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구轉求
청원기도는 우리가 가장 자연스럽게 바치는 기도일 것입니다. 아쉬울 때 우리는 쉽사리 하느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물론 우리의 기도가 이런 것에만 그쳐서는 안 됩니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께서 찾으시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되고자 한다면, 그리고 기도로써 하느님과 깊이 일치하길 원한다면 우리의 기도는 무엇보다도 찬미와 흠숭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청원기도와 전구는 그리스도인들이 당연히 바칠 수 있는 기도이며 성경도 이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청과 기도와 전구와 감사를 드리라고 권고합니다.”(1티모 2,1)
이와 비슷한 성경 구절을 얼마든지 인용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과 교회를 위해 가장 훌륭한 기도 학교라 할 수 있는 시편은 언제나 찬미 노래로 끝나긴 해도, 그 안에는 자기 자신이나 다른 이를 위해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이 장에서는 전구에 관해 몇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전구는 하느님에 대한 신뢰와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하는 기도 형태 가운데 하나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요한 14,13)
이 말씀은 우리가 이웃과 교회와 세상에 필요한 것을 하느님께 말씀드리도록 촉구합니다. 우리가 찬미드리고 자신을 봉헌하면서 이러한 청원을 드리는 것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역설했으나 우리가 아직 그 의미와 함축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세례받은 이들의 ‘보편사제직’을 온전히 실행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명을 묵상하기 위해 구약성경에 나오는 훌륭한 중개자들의 모습을 관상하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죄가 넘쳐나는 소돔이 멸망하는 것을 피하게 해줄 최소한의 의인의 숫자를 놓고 소돔 계곡에서 주님과 결사적으로 흥정합니다.(18,22-33)
또 모세 생애의 여러 일화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광야를 행진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아말렉(유다교에서 악의 화신입니다)의 공겨을 받았을 때의 일화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그의 부하들이 평야에서 싸우는 동안 모세는 언덕 꼭대기에서 아론과 후르의 부축을 받아 기도를 계속했는데 이때의 기도로 이스라엘은 승리합니다.
전구에 관한 구절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것은 아마도 백성들의 금송아지 숭배 이후에 드리는 모세의 전구일 것입니다.(탈출 32,1-14) 모세가 하느님께서 주신 증언판을 받기 위해 호렙 산에서 40일을 지내는 동안 백성들은 우상숭배의 죄와 거기서 나오는 다른 잘못(난투극과 방탕…)을 범합니다. 화가 난 주님은 모세에게 이 불충한 백성을 없애버리고 새로운 민족을 만들겠다고 하십니다.
「“어서 내려가거라. 네가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온 너의 백성이 타락하였다. 저들은 내가 명령한 길에서 빨리도 벗어나, 자기들을 위하여 수송아지 상을 부어 만들어 놓고서는 그것에 절하고 제사 지내며, ‘이스라엘아, 이분이 너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너의 신이시다.’ 하고 말한다.” 주님께서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 백성을 보니, 참으로 목이 뻣뻣한 백성이다.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마라. 그들에게 내 진노를 터뜨려 그들을 삼켭리게 하겠다. 그리고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32,7-10)」
모세는 다음과 같이 잘 정리된 논법으로 하느님을 진정시키고자 애씁니다.
「“주님, 어찌하여 당신께서는 큰 힘과 강한 손으로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당신의 백성에게 진노를 터뜨리십니까? 어찌하여 이집트인들이, ‘그가 이스라엘 자손들을 해치려고 이끌어 내서는, 산에서 죽여 땅에 하나도 남지 않게 해버렸구나.’ 하고 말하게 하시렵니까? 타오르는 진노를 푸시고 당신 백성에게 내리시려던 재앙을 거두어 주십시오. 당신 자신을 걸고, ‘너희 후손들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약속한 이 땅을 모두 너희 후손들에게 주어, 상속 재산으로 길이 차지하게 하겠다.’ 하며 맹세하신 당신의 종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이스라엘을 기억해 주십시오.” 그러자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내리겠다고 하신 재앙을 거두셨다.(32,11-14)」
라삐들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이 대화에는 마치 전구나 부부 사이의 다툼과 같은 특징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가 입을 열기 전에 “나를 말리지 마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부모들이 잘못을 저지른 자기 아이에 대해 서로서로 “당신 아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보세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 대화에서도 대화 당사자들은 잘못한 백성에 대해 “네가(당신이) 이집트에서 빼낸 너(당신)의 백성”이라고 서로서로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처음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하고자 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먼저 당신의 친구이자 종인 모세의 전구를 통하여 용서를 베풀고자 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인 예언자들에게 말씀하시지 않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십니다. 소돔을 멸하고자 할 때에도 “내가 앞으로 하려는 일을 어찌 아브라함에게 숨기랴?”(창세 18,17)와 같은 생각을 하십니다.
틸출기의 같은 장에서 모세는 더욱 비장한 태도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전구합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이 백성을 용서하지 않으시려거든 생명의 책에서 자신을 지워달라고까지 청합니다.
“모세가 주님께 돌아가서 아뢰었다. ‘아, 이 백성이 큰 죄를 지었습니다. 자신들을 위하여 금으로 신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시지 않으려거든, 당신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제발 저를 지워주십시오.’”(탈출 32,3-32)
모세는 하느님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만남의 장막 안에서 “주님께서는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말하듯,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하시곤”(탈출 33,11) 했습니다. 하느님과의 이 우정은 모세의 기도에 커다란 능력을 부여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같은 신성한 우정에 들어가도록 초대받았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주었기 때문이다.”(요한 15,15)
이 구절을 읽을 때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말씀을 하면서 아주 곤란한 처지에 놓이셨다는 생각을 이따금 합니다. 종에게는 거절할 수 있지만 친구에게는 거절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같은 우정에는 우리 쪽의 참된 충실성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의 바로 앞 구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요한 15,14)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우리 기도에 능력을 주기 위해 열린 아름다운 신비이며 환상적인 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서 하느님의 뜻을 행하도록 불리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의 생명이고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사랑하고 온전히 신뢰하는 분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은 큰 즐거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멋지게도 일방통행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뜻을 행하도록 요구하실 때 또한 우리의 뜻을 이루어 주길 바라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 허락하는 기쁨을 갖기를 바라십니다. 사막의 어떤 교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순종은 순종에 응답합니다. 만일 누군가가 하느님께 순종한다면 하느님께서는 그의 요구에 응답하십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는 죽기 얼마 전에 언제나처럼 단순하면서도 대담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늘에서 저의 뜻을 모두 이루어 주시리라 믿습니다. 저는 이 지상에서 제 뜻이라고는 어떤 것도 행하지 않았으니까요.a
첫댓글 아멘.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