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음악의 출발점은 중세 기독교가 융성했던 시기와 일치한다. 특히 1096년부터 시작된 십자군 전쟁은 서양(유럽) 음악의 정체성 형성에 기여하였다. 기독교의 최대 적수인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유럽 내 서로 다른 지역에서 모여든 기독교인들이 십자군의 깃발 아래 하나로 뭉치기 위해서는 기독교적인 권위와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의식(儀式)이 중요했는데, 이 때 음악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15세기 초반부터 18세기 중반까지의 르네쌍스와 바로크 시대에는 교회의 힘이 약화되고 왕권이 강화되면서 교회 중심의 음악이 궁정 중심의 음악으로 바뀌었다. 이런 흐름의 연장선에서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발명함으로써 악보의 보급이 쉬워짐에 따라 더 많은 작곡가와 연주자가 등장할 수 있었다. 교회와 궁중에서만 연주되던 음악도 점차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바로크는 ‘일그러진 진주’라는 뜻이다. 바로크 시대에는 궁중 안팎의 의상은 물론, 음악이나 미술 모두에 장식적인 요소가 많아지고 표현 기교도 다양해졌다.
그러다가 산업혁명이 시작된 18세기 중반에는 우리가 클래식 음악이라고 부르는 고전주의 음악이 탄생했다. 고전주의 시대에는 엄격한 질서가 중시되었다. 때마침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같은 성실하면서도 천재적인 작곡가들이 등장해 음악의 규칙, 법칙, 형식과 구조 등을 정립하고 집대성하면서 좋은 곡들을 많이 만들어 냈다.
굳건하던 음악적 질서는 19세기에 들어 도전을 받기 시작했다. 우선 엄격한 질서보다 개인의 감정과 정서를 중시하는 낭만주의 음악이 등장했다. 낭만주의 탄생의 중요한 계기는 18세기 말, 즉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이었다. 지금은 프랑스 혁명이 민주주의의 씨앗이었다고 칭송받지만, 19세기에는 사회 혼란의 원인으로서 부정적으로 여겨졌다. 혼탁해 보이는 사회가 안정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위해 많은 음악가가 엄격한 음율의 규칙에서 벗어나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음악을 만들어 제공했다.
19세기 들어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에서는 민족주의가 싹트기 시작했다. 1871년 독일과 이탈리아의 통일을 전후로 민족주의 음악에 대한 수요가 많아졌다. 그 이전의 시기에 유럽 음악의 중심은 오스트리아의 빈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음악에는 어떤 법칙이나 질서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배우려면 고전주의 음악의 발상지인 오스트리아 빈에 가서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많은 작곡가들이 오스트리아 빈으로 음악 유학을 가서 모차르트 흉내, 하이든 흉내를 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민족주의가 대두되자 사람들은 ‘중심지의 음악’이 아닌 ‘조국의 음악’, 또는 지역의 토속적인 음악, 남의 것이 아닌 나의 것에 주목하였고 이것이 새로운 민족주의 음악 사조를 발전시켰다.
현대음악은 고전주의 음악으로부터 탈피한 낭만주의 음악과 민족주의 음악으로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도 있지만 좀 더 본격적인 출발은 표현주의 음악부터라고 할 수 있다. 표현주의 음악이란 말 그대로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음악을 의미한다. 유럽인들은 1,2차 세계대전 이후 슬픔, 불안, 살아 있다는 안도감, 분노, 염세적인 감정들을 복합적으로 느꼈다. 작곡가들은 이런 복잡한 감정을 음악적으로 표현하려고 시도했다. 그 시도는 아직까지도 진행형이다.
인간의 감정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할 뿐 아니라 모호하고 추상적이다. 게다가 음악도 추상적인 장르다. 미술이나 영화, 연극 등 다른 예술 장르와 비교해 볼 때 특히 그렇다. 따라서 복잡하고 추상적인 인간의 감정을 추상적인 음악으로 표현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작곡가가 어떤 기발한 음악으로 인간의 감정을 표현했다 하더라도 관객들은 전혀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 아니 관객의 동의를 얻기 이전에 연주자를 설득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다. 작곡가가 자신이 발견한 어떤 소리와 아이디어를 연주자에게 대충 설명하고 그의 재량에 맡기면 전체적인 연주가 이상하게 흘러갈 수 있고, 작곡가의 의도 역시 제대로 구현되기 어렵다. 따라서 작곡가의 생각을 연주자에게 전달할 수 있는 치밀한 장치가 중요하다. (마치 영화 감독이 시나리오를 통해 배우의 구체적인 표정을 지시하고 특정 장면에 배경음악을 삽입하는 것과 비슷하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끝나지 않는 한 현대음악의 시도는 계속될 것이지만, 연주자를 설득하고 관객의 공감을 얻기 위해서는 갈 길이 아주 멀다. 문화체육부를 비롯하여 공공기관과 각종 기금의 지원이 중요하다.
대한민국 작곡상 최우수상을 받은 ‘소릿거리’와 최근 연주된 ‘재활용협주곡’은 재미있었지만, 생략. 이미지와 사운드를 텍스트로 옮긴다는 것이 역시 제게는 불가능한 작업임을 다시 한번 확인
(추신) 강의 잘 들었습니다. 현대음악과 현대미술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살펴보며 들었던 생각은, 현대예술가들이 추구하는 것은 고전주의(클래식)의 그늘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점입니다. 고전주의는 인간이 쌓아 올린 매우 중요한 업적입니다. 질서와 규칙은 아주 중요하고, 그것 때문에 우리는 살인자라든가 사기·협잡꾼들로부터 안전하게 살고(혹은 양육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어떤 규칙을 만들고 그것이 결국 모두에게 유리하다, 고 말하려 하는 것은 가부장을 포함한 모든 권력자들의 습성이고, 시간이 지나서 살펴보니 규칙과 그에 대한 신념 때문에 권력자를 제외한 다수의 유한 수명을 가진 사람들이 불행한 삶을 살았던 점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규칙으로 인해 새로운 유형의 살인자와 사기꾼이 등장하기도 했고요. 제국주의 시대와 1,2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세계관이나 규칙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미개인, 또는 악으로 만들던 자신들이 정작 그 규칙으로 인해 하나밖에 모르는 바보가 되었고, 악마가 되었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생각을 발견(혹은 발명)하고 대중적으로 전파한 것이 바로 인문학과 현대예술의 업적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몇 번의 강의로 현대예술을 이해하기는 어렵겠지만, 자신의 생각과 다른 것들에 대해 관대하신 분들, 권력보다는 인간과 인문학을 진심으로 사랑하시는 귀가쫑긋 여러분들의 응원과 격려 덕분에 무리한 모험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기회에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불안했던(?) 예술 시리즈는 이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