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약 4:17)
성경은 읽을 때만이 아니라 우리가 존재하는 동안 끊임없이 적용되어야 할 말씀이다. 여기서 ‘끊임없이’가 의미하는 것은 현재의 환경과 형편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처한 환경과 형편에 맞게 적당히 조절하여 적용할 수 없다. 성경을 문자대로 실천해야 할 말씀으로 주장하려면 먼저 이점부터 염두에 두어야 한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요구되는 행함인지를 살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사람의 환경과 형편에 따라 각기 다르게 적용된다면 그 해석은 바르지 않다.
예를 들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라는 말이 교회의 일반적인 해석으로 공평하게 끊임없이 적용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먼저 본문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어떤 일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행함으로 인식하고 행할 줄 알면서도 고의로 거역하고 행하지 않으면 죄가 된다’라는 것이다.
교회는 구제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선한 행함으로 말한다. 누구나 구제를 선한 행함으로 말하고 행할 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다만 형편이 허락하지 않아서 행하지 못한다는 핑계가 있을 뿐이다. 이것이 구제, 즉 선한 행함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다. 그래서 인간이나 교회는 마음껏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물질의 복을 달라고 기도한다. 물질의 복을 주시면 선을 행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선을 행할 줄 몰라서 행하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행할 줄 알면서도 자기 형편을 핑계로 내세워 행하지 않는 것인가? 결국 선을 행하는 것에 대한 우리의 기준과 판단대로라면 우리는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않는 죄인으로 심판을 받아야 한다.
성경을 이렇게 적용하면 형편이 좋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선을 행할 줄은 알지만 하나님이 재물을 주지 않아서 행하지 못한 것일 뿐이라며 심판을 정당하지 않은 처사로 여기고 불만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이 문제를 ‘하나님이 주신 대로 구제에 힘쓰는 것이 선을 행할 줄 아는 성도의 믿음의 삶이다’라는 말로 적당히 얼버무리기도 하겠지만 말씀이 주는 답이라고 할 수 없다.
무엇보다 세상 기준에서도 구제와 같은 행함은 선으로 규정된다. 그렇다면 본문은 세상의 사람에게도 적용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혹여 ‘나는 선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행할 줄도 몰라서 행하지 못했다’라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답해야 하는가? ‘이제라도 선을 알았다면 행해야 한다’라고 말하면 답이 될까?
성경은 하나님이 선지자와 사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하시는 비밀의 세계에 대한 소식이다. 이들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을 전한다. 그런 점에서 선지자도 사도도 우리와는 다른 생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그래서 우리도 생각이 달라지지 않으면 사도가 전한 비밀의 소식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 그렇다면 본문을 세상과 다르지 않은 기존의 생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본문은 ‘그러므로’로 시작한다. 앞의 내용과 연결된 결론이라는 뜻이다. 앞에 보면 어떤 도시에 가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볼 생각을 하는 자들에게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14절)라고 말한다. 자기를 위해 미래 계획을 세운 자에게 ‘너희는 안개일 뿐이다’라는 말을 한 것이다.
안개는 있고 없는 것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 보였다가도 해가 드러나면 사라져야 한다. 인간을 이러한 안개에 빗대어 말한 것은 내일 존재하는 것이 우리 소관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이다. 내일의 일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결정하신다. 내일 일을 계획할 수는 있어도 내일에 존재하는 것이나 계획대로 되고 안 되는 모든 것은 주의 뜻대로 주가 행하시는 일이다.
내일 내 몸이 있다면 나의 소관이 아니고 주의 뜻이다. 내일 할 일, 모레 할 일, 일 년의 계획을 세운다 해도 내가 이루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인간은 다만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 존재하는 안개와 같은 미미한 생명이라는 것이 전부다. 그래서 오늘이든 내일이든 세상에 존재하고 몸이 보인다면 하나님이 보이게 하시기 때문이고 그 시간은 ‘잠깐’이라는 생각이 쉬지 않고 계속되어야 한다. 이것이 범사에 감사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성도의 생각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자기의 미래를 계획하고 부단히 노력한다. 내일 일을 알 수 없다는 말 따위는 무시하고 내일을 위한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위해 하나님을 찾는다. 그리고 잘된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면서 은혜받을 만한 믿음을 자랑하기도 한다. 야고보는 이에 대해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라고 말한다. 인간에게 속한 모든 것이 허탄한 자랑이다.
그러면 선은 무엇이고 선을 행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게 대한 답은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15절)에서 찾을 수 있다. 주의 뜻이 선이며 현재의 처지나 형편을 주가 행하신 주의 뜻으로 알고 감사하는 것이 선을 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우리는 선을 행하지 않는다. 주의 뜻이 선하고 모든 것을 주의 뜻으로 알고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를 찾는 마음과 행위는 나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향한다. 자신이 주를 믿는다는 것에 희망을 두고 믿음 덕분에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꿈꾸는 것이다. 내일을 계획하는 것이 오늘을 허락하고 살게 하신 주의 뜻과 은혜를 감사하지 않는 악한 마음이라는 것도 무시한다.
결국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않는 죄는 내일 일을 알 수 없는 안개와 같은 인간이 선한 주의 뜻으로 만들어지고 제공되는 오늘이라는 날의 환경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감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선을 행하는 자가 아니라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않는 죄의 존재다. 이처럼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 곧 악을 행하는 것이다. 이것을 바울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은 악을 행한다고 말한다.
선을 행하신 분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다. 악을 행하는 것이 전부인 우리가 지금 사는 것은 선을 행하신 예수님의 은혜 때문이다. 이것을 알고 감사하는 것이 주 안에 있는 성도의 선한 행함이다.
-신윤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