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이 초청한 시인_ 진혜진 신작시>
아니오 변辯
진혜진
무엇이 절실한 한 마디입니까
변은 사방에서 패하고 돌아온 패잔병 같습니다
사람, 전쟁, 사람과 전쟁, 사람의 전쟁
떠난 자와 남은 자는 가깝게도 아프고 멀게도 아픕니다
말의 말보다
그냥 느끼시길……
비가 오면 비가 와서
올 풀린 스웨터 같은 변은
벌레 먹은 나뭇잎 구멍 같습니다
몹시 피해적인 태풍 앞에서
몹시 사적인 몇 모금의 에스프레소가
카페에 앉은 나의 빈속을 관통합니다
간밤 태풍에 잠 못 드셨던 당신을 놓치고 나는 몰라서 나였어요. 누군가에게는 원통해서 나야, 그게 나입니다, 믿지 못해서
사람, 전쟁, 사람과 전쟁, 사람의 전쟁으로
죄송합니다
창밖의 스모킹 존에선 사람이 사람 속으로 연기가 연기 속으로 오해가 오해 속으로 매듭이 매듭 속으로
그러나 나는 내 밖으로
비는 비일 뿐 끝내 변, 하지 않고
무엇이 죄송한 변입니까
최후의 변은 침묵이라서
아니요 라고 뱉어낼 변의 목구멍을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시편이 초청한 시인_ 진혜진 대표시>
사람정거장
진혜진
새벽 종소리로 물든 몸의 정거장에서 한 사람의 여름이 사라지고 있다
한 올만 툭 잡아당겨도
스르르 흩어져 버리는 환幻일지라도
더 이상 비뚤어지는 계절이 없을 때까지 서로의 목적지가 될 때까지 모든 결말을 끌어안았지만 푸르스름한 빛 속으로
사라지고
한 사람이 두고 간 시간이 그림자로 남아
지나가는 모든 발자국을 견딘다
어깨너머의 꿈은 당신 밖으로 나오지 않은 연민이거나
멈추지 않고 지나간 연인의 이름이거나
의문이 많은 내일의 그림자
누구의 혀가 새벽의 체온을 더듬었을까
싱싱한 죄목들이 토해진 거리마다
팔딱거리는 그늘들
쓸만한 게 없어
함부로 던지는 눈빛을 밟고도
몰리는 무관심
사라지기 전 무엇을 하였는지
버려진 이름이 몇 개였는지
지켜봄이 사라질 때까지 당신을 통과해야 하는 것을
누구도 모른다
진혜진 시인 &도서출판 상상인 대표
2016년 《경남신문》 《광주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포도에서 만납시다』,
2021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수혜
제11회 시산맥작품상 수상. 제19회 모던포엠작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