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을까?
눅 14:26-27, 33-35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33.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34.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35.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 없어 내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하시니라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라는 말씀을 3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3번이나 말씀하셨다는 것은 3은 완전 숫자로 그만큼 예수님의 제자의 길은 매우 어려운 길이며 아무나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십자가를 지고가는 것이 좋습니까? 홀가분하게 찬송을 부르면서 살아가는 것이 좋습니까? 당연히 쉽고 편한 것이 좋을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십자가를 지고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죽이지 않는다면 절대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부모님이나 배우자, 그리고 자녀와 형제 자매까지 모두 버릴 수 없다면 결코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 줄 아십니까?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다시말해서 지옥에 간다는 말입니다. 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 말입니까? 그래서 저는 저희 교회의 한 해의 목표가 아니라 평생의 목표를 "그리스도 안에서 잘 죽자"로 정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지 못해서 지옥에 간다면, 못 죽을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우리가 너무나 많이 들었고, 너무나 잘 아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실천하기 어렵고 아무나 쉽게 행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을 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뽑혔고 너무나 똑똑하고 계산이 빨라서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든 살림을 맡아서 회계의 일을 했던 가륫유다와 같은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오히려 베드로와 요한과 같이 배에서 어부의 일을 하며 불같은 성질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이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었다는 것은 우리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결코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지금은 무식하고 단순하고 비겁하며 또 때에 따라 "욱"하는 성질까지 있는 정말 형편없어 보이는 사람이 나중에 베드로와 같이 몇천명을 회개시켜서 구원의 길로 이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은 "번개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조금만 기분이 나빠도 번개처럼 화를 내며 모두 쓸어버려 죽이겠다고 하던 사람이 나중에 요한처럼 "사랑의 사도"로 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아가페 사랑을 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우리 눈앞에 보이는 사람을 그대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눈 앞에 보이는 것으로 미래를 그리지 말고, 그 사람이 주님 안에서 어떻게 변해있을지를 그려보면서 비전을 갖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죽어야 됩니다. "아니, 지금 저 사람이 저런 말과 행동을 하고 있잖아요?"라고 질문을 할 수 있지만, 그것은 우리가 살아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눈이 보고, 귀가 들어서 살아있는 입이 판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었다면 그런 것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기 때문에 우리의 입도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 자신을 죽이며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들을 다 버릴 수 있을까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어떻게 죽었으며 어떻게 자기의 사랑하는 가족들을 다 버렸는지를 살펴보면 그 해답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에게 아들을 줄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본토와 가족과 친척을 떠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자기가 살던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또한 사랑하는 가족과 친척들과 헤어진다는 것처럼 힘든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장 하기 힘든 일을 하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이 가족들의 문제와 집안의 문제들을 자기가 짊어지고 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십자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것들을 짊어지고 가지 말고 버리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을 버리는 것이 십자가를 지고가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지고가기에 너무나 무거운 짐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그 무거운 짐을 주님께 맡기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무거운 짐을 십자가라고 생각하고 짊어지고 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짐이라고 생각하고 주님께 맡기려고 하는 모순된 생활을 하며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로 무엇이 짐이며 무엇이 십자가인지부터 구별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가족과 경제적인 모든 물질적인 것들은 모두 우리의 짐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행위가 바로 나를 그리스도 안에서 죽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샘플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제일 먼저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실 곳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모든 친척을 버리고 고향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카인 롯을 데리고 떠났습니다. 그는 완전히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조카 롯을 데리고 옴으로 말미암아 결국 아브라함의 종들과 롯의 종들이 싸우게 되었고 어쩔 수 없이 롯을 떠나 보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은 어떻게 해서든 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그가 롯을 데리고 옴으로 말미암아 어떠한 결과가 발생했습니까? 아브라함 때문에 부자가 된 롯은 소돔땅으로 가서 살았는데 그곳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때 롯의 딸들이 자녀를 낳기 위하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우고 부정을 행해서 암몬과 모압의 조상을 태어나게 했습니다. 그리고 암몬과 모압 자손은 평생을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괴롭히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버리라고 할 때 잘 버려야 합니다. 마음이 약해서 버리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결과를 우리는 모르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가 아닌 몸종 하갈을 통해서 태어난 이스마엘을 버려야 했습니다. 창세기 17장18절을 보면 백세가 된 아브라함이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가 정말로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이 아닌 다른 아들을 주실 것을 바라고 있었다면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그가 이스마엘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이 하나님 앞에서 잘 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른 아들을 주실 것이라고 하셨고, 이삭이 태어난 다음에 이스마엘과 그의 어머니 하갈을 함께 내보내라고 하셨습니다.
창세기 21장을 보면 이삭이 태어난 뒤에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는 것을 보면서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라고 했고 이어 11절에서는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위하여 그 일이 깊이 근심이 되었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첫번째로 얻었던 아들 이스마엘을 내쫓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매우 근심했습니다. 그러나 근심하는 그에게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 중의 하나는 그가 정말 실수를 많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마다 머뭇거리지 않고 믿음으로 즉각적으로 실행에 옮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떡과 물 한 가죽 부대를 하갈의 어깨에 메워주고 그의 아들 이스마엘과 함께 나가도록 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마음이 얼마나 찢어질듯이 아팠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무조건 순종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순종도 천천히 하지 않고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실행에 옮겼습니다. 우리같으면 하룻밤만 더 아들과 같이 자고 내보냈을지도 모릅니다.
아들 이스마엘을 버리고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하나님께서는 또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세번째로 그의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십니다. 그때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같으면, "하나님! 정말 너무하십니다. 제 고향과 부모님과 친척을 다 떠나서 오게 하신 뒤에 그나마 있던 조카 롯까지 떠나보내시고, 그리고 처음으로 낳은 아들 이스마엘도 내보내라고 하시고, 이제는 그것도 모자라서 다 자란 이삭을 죽이라고 하십니까?"라고 하지 않을까요?
이스마엘도 어느 정도 다 키워놓았더니 내보내라고 하시고, 이젠 장성한 이삭을 죽여서 번제로 바치라고 하시는 하나님을 여러분은 믿을 수 있습니까? 이해할 수 있습니까? 절대로 믿지 못할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우상숭배자들은 사람을 죽여서 바치는 인신제사를 드렸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행위를 가증하게 여긴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상숭배자들과 똑같이 그런 제사를 드리라고 하시는지 인간의 상식과 지혜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이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이유가 달리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분명히 이삭을 통해 바닷가의 모래알과 같고 하늘의 별들과 같이 수많은 자손이 태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신 약속을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이삭을 죽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이삭을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히 11:19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왜냐하면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기를 낳을 수 없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된 상태에서 이삭이라는 아들을 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영적인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조상 아브라함처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아들을 죽여서 바치라고 하지 않으시지만, 우리의 사랑하는 아들들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손에 맡기라고 하십니다. 어떠한 위험한 곳이건 열악한 환경이건 상관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그곳에 우리의 아들이 있어야 한다면 그 말씀에 순종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들을 버리는 것이며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엄마들에게 있어서 자녀는 매우 소중한 존재입니다. 어쩌면 한 몸인 남편보다도 더 사랑하는 것이 자녀입니다. 왜냐하면 남편은 한 몸이지만 영적으로 다른 종교를 믿고있을 때에는 하나라고 할 수 없으며 또 이혼하는 순간 완전히 남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녀는 9개월동안 뱃속에 품고 그를 위해 기도하며 태교하며 낳았고, 밤잠을 자지않고 젖을 먹이며 기저귀를 갈아주며 그렇게 온갖 정성을 다하여 키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녀를 위해서라면 아버지보다 더 애틋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키운 자녀를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처럼 무작정 내보내라고 하시면 여러분은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교회도 없이 이방인들만 득실득실한 곳에 마귀의 권세아래 붙잡힌 사람들만이 있는 곳에 여러분의 아들을 보낼 수 있습니까?
그리고 이삭처럼 아들을 죽여서 불에 태워서 하나님께 바치라고 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그 아들을 죽이기 위하여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가면서 그 아들을 올려놓을 나무를 아들이 직접 어깨에 메고 올라가게 할 수 있습니까? 아마 아버지들은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엄마들은 이제 곧 죽을 아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서 올라가는 동안이라도 아들을 편하게 해주고 싶어서 어떻게든 그 나무를 아들이 메고가지 않도록 방법을 취할지도 모릅니다.
오늘날의 부모들은 자기 자녀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되건 별로 신경쓰지 않는 경향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도 별로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구약시대에 아이들은 사람 숫자에도 들어가지 못했는데, 오늘날에는 "인권(human rights)"이라는 이름으로 자녀들이 우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원한다면 그들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자녀들이 원하는 방법으로 해야한다는 성경과 다른 교육법으로 교회를 혼란시키고 있습니다. 그러한 교육은 자녀들과 부모들 간에 큰 골(gap)을 형성시킬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까지 흔들리게 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이 컴퓨터에 하루종일 앉아있고, 게임을 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엄마가 불러도 대꾸도 하지 않고 귀찮아 합니다. 그리고 엄마에게 말을 아무렇게나 해도 그들을 꾸짖지 말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자녀를 훈계하는 방법은 오늘날에는 통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지금이 어느때인데 그런 방식으로 자녀를 키우려고 하냐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의 교육방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지식보다 성경 지식을 많이 쌓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모르니까 세상 교육방법을 따라가고 세상의 문화를 좋아하고 세상의 모든 것들이 옳은 줄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이 굳어진 상태에서 그것과 반대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집어넣으려고 하므로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결코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선택할 때에도 자녀들의 교육시설이 얼마나 잘 되었는지부터 살펴봅니다. 목사님의 신앙노선이 어떠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인지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희 교회는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로 그와 반대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정말로 자녀를 사랑한다면, 자녀들의 취미나 교육환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제대로 먹일 수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주일학교도 없이 이렇게 어른들과 함께 아이들이 예배를 드리지만, 저희 교회에 나오는 아이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크게 쓰시는 귀한 사역자들이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뭘 얼마나 안다고 저희 교회를 좋아합니까? 다른 교회에 가면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노는 것이고, 우리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가 진짜 예배라고 말을 한단 말입니까? 친구도 몇 없는 이런 곳에서 어른들과 드리는 예배가 뭐가 재미있다고 이곳에 온단 말입니까? 그것이 바로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예배는 재미로 드리는 것이 아니고, 내 취향과 내 기분에 맞추어서 드리는 것이 아니며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이나 사람들과 드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며 나를 죽여서 희생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재미로 드리는 예배는 내가 죽지 않고 나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곳에는 하나님께서 오실 수가 없으십니다. 나를 위한 예배는 하나님이 죽으셔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죽이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형식상의 예배로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테스트를 하십니다. 우리의 고향을 버리고 우리의 부모님을 버리고 이제는 그것도 모자라서 아들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끔찍히 아끼고 사랑하는 아들을 여러분의 품속에 안고있지 말고 하나님의 품속으로 던지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너무나 힘들어합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가 어디라도 다치거나 상처를 받거나 잘못될까봐 하는 염려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품으로 그 아이를 던진다면 무엇이 걱정입니까? 오히려 우리 품에 안고있을 때가 더 걱정해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시험을 하실 때마다 우리가 그것을 통과하면 우리에게 더욱 큰 믿음을 선물로 주십니다.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자녀를 통한 시험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마지막 시험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향을 떠나고 부모님을 떠나는 것을 어쩌면 그렇게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나이가 들면 부모로부터 떠나서 자립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부모님과 사는 것을 힘들어 합니다. 그러나 자식을 떠나보내는 것은 죽는 것보다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내리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가족과 친척과 재물과 시간과 에너지와 달란트 등 모든 것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인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내보낼 때에도 아침 일찍 일어나서 내보냈듯이 이삭을 바치러 떠날 때에도 아침 일찍 일어나서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 9:62).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을 바치라고 하실 때, 그것을 어떻게 바칠 수 있을까요? 그 비결은 오늘 본문 말씀대로 자기를 죽이고 자기 십자가를 질 때에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살아있으면 절대로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버릴 수 없습니다. 그것이 매우 소중하고 돈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우리의 소유 중에서 가장 귀한 것이 자녀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자녀들은 우리의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잠시 세상에 살 동안 잘 맡아서 키우라고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에게 귀한 선물을 주신 분께서 그 선물을 다시 내놓으라고 하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마 여러 반응이 나올 것입니다. "벌써 포장지를 뜯고 사용하고 있어서 드릴 수 없는데요?", "선물을 주셨으면 끝이지, 왜 준 걸 다시 달라고 합니까?", "마침 아직 사용하지 않았으니까 드릴께요" 등 여러 반응이 있을 줄 압니다. 그런데 선물을 주신 분께서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어서 바꾸어주려고 하는데, 그것을 알고 있다면 이미 사용하고 있어도 군소리없이 드리지 않을까요? 오히려 감사하면서 기대하면서 드리지 않을까요?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시면서 이미 이삭 대신에 숫양을 준비해놓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숫양은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을 바치라고 하시며 또한 우리의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실 때에는 우리가 십자가를 지라고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실 것을 예비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하시는 것은 정말로 우리가 순종하는지를 보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십자가는 생각해보면 너무나 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저 주님만 믿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십자가와 비교할 수도 없는 고통이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고난과 아픔과 죄악을 모두 주께서 지고 가신다고 하는데, 그분께 드리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단 말입니까?
주님께서 여러분의 아들을 바치라고 하십니까? 예수님께서 그 아들의 자리를 대신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아들이 죽어야 마땅하지만 그 형벌을 예수님께서 대신 짊어지고 죽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아들이 마귀에게 상할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가셔서 여러분의 아들을 대신해서 마귀를 물리쳐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바치라고 하실 때에 그 테스트를 통과해야만 합니다. 그 테스트는 우리를 두렵게 하기도 하고 우울하게도 만듭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과하지 못하면 구원과 관계가 없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을 갖고 반드시 믿음의 테스트를 통과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장 사랑하는 자녀를 주님께 담대히 던지십시요. 예수님의 보혈로 여러분의 사랑하는 자녀의 모든 죄가 깨끗하게 될 것이며, 정죄함에서 벗어나 진리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못박혀 죽어야할 그 십자가의 자리에 예수님께서 대신 못박히심으로 댓가를 치르시게 하십시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여러분의 자녀를 하나님께서 바치라고 하는 그곳에 데려가야만 합니다. 그곳에 데려가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자녀를 대신할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테스트하실 때에 반드시 "피"를 요구하십니다. 즉 "희생"을 요구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반드시 희생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죄인인 우리가 나아가려면 반드시 희생의 피를 흘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그 무엇을 희생의 댓가로 바치라고 하십니다. 그것을 하려면 우리가 죽어야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죽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바쳤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바꾸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때에, 십자가를 말하지 않을 수 없고 피와 희생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큰 믿음을 원한다면 반드시 "피"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믿음을 공짜로 받으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물론 하나님께서 믿음을 은사로 주시지만, 그 은사를 받기까지 아브라함이 치르어야 했던 긴 여정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의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의 길은 내가 갖고있는 것을 모두 포기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주위에 많은 제자들이 왔었지만 요한복음 6장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모두가 돌아가 버렸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에 그 자리를 지켰던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 남자는 요한 하나만 있었고, 여자들만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목숨을 잃을까봐 걱정이 되어서 제자의 길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 성령을 받고 믿음이 생기자 그들은 자기들이 갖고있던 모든 소유를 포기하고 제자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는 자기들이 갖고있는 모든 것을 갖고와서 함께 나누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중간에 제자가 되기 위하여 준비해야할 2가지의 예를 들으셨습니다.
하나는 망대(tower)를 세우는 일인데, 그것을 세우기 위해서는 재료값이 얼마나 들어가며 인건비는 얼마나 들어갈지 먼저 계산을 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혀 계산해 보지도 않고 무작정 시작했다가 돈이 모자르면 기초공사만 하고 끝나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경우 사람들이 모두 비웃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두번째 예로 전쟁에 관한 것입니다. 어떤 왕이 전쟁을 하기 전에 상대편에 비해 자기편의 군사력이 얼마나 되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적군이 아군보다 훨씬 세력이 강해서 싸워봤자 질 것이 뻔하다면 전쟁을 하지말고 사신을 보내서 평화협정을 맺는 것이 좋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에게 제자가 될만한 능력이 있는지를 살펴보라고 하십니다. 무작정 따라 나섰다가 중간에 힘들어서 주저앉게 되면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만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 준비없이 제자의 길을 가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준비할 수 있도록 성경을 주셨습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제자의 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해 우리는 준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준비도 필요하지만 또한 버려야 할 것을 강조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준비도 하지 않고, 버리지도 않고 무작정 예수님을 믿겠다고 교회에만 나온다면 맛을 잃은 소금과 같아서 밖에 버리워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소금은 바닷물에서 채취한 것이지만, 이스라엘에는 '암염'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돌처럼 생긴 소금입니다. 이것은 자갈처럼 산과 들에 널려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양이나 염소가 지나다니면서 풀을 뜯어먹다가 염분을 섭취하기 위하여 암염 덩어리를 혀로 핥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많이 핥아서 염분이 다 빠져나간 암염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밟히는 돌멩이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제자가 되려면 소금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미 짠맛을 잃어버려서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덩어리는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귀찮게만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최선을 다하여 말씀으로 준비하고 우리의 모든 소유를 하나님께서 달라고 하시면 머뭇거리지 말고 드리면서(버리면서) 우리 자신을 매일 죽이는 훈련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경건의 훈련이며 제자의 길을 걸어가는 성화의 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위하여 다 버렸느냐?" "정말로 다 버렸느냐?" "다 버릴 수 있느냐?"
"만약 버리지 못하면 나와 관계가 없느니라~"
"다 버리지 못한다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느니라~"
"부디 다 버리고 내 제자가 되거라~"
오늘...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들을 다 버리고 주님과 관계가 있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칭찬받는 제자들이 되어서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받은 은혜와 감사의 제목은?
김 수 경
†he 2nd Life Foundation
뉴 욕 퀸 즈 교 회
Esther Soo-Gyung Kim, Pastor
오직 나와 내 집안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As for me and my house, we will serve the LORD!
(Joshua 2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