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구회의 추억4(신영복)-문병
내가 이 청구용사들을 잊을 수 없는 일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1967년 2월 내가 수도육군병원에서 담낭절제수술을 받고 입원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그 달의 모임에 참석할 수 없노라는 사연을 간단히 엽서로 띄우면서 혹시라도 병원으로 문병 오지 않도록, 곧 퇴원하게 될 테니까 절대로 찾아오지 말 것을 부탁하였다. 그래서 그 꼬마들은 내가 퇴원할 때까지 다행히 병원에 오지 않았었다.
그러나 다음 달에 우리가 만났을 때 그들이 두 번이나 찾아왔다가 두 번 모두 위병소에서 거절당하였음을 알았다. 그것도 삶은 계란을 싸가지고 왔었단다. 더욱이 나이가 제일 어린 이규승이는 평소에 같이 걸어갈 때에도 내 팔에 매달리며 걸었는데 한 번은 저 혼자서 병원까지 왔다가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물론 삶은 계란은 자기들끼리 나누어 먹었겠지만 그들이 그렇게 벼르고 별렀던 서오릉 소풍 때에도 계란을 싸가지고 갈 수 없었던 가난한 형편을 생각하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문화동에서 멀리 병원까지 걸어서 왔다가 걸어서 돌아간 것이었다.
내가 이들로부터 꼭 한 번 선물을 받은 적이 있다. 66년 크리스마스 때였다. 카드 한 장과 금관담배 한 갑이 그것이다. 아마 이 선물을 위하여 일인당 10원씩을 거두었던 모양이었다. 왜 내가 그것을 짐작할 수 있었는가 하면 손용대와 이덕원의 표정에는 자기 몫을 내지 못한 침울한 심정이 너무나 역력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크리스마스 때 선물이나 카드를 주고받지 않기로 하였던 지난 달의 결정을 상기시키고 다시는 이런 낭비(?)를 하지 않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러한 우리의 결심이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던 어린이들에게 어느 정도로나 수긍이 갔었는지, 그리고 몫을 내지 못한 두 어린이의 침울한 심정이 과연 얼마나 위로되었는지 매우 쓸쓸한 기억밖에는 없다.
나는 카드 대신 1월 1일경에 이들에게 배달되도록 날짜의 여유를 두어서 사관학교의 그림엽서 한 장씩을 우송하였다.
1967년 6월 나는 수술 후 완전히 회복되었기 때문에 4월부터 미루어온 봄소풍을 가기로 약속하였다. 이미 6월이 되어 여름 소풍이 되어버린 셈이지만 우리는 이 소풍을 위하여 여러 차례 의논을 하였으며 오래전부터 마음을 설레어온 터였다. 우리는 이번 소풍이 전번보다 더 풍성하고 유쾌한 것이 되도록 청구회 외에 다른 그룹도 참가시키기로 결정하였다. 목적지를 이번에는 ‘백운대’ 계곡으로 정하고 다른 그룹에 대한 교섭은 물론 내가 책임을 맡았다.
처음에 나는 다른 꼬마들을 참가시킬까 생각하다가 곧 그런 생각을 취소하였다. 청구회 회원들이 주인이 된 소풍에 또 다른 꼬마들이 곁든다는 것은 그 손님이 된 꼬마들이 비록 세심한 배려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어색하고 섭섭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선 내가 지도하고 있던 이화여자대학교의 세미나 서클 ‘청맥회’에서 청구회의 내력과 봄소풍 계획을 피력하여 열렬한(?) 동의를 얻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나서 나는 육군사관생도들을 참가시키기로 작정하였다. 육사 생도들의 화려한 제복과 반듯한 직각의 동작은 평소 우리 꼬마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어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당시 10주의 훈련을 거쳐 육군중위로 임관하여 육군사관학교 교수부에서 경제학을 강의하고 있었다.
66년 임관 직후 내가 예의 그 허술한 국민복 상의를 벗어버리고 정복 정모에 계급장을 번쩍이면서 장충체육관 앞에 나타났을 때 청구회 꼬마들이 큰 눈으로 신기해하고 자랑스러워하는 품이란 그대로 흐뭇한 한바탕 축하회였다.
그날 나와 꼬마들이 옆으로 늘어서서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걸어가는데 저만큼에서 육군병사 한 명이 차렷 자세로 내게 경례하였다. 그 병사가 구태여 걸음을 멈추고 차렷 자세로 정식 경례를 한 마음씨가 짐작할 만하였다. 그 광경을 목격한 이 꼬마들의 뛸 듯이 기뻐하는 모습이라니. 나도 으쓱해지려는 치기를 어쩔 수 없었던 터였다. 이번 봄소풍에 육사 생도들을 참가시키자는 것은 오히려 꼬마들 쪽에서 먼저 얘기를 꺼낸 것이기도 하였다.
나는 3학년 경제학원론 강의를 빨리 진행하여 일찍 마친 다음 생도들에게 청구회의 봄소풍 작전을 공개하여 그 참가를 희망하는 생도는 강의가 끝난 후 경제학과 교수실로 와서 신청하도록 광고(?)하였다. 상당히 광범한 반응이 일었다. 이처럼 많은 희망자가 쏟아져 나왔다는 사실을 나는 결코 이화여대의 ‘청맥회’가 동행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청구회에 얽힌 몇 가지 에피소드만으로도 충분히 호감이 가는 소풍이 아닐 수 없었다. 다른 생도들보다 비교적 일찍이, 그것도 6명이 단체로 신청한 생도들과 약속하였다. 그후 많은 생도들의 신청을 무마하여 다음 기회로 미루어 돌려보내느라 상당히 오랫동안 고역을 치렀다.
이렇게 하여 우리의 봄소풍 일행은 최종적으로 그 인원이 확정되었다. 청구회 6명, 청맥회 여학생 8명, 육사생도 6명 그리고 나 이렇게 21명이었다. 그리고 각 참가 그룹별 책임을 분담하였다. 책임이란 소풍에 필요한 점심과 간식에 소요되는 최소한의 준비였는데 이 분담도 참가신청 이전에 이미 참가의 조건으로 제시된 바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상기시켜 잊지 말도록 하는 것일 뿐이었다. 여학생들은 점심식사에 필요한 주식과 부식의 준비, 육사 생도들은 과자와 간식의 준비, 그리고 청구회 꼬마들은 주빈답게 아이스케이크 30개 값을 지참하는 정도로 그저 체면 유지(?)에 그친 것이었다.
이 아이스케이크 값도 그날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동이 나고 말았지만, 마침 다들 목이 마를 때 다른 그룹들보다 먼저 선수를 쳤기 때문에 상당한 갈채를 받았다는 점에서 그 비용에 비하여 효과는 지극히 훌륭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