미사가 우리 언어로
거행되는 것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 지를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해,
아마도 일부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
위해서라도 넓은 관념을
취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첫댓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건강하세요
내용이 어렵네요😊
감사합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신부님♡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아멘.감사합니다
감사 합니다
신부님~
감사드림니다~~♥︎
신부님 !
추석명절 행복하게 보내세요.
찬미예수님!
아멘.🙏
감사합니다
신부님늘감사합니다 오늘도주님과함께건강하시고행복하세요
아멘!
이천년의 시대를 초월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정말 놀랍고 멋지십니다 알렐루야!!
문화의 다양성 가운데 살아가는 저희들에게 필요한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부님!
신부님, 저 요번 추석명절때 피정가려고 하는데 괜찮을까요? 추석연휴가 어려우면 이번주 주말.토.일 이렇게 가고 싶어요
문경에 가면 제 믿음이 좀 더 단단해질것같아요
아직도 불안함은 약간 있지만 피정의 집에 가서 제 믿음을 시험해보고 싶기도 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