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화의 시 「부활을 위하여」에 대해
--- 이 시는 시집『누워서 부르는 사랑노래』(실천문학사)에서 옮김.
1
아름다운 죽음에 대하여
가장 아름다운 죽음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
쓰러져야 할 때 쓰러지고
썩어 문드러져야 할 때 썩어
흙이 되고
바람이 되고
이윽고 고요한 어둠이 되어
잊혀지는 것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캄캄하게 또는
눈부시게 비어있는 자리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죽음
꽉 차 넘치던 생명들이 비우고 간
캄캄함이나 눈부심으로부터
모든 새로움은 시작되고
새로운 것들은 영원으로 이어진다
― 김해화「부활을 위하여 ―1. 아름다운 죽음에 대하여」전문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을 떠올립니다.
겨우내 꽁꽁 얼었던 텅 빈 들판이 여인의 냄새를 피우며 뜨뜻하게 달아올랐다가 어느 새 푸른 모로 가득하고 점점 진초록으로 변하다가 이삭이 패이며 황금빛으로 변해 갑니다. 가을걷이를 합니다. 텅 빈 논, 거기에 "꽉 차 넘치던 생명들이 비우고 간" 무(無). 그것은 마치 해산을 한 여인의 배와도 같습니다. 지금은 텅 비어 있지만 그리로 다시 그 모든 것이 새롭게 올 것입니다. 그래서 텅 빈 충만, "캄캄하게 또는 눈부시게 비어있는 자리"입니다. 바로 그 반복 순환의 오랜 경험(믿음의 근거)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죽음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 쓰러져야 할 때 쓰러지고/ 썩어 문드러져야 할 때 썩어/ 흙이 되고/ 바람이 되고/ 이윽고 고요한 어둠이 되어/ 잊혀지는 것"이라는 미의식이 탄생한 것입니다. 참이 빔으로 되었기에 다시 참으로 갈 수 있다는 것, 반(反, Antithesis)이 반(返, Returning)이 되는 것이 생명의 생리라는 지혜의 틀과 거기로부터 '죽음'은 바로 '모든 새로움은 시작"이라는 생각! 이런 큰 틀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고, '아름다운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잉태할 수 없는, 다시 말해서 사라지면 그만인 죽음이라면(혹은 아예 사라질 수도 없는 삶이라면) 왜 혹은 어떻게 죽음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다시 또 아름다운 삶에 대해서도, 삶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죽음!
시인은 그것을 '새로운 것들을 오게 하는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아름다운 삶!(아름다운 죽음이 말 되어졌기 때문에 그것의 음각陰刻으로 읽힌)
그것은 들판을 가득 채웠던 나락들처럼 제 본성(혹은 천성)을 다하는 삶입니다.
2
가슴에 훈장을 단 영웅처럼
어느 날 뜬금없이 간밤의 깊은 잠으로부터 우리들을 깨워주던 빛나는 욕설과 망치 소리 사라지고 뜨거운 숨결들 출렁이던 공사장에 우악스러운 겨울바람이 몰려들어 맹수처럼 발톱을 세우고 펄럭이던 깃발의 꿈을 찢어발기던 날 드러누운 채로 또는 서서 묶인 채로 죽임당한 목재들과 철근
그날 이후 아침을 기다리지 않는 폐허가 되었지만 죽어서도 시퍼렇게 눈을 치뜨고 하늘을 노려보면서 서있는 우리가 자랑스러웠네 이렇게 선 채로 죽어 쓰러지지 않는 노래 될 수 있다면 선 채로 죽어 죽어서도 피 흘리며 피 묻은 외침 하나 될 수 있다면
설레는 가슴으로 부활을 기다렸지
메꽃넝쿨 감아올라
꽃 피우는 아침이면
가슴에 훈장을 단 영웅처럼
서있는 우리들 죽어서도 가슴 뜨거웠네
― 김해화「부활을 위하여 ―2. 가슴에 훈장을 단 영웅처럼」전문
그런데 작업이 중단된 공사장에는 그런 죽음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본성(本性)을 다하지 못한 주검만이 있습니다. 그렇게 죽임당한 철근, 그리고 "철근을 메어다 부리면/ 쇳소리 납니다/ 쇳소리로 살다가 철근쟁이/ 철근과 함께 쏟아져/ 쇳소리 지르며 죽고 다칩니다"(시「삶」중에서)고 한 철근쟁이의 주검만 있습니다. 더 이상 "아침을 기다리지 않는 폐허가 되어".
그래서 그 주검들은 죽어서도 시퍼렇게 눈을 치뜨고 하늘을 노려봅니다.
"이렇게 선 채로 죽어 쓰러지지 않는 노래 될 수 있다면 선 채로 죽어 죽어서도 피 흘리며 피 묻은 외침 하나 될 수 있다면"이라는 정신이 됩니다.
또 그런 정신으로 인해 부활의 꿈이 됩니다. 본성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하지 못한 그 부분을 꿈으로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간절한 육신의 부활(공사장이 다시 살아나는)을 기다리는 마음을 알아주기라도 하는 듯 야생화 메꽃넝쿨이 오르며 꽃을 피워 가슴에 훈장 하나를 달아줍니다.
그래서 더욱 가슴이 아픕니다.
공사장 철근(쟁이)인들 작업 중단이 누구의 잘못에 의한 것인지를 왜 모르겠습니까? 마치 전쟁터의 군인들과 같은 규율("욕설과 망치 소리") 속에서도 뜨거운 숨결 출렁이며 일궈내던 삶이 이렇게 망가져야 하는 그 이유를 그들인들 왜 모르겠습니까? 그런데도 말없이 '육신의 부활'을 꿈꾸는 저들의 모습! 들고일어나 원인을 때려잡지 못하고 육신의 부활을 기다려야 하는 그 심정!
저는 그 비슷한 상황을 조태진 시인의 다음 시 구절에서 읽습니다.
당신은 모르실 것입니다
아버지가 왜 아버지인가를
목을 붙들고 애절하게 매달려야 하는 아버지의 투쟁을
새끼들을 위해 비겁의 무릎을 꿇는 아버지의 저항을
몸을 던질 수도 끊을 수도 없는 아버지의 목숨을
―조태진「목 짤린 아버지를 당신은 보고 계십니다」중에서
그래서 더욱 가슴 아픕니다.
김해화는 그렇게 아파하고 있습니다. 대차대조표를 그려 손익분기점을 찾고 그에 따라 움직이는 약삭빠름이 삶이고 본성라면 이런 아픔은 없을 것입니다. 아니 이런 불상사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미련한 철근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미련한 김해화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미련한 아버지라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꿈을, 나는 그릇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까지 삶을 꿈꾸는 것이 죄라면 도대체 삶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3.
단단함이 얼마나 큰 슬픔인가
개망초 환삼넝쿨 뒤엉켜 제멋대로 싸움 벌이면서 누운 채 삭아가는 목재들과 철근토막 뒤덮더니 지난 여름 폭풍우에 함바집 지붕 내려앉고 겨울 모진 눈보라에 마주서서 버티던 거푸집이 쓰러졌네 나는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한 채 마지막 몸부림 끝의 짧은 비명을 들었지 그런데 두렵고 긴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다시 눈을 뜨고 내가 본 것은 찢겨진 주검의 참혹함이 아니라 조용히 흰눈에 묻혀가는 편안한 휴식이었네
단단함이 얼마나 큰 슬픔인가
쓰러지거나 무너지는 것들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못하면서
홀로 서있어야 하는 단단함
얼마나 캄캄한 절망인가
이제는 빛나는 눈 녹슬어
어둠밖에 보이지 않고
칭칭 묶여 쓰러질 수 없어
선 채로 숨 끊기고
죽어서도 오래오래 피 흘리며
치열하게 서서 몸부림쳐야 하는
단단함이 얼마나 무거운 형벌인가
― 김해화「부활을 위하여 ―3. 단단함이 얼마나 큰 슬픔인가」전문
그러나 육신의 부활이라는 꿈마저 깨어져 버립니다.
"나는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한 채 마지막 몸부림 끝의 짧은 비명을 들었지"(거푸집이 떨어져나간 철근 골조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역설적으로 알게 됩니다.
"죽어서도 오래오래 피 흘리며/ 치열하게 서서 몸부림쳐야 하는/ 단단함이 얼마나 무거운 형벌인가".
그러면 이것이 왜 역설적인 인식입니까?
이유는, 쉽게 사라질 수 없는 것은 쉽게 사라져서는 안 되는 뜻이 그 존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시인이 그 면을 본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힘들고 괴로운 상태일지라도 거기에 그 존재의 의미와 본성을 다하는 어떤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폐허로 남아, 육신의 부활을 빼앗겼음에도 끝끝내 남아 가르쳐야 할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 철근 골조에! 그래서 단단함으로 인해 쉽게 사라지지 못하는 폐허가 된 철근 골조물은 형벌이면서도 존재를 다하는 의미입니다. 바로 그 의미를 읽어냄으로써 본성을 다하는 죽음이 마련됩니다(그와 동시에 돌아옴의 부활이 가능해집니다).
그 처절하고 아름다운 노래가 다음의 시입니다.
4
부활을 위하여
단단한 쇠붙이로 세상에 태어나
번쩍이는 공구나
피 튀기는 치열한 무기보다
쉽게 끊기고 쉽게 쓰러지는 세상의
뼈와 힘줄이 되어
끊어진 마음 이어주고
쓰러진 가슴 일으켜 세우는
곧은 뜻 하나로 철근이 되었네
쓸모없어 버려지면
녹슬어 흙에 묻히거나
잡풀 속에 숨어 잊혀지다가도
버림받은 이의 큰 설움 하나 전해져 오면
독기 오른 눈 치뜨고 하늘을 노려보는
용광로 속의 뜨거운 가슴만은
끝내 천성으로 지니고 싶었지
선 채로 죽어
나는 지금도 철근인가
기껏 외로움 하나 일으켜 세워두고
죽어서도 피 흘리며 서있어야 하는
단단함은 아직도 쇠붙인가
차라리 쓰러지면 녹슨 쇠붙이지만
서있는 한 나는 다만 폐허
누가 나를 쓰러뜨려 주게
저는 이 구절에서 예수의 가장 인간적 고백을 떠올립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루까 22장 42절).
고통을 피하고 싶지만 그것이 당신의 뜻이라면 따르겠다는 이 말이, 철근의 노래에서는 "차라리 쓰러지면 녹슨 쇠붙이지만/ 서있는 한 나는 다만 폐허/ 누가 나를 쓰러뜨려 주게"라고 쓰러지지 못하는 죽음을 직시하는 역설로 표현됩니다. 그것으로 인해 "쉽게 끊기고 쉽게 쓰러지는 세상의/ 뼈와 힘줄이 되어/ 끊어진 마음 이어주고/ 쓰러진 가슴 일으켜 세우는/ 곧은 뜻"으로 철근의 본성은 영원히 이어지는 것(부활)이겠지요.
쉽게 사라지지 못하는 것에는 쉽게 사라져서는 안 되는 뜻이 있다. 그것을 깨우칠 때 아름다운 삶과 아름다운 죽음이 온다. 내가 지금 질질 흘리는 피에서 그것을 안자, 나를 쓰러뜨려라, 그 뜻으로 거듭나는 세상을 위해!
---- 2001년 3월 8일 철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