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이 초청한 시인_ 한보경 신작시>
그림자의 바깥
한보경
그러니까 여기가 그림자의 바깥이라는 거니
훔쳐온 이름들은 여기 다 모여 있네
여기에서, 그림자는 그림자의 이름으로
모든 걸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는데
하나의 장르가 된다는 건 실어의 시간을 견디고 만나는 세상
몰래 훔쳐온 이름들이 장르가 되고 그림자는
바깥을 갖게 되었다니
그냥 좀 억울한 것 같아
손탄 말들이 모여
하나의 장르가 되는 묘수의 무게를 나만 왜 몰랐을까
바깥마다 지나치게 많은 말들이 우글거려
의도 없이 저지른 외도인지
치밀하게 예측한 외도의 의도인지, 눈치 채지 못하게
그림자의 행각을 재보고
그림자의 농밀을 공평하게 톺아보는 버릇이 생겼어
하나의 장르가 되기 위해
그림자는 까마득한 거기에서 이름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이름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바깥을 향해
바깥이 아닌 바깥들을 겁 없이 쳐내고 바깥을 얻었다는 거지
그림자가 흘린 흙 묻은 이름 하나 훔쳐
무릎 속을 떠다니는 조각난 연골들이
굳어진 뼈의 바깥을 헤집도록
뭉개진 무릎걸음으로 그림자의 뒤를 밟고 다녀도
헛말 한 조각 버리지 못하는 나는 갈 수 없는
영원한 파라다이스
몰래 훔쳐온 것들이 일제히 말머리를 돌려 외면하는 거기
어쩌면 나의 바깥
아득히 먼 거기, 오래 전 묻고 오래 잊은 서러운 그림자들이
이름 모를 잡풀처럼
푸릇푸릇, 성성하게 자라나서
수상한 바깥을 키우는 거기
그래도 늘 그리운 거기, 그대로 황홀한 바깥
<시편이 초청한 시인_ 한보경 대표시>
노포동 2시
한보경
우리는 만나야 했어, 그날 노포동 2시는
삼각의 관계를 무너뜨릴 단단하게 뭉친 꼭지 같아서
xyz가 만나 한 점을 터트리기 딱 좋은, 최초의 좌표였거든
꼭지와 꼭지들은
가끔 뭉치는 걸 좋아해 꼭지인 걸 잊고서 꼭지를 뭉개고
공평무사한 관계가 되기도 하잖아
우리는 만나야 했어
팽팽한 삼각의 관계를 놓아버리고 각자의 방향이
한 곳으로 모이는 하나의 좌표에 대해 모를 리 없잖아
멀어질수록 빛이 될 거 같아
가까워지는 심장의 이적에는 반신반의하던 우리
삐뚤어진 왼쪽 젖꼭지로 꽁꽁 싸둔
푹 썩은 세 개의 심장을 아스러지게 뭉쳐 그날은
최초의 처음을 완성했을지 몰라
어느 쪽으로 기울지 않아 고요한 저울처럼 노포동 2시는
흔들리지 않고
꼼짝없이 평화로웠어
우리는 쉽게 도발하지 않고
머뭇거리고, 결코 후회하지 않으려고
늘 반성만 하고, 습관적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반복하고
들키고 싶지 않은 서툰 눈빛을 들키곤 해
최초와 최후는 1+1처럼, 여전히 나눌 수 없는 몫인 거니
이제 알 것 같지 않니
최후라는 것은 최초가 우리 가슴에 달아주고 달아난
절박한 훈장 같은 것이 아닐까
아득히 멀리 도망가서
돌아오지 않는 최초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중이야
노포동 2시처럼,
한보경 시인
2009년 《불교문예》 등단
시집 『덤, 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