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남생 가계도에서 그의 증조가 연자유(燕子遊), 할아버지는 연태조(燕太祚), 아버지는 연개소문인데 당나라 사람들은 그를 개금이라고 불렀다. 천남생 묘지문을 지은 사람인 왕덕진(王德眞)과 글을 쓴 사람인 구양통(歐陽通)은 모두 당나라 사람이었기 때문에 연개소문을 개금이라고 기록하였다.
그런데 본래는 연씨였던 남생이 묘지명에는 천씨(泉氏)로 나온 이유는 당나라 고조(高祖) 의 이름이 이연(李淵)으로 연(淵)자가 같았기 때문에 피휘(避諱)상 어쩔 수 없이 연자를 같은 뜻을 가진 천으로 바꾸었다. 아마도 유교를 강조했던 고구려 사회였지만 고구려가 멸망되고 당나라에 살았던 남생 일가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치욕을 감당해내야 했던 것ㅇ이다. 그러나 연개소문의 성씨가 연씨였다는 사실은 신당서에 나온다.
건봉(乾封) 원년(666)에 장(藏)은 아들 남복(男福)을 보내어 천자를 따라서 태산(泰山)에서 봉선식(封禪式)에 참가하였다가 돌아갔다. 개소문(蓋蘇文)이 죽자 아들 남생이 대를 이어 막리지(莫離支)가 되었다. 동생 남건과 남산이 있어 서로 미워하였다. 남생이 국내성(國內城)에 의지하여 아들 헌성(獻誠)을 보내어 입조하여 구원을 청했다. 개소문의 동생인 정토(淨土) 또한 땅을 베어 항복을 청했다.
태산은 천자가 봉선식을 올리던 곳이었는데 태산은 일반적으로 높은 산을 말한다. 그런데 같은 신당서에서조차도 태산(太山)이란 이름이 유귀전(流鬼傳)에 나온다. 담라( 羅)의 추장이 인덕(麟德) 중(664-666)에 내조(來朝)하여 황제를 따라 태산(太山)에 이르렀다고 나온다. 여기서 담라는 탐라(耽羅)가 확실한데 삼국사기에는 문무왕 5년(665)에 유인궤(劉仁軌)가 신라, 백제, 탐라, 왜인 등 4국의 사신들을 대동하고 바다를 건너 서쪽으로 돌아가서 태산(泰山)에 모여서 제사지냈다고 나온다. 그런데 똑같은 산인데도 한자가 다른 것은 이상하다.
구당서 철륵전(鐵勒傳)에도 태산(太山)이 나온다.
정관(貞觀) 15년(641)에 태종이 낙양에 행차하여 장차 태산(太山)에서 봉선식을 거행하려고 하였다. 이남(夷男)은 그 나라에서 모의하여 "천자가 태산(太山)에서 봉선식을 하면 만국이 반드시 모이고 변경은 공허해질 것이니 우리는 이때에 사마(思摩)를 베는 것은 썩은 나무를 부러뜨리는 것과 같다."고 말하였다. 인하여 그 아들 대도설(大度設)에게 명하여 병사 20만을 이끌고 자도천(自道川)에 주둔하고 선양령(善陽嶺)에 의지하여 사마의 부(部)를 공격하자 사마는 사신을 보내어 구원을 청하였다.
이남은 철륵의 왕이었고 사마는 이사마(李思摩)를 말하는데 당나라로부터 이씨 성을 하사받았다. 당나라는 북방 민족의 왕들에게 이씨 성을 하사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개원(開元) 16년(728)에 흑수말갈(黑水靺鞨)의 추장에게 이씨 성을 하사하고 이름을 헌성(獻誠)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남생 형제들사이에 권력 다툼이 일어나 남생이 국내성에 의지하고 당나라에 구원을 청하기 위해 보냈던 아들인 헌성과 이름이 같다. 헌성은 당나라를 위해 정성을 다 바친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분명히 흑수말갈의 추장의 이름인 헌성은 그런 뜻으로 붙인 것은 확실한데 남생의 아들인 헌성도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의 묘지명에는 이름도 헌성이고 자(字)도 헌성인 점으로 보아 헌성은 당나라가 그에게 붙여준 자(字)이며 그의 본래의 이름은 헌성이 아니었을 것이다.
만세통천(萬歲通天) 중(696-697)에 당나라에 반기를 든 거란의 장수 이진충(李盡忠)은 당나라로부터 이씨성을 하사받았으며 이 난을 진압하기 위해 당나라에서 파견된 이해고(李楷固)는 본래 거란인으로 당나라와의 싸움에서 항복하여 이씨성을 하사받고 중용된 사람이었다.
이남의 아들 대도설이 우리의 눈길을 끄는데 바로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大祚榮)과 같은 대씨이기 때문이다. 대조영의 아버지는 사리(舍利) 걸걸 중상(乞乞仲象)인데 사리는 지명이고 성은 걸걸, 이름은 중상이다. 여기서 사리라는 지명을 걸걸중상의 이름 앞에다 넣은 것이 주목된다. 신당서 지리지에는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하고 설치한 9도독부 가운데 네 번째로 사리주도독부(舍利州都督府)가 나온다. 그런데 구당서에 안동도호부에 속한 14주에는 사리주를 찾아볼 수 없고 고자 부자가 거란과 싸우다가 죽은 마미성의 이름을 딴 마미주(磨米州)가 나오는 점으로 보아 마미주일 가능성은 있다. 어쨌든 그의 이름 앞에 사리가 나오는 것으로 봐서 사리주는 고구려 영토내에서도 비교적 이질적인 집단이 살았을 가능성은 있는 것으로 보아 말갈족과의 연관성은 있어 보인다. 그가 말갈의 추장 걸사비우(乞四比羽)와 함께 고구려의 남은 무리들과 동쪽으로 달아나 요수를 건너 태백산(太白山) 동북에서 진국(震國)을 세웠다. 그런데 걸걸중상과 걸사비우는 성이 매우 비슷하다는 사실로 보아 말갈족일 가능성이 있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하는데 북방 민족들의 공이 컸기 때문에 이씨 성을 남발하였다. 대도설이나 대조영의 경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데 걸걸중상의 아들이 걸걸씨에서 대씨로 바뀌는 것으로 보아도 당나라로부터 부여받은 성씨일 가능성이 있다.
어쨌든 당 태종이 641년에 태산에서 봉선식을 거행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평소에 관계가 좋지 못한 이사마를 공격하였다. 여기서 태산(太山)이란 단어가 두 번씩이나 나오는 점으로 보아 태산(泰山)을 잘못 적은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신당서 고려전에는 태산(泰山)으로 나온 반면에 유귀전에는 태산(太山)으로 나오며 구당서 철륵전에는 태산(太山)으로 나온 것일까? 아마도 신구당서를 편찬할 때에는 태산(太山)으로 기록되었지만 후대에 이르러 태산(泰山)이란 단어가 사용되면서 신구당서에도 태산(泰山)으로 정정했는데 고려전과 같이 중요한 국가의 열전에는 정정할 수 있었지만 유귀나 철륵과 같이 별로 중요하지 않는 국가의 열전은 정정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당나라 시대에 씌여진 묘지명에는 분명히 태산(太山)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장락공주(長樂公主)의 묘지명에는 그녀의 이름은 여질(麗質)이며 농서( 西) 적도인(狄道人)으로 나온다. 장락공주의 이름은 오랫동안 즐겁게 살아란 뜻이 담겨져 있지만 그녀가 정관 17년(643) 8월 10일에 23세의 나이로 훙(薨)한 것으로 보아 한 인간의 목숨은 하늘에 달려 있으며 인간의 뜻대로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녀는 고조(高祖) 태무황제(太武皇帝)의 손(孫)이자 황제의 제 5녀로 동궁(東宮)의 누나였다. 고조는 바로 당나라 시조인 이연(李淵)을 말하고 태무황제는 그가 살아있었을 때 부르던 명칭이며 고조는 그가 죽은 뒤에 불려진 묘호(廟號)였다. 황제는 바로 태종을 말하고 동궁은 그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된 자리를 말하며 조선 시대로 말하면 바로 세자(世子)로 그의 9번째 아들인 고종을 말한다. 장락공주는 정관 17년 세차 계묘 9월 정축삭 21일 정유일에 □릉(陵)에 배장(陪藏)되었는데 □릉은 그녀의 남편이 묻힌 곳을 말한다. 릉은 대개 황족이나 왕족들이 묻힌 곳을 말하며 그녀의 남편도 이러한 범주에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녀가 23세의 젊은 나이에 죽은 것으로 보아 그녀의 남편은 살아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데도 릉이란 이름을 붙인 것으로 보아 사전에 묻힐 곳의 이름을 정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유주도독 형국공(邢國公)으로 추증된 왕군악(王君愕)은 무안(武安) 한단인(邯鄲人)이었는데 정관 19년(645) 6월 22일에 요동의 주필산(駐 山)에서 51세로 훙(薨)하였다. 유주도독 형국공은 백제를 멸망하는데 큰 공을 세운 소정방의 관작과 같고 한단은 바로 조(趙)나라의 도읍이 있었던 곳으로 조선의 평양과 마찬가지로 미녀가 많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정관 19년과 요동의 주필산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친정할 때였고 왕군악은 이 싸움에서 전사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죽음은 고구려로서는 희소식이었지만 당나라로서는 매우 애석해했는지는 몰라도 유주도독 형국공이라는 어마어마한 관작을 추증하였다. 묘지명에서는 이 대목을 가리켜 죽어서 더욱 빛났다고 칭송하고 있다. 그의 장례때는 견포(絹布) 1200필과 동원비기(東園秘器)를 하사하고 홍려감호(鴻 監護)를 보냈으며 그 밖에 장례에 필요한 물품을 관급하였다고 한다. 그는 그 해 10월 14일에 소릉(昭陵)에 배장되었는데 소릉은 바로 태종이 묻힌 곳의 이름이다. 태종은 정관 23년(649)에 죽었으나 이미 4년전에 소릉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사전에 태종이 묻힐 곳의 이름이 정해졌을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태종이 죽은 후에 소릉이란 이름이 붙여졌고 왕군악의 묘지명은 그 후에 집어넣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장락공주의 묘지명에는 태산(太山)의 돌이라는 구절이 나오는 점으로 보아 그녀의 묘지명이 씌여질 당시인 643년에는 태산(泰山)이란 단어가 씌여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구당서가 씌여질 당시에 태산(太山)이 분명히 씌였는데 후대에 이르러 태산(泰山)이란 단어가 쓰이면서 중요한 부분에는 태산(泰山)으로 수정하였지만 중요하지 않는 부분에는 그대로 놔두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은 분명히 중국의 사가들의 부도덕성을 입증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태산은 중국에서 분명히 높은 산임에 틀림이 없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라는 시조도 있듯이 태산은 높은 산이었다. 그러나 지금 산동성(山東省)에 있는 태산(泰山)은 1522 m로 우리가 성산(聖山)이라 부르는 2744 m인 백두산(白頭山)보다도 작다. 또한 남한에 있는 1950 m인 한라산(漢拏山)보다 더 작은데 명색이 광활한 영토를 가진 중국에서 태산보다 더 높은 산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데도 굳이 한국이나 일본, 심지어 대만(臺灣)보다 더 작은 산을 성산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마도 원래의 태산은 높은 산이었지만 후대에 중국의 왕조들이 오늘날의 중국을 완전히 차지하면서 지명을 옮겼고 그 과정에서 태산이 낮은 산이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첫댓글太나 泰는 혼용해서 사용해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둘다 뜻이 크다니까요. 그리고 당서가 편찬되기 훨씬 전부터 泰산이라고 써졌다고 알고 있는데요. 그리고 태산이 중국 대륙 전체로 보면 그리 큰 산은 아닙니다만 화북평원에서 가장 큰 산인 것은 사실입니다. 주변 몇 천리에 걸쳐 산다운 산이 없거든요.
최초의 정사인 사기나 한서에는 태산(泰山)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는 후대에 소급 적용했을 가능성이 있기때문입니다. 신구당서을 통해서 볼 때 같은 책에서조차 일치하지 않은 것은 방대한 자료를 재교정하는 데에 엄청난 시간과 인력이 소모되기 때문에 전체를 수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유명 출판사의 책들도 경제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틀린 부분이 한 두군데가 아닙니다. 그것을 볼 때마다 우리나라의 문화 수준이 얼마나 낙후되었는가를 알 수 있고 한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방대한 중국 사서는 아무리 교정을 한다고 하더라도 엄청난 분량때문에 일정 부분은 그러한 흔적이 남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첫댓글 太나 泰는 혼용해서 사용해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둘다 뜻이 크다니까요. 그리고 당서가 편찬되기 훨씬 전부터 泰산이라고 써졌다고 알고 있는데요. 그리고 태산이 중국 대륙 전체로 보면 그리 큰 산은 아닙니다만 화북평원에서 가장 큰 산인 것은 사실입니다. 주변 몇 천리에 걸쳐 산다운 산이 없거든요.
최초의 정사인 사기나 한서에는 태산(泰山)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는 후대에 소급 적용했을 가능성이 있기때문입니다. 신구당서을 통해서 볼 때 같은 책에서조차 일치하지 않은 것은 방대한 자료를 재교정하는 데에 엄청난 시간과 인력이 소모되기 때문에 전체를 수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유명 출판사의 책들도 경제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틀린 부분이 한 두군데가 아닙니다. 그것을 볼 때마다 우리나라의 문화 수준이 얼마나 낙후되었는가를 알 수 있고 한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방대한 중국 사서는 아무리 교정을 한다고 하더라도 엄청난 분량때문에 일정 부분은 그러한 흔적이 남을 가능성이 높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