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모임에는 이현주 선생님과의 문답 시간을 가졌다. 각자 생각해 온 물음을 하나씩 묻고, 그에 대한 대답을 듣는 것. 나는 여기서 글을 비워내는 것을 들었고, 이에 대한 답을 들었다. 나는 글을 많이 써야 한다는 답을 들었다. 결국 나의 세계관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많이 쓰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분명 얼추 알겠음에도 확신이 없는 것들, 알게 모르게 오묘한 부분들을 확실하게 엮어내는 일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것이 지금의 나에게 삶이 주어준 과제라고, 내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전보다 명확하게, 그러나 담백하게. 현곡은 이번에 이현주 선생님께 나를 표현하는 말로, 좋은 글을 쓰려는 게 아니라, 남들에게 깨달음을 줄 수 있는 글을 쓰고자 하는 아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을 들으며, 나는 내가 그런 작가가 되고자 함이 내 스스로 작가이기 이전에 독자이기 때문이라고 느꼈다. 내가 이야기를 보고 많은 것들을 깨우쳤기 때문에, 나의 이야기에도 남들이 깨우칠 수 있는, 사실 누가 되었든 간에 그 자리에서 무언가를 깨우칠 수 있는 자리가 있었으면 했다. 그리고 이야기가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 많이 비워낼 수밖엔 없었다. 이야기에는 빈 공간이 많아야, 독자의 역할이 늘어나게 된다. 그만큼 독자를 통제할 수 없고, 독자가 멋대로 이야기의 의도를 곡해할 수 있지만, 내가 생각하기로 독자란 통제할 존재가 아니다. 왜냐하면 일단 내가 통제 받는 걸 실어 하는 독자이기 때문이다. 숨이 턱턱 막히는 이야기가 아니라,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펼칠 수 있는 자리. 그렇기에 두 번, 세 번째에도 이 자리를 찾았다가, 결국 더 깊이 숨겨져 있던 이야기의 속성을 이해하게 되는 그런 시나리오. 이것이 바로 내가 이야기를 쓰면서 종종 떠올리는 나의 독자들에 모습이다. 참 아름답지 않은가, 낭만적이지 않은가? 물론 당연히 그러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뭐가 어찌 되었든 간에 나의 소중한 꿈이기 때문이다.
이현주 선생님과의 문답이 끝나고, 이현주 선생님과 사모님을 배웅한 이후에 현곡이 다시 살림 교실에 모여서 짧은 모임 시간을 갖자고 말씀하셨다. 이유는 여시아문,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의 한 부분을 읽기 위함이었다. 그중에서도 맨 뒤, 이야기의 끝에 마이다 슈이치가 자잘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한 부분이었다. 개인적으로도 정말 좋아했던 부분을 다시 읽는 거라 즐거웠는데, 현곡은 이번 이현주 선생님과의 만남을 여시아문의 방식으로 적어보라 말씀하셨다. 그렇게 다시 한 번 여시아문이라는 인상적이었던 책을 대하며, 전에 떠올렸던 감상들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여시아문의 제목은 참 뻔뻔한 것 같았다. 또 그러면서도 굉장히 정곡을 찌르고 있다고 느껴지는 게, 이 여시아문이라는 제목은 마치 시의 제목을 시라고 짓고, 영화의 제목을 여시아문이라고 짓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는 생각이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 사실상 이 세상의 모든 창작물이란 이 문장으로 정의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러한 정체성을 간과하거나 잊은 채로, 겸손함을 잃고 거만한 작품을 써내려 가는 경우가 참 많은 것 같다. 그렇기에 나는 여시아문이라는 말의 의미를 처음 알았을 때, 참 뒤통수를 후려 맞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는 책을 읽으면서도 계속해서 이어 간 감상이었던 것이, 정말 여시아문은 나의 생각을, 내가 쥐고 있던 것들을 부숴버리는 경험들을 많이 하게 해 준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였기에, 나는 이번에 여시아문의 형식으로 이현주 선생님을 만난 이야기를 쓰는데 몹시 고초를 많이 겪었다. 또한 굉장히 좋은 경험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상 인식을 하고 보니, 정말 꼭 필요하지 않은 문장을, 단어를 내가 자꾸만 덧붙이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형상화된 영감은 특정한 형상으로서 나를 잡아먹고, 이야기를 진부하게,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었다. 분명 쓰여지기 전에 그 어떠한 형상으로도 얽매이지 않았던 자유 그 자체의 영감이, 글이라는 형태를 띰으로 인해서 자꾸만 얽매이고 진부해져 갔다. 그에 따라 마음은 조급해지고, 나는 내가 쓴 글에 이리저리 휘둘리며 초심을 잃고 죽은 문자들만을 새기게 될 뿐이었다. 정말 작가로서 너무나 절망적인 일이었다. 어쩌면 최대한 담백하게, 적은 말들로 내 의중을 표현하는 건 문장에 얽매이지 않기 위한 작가의 노력이지 않을까? 글을 쓰면서도 글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결국 끝끝내 까지 작가가 아닌 독자로 남는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나는 죽어있는 나의 문장들을 마주하는 것이 끔찍이도 싫었다. 하지만 이것이 내가 사랑하는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주해야만 하는 문장들이라는 건, 여태껏 이런저런 일들을 겪어오며 정말 잘 알고 있었다. 단지 나에게는 그것을 실행으로 옮겨 직접 마주할 용기가 부족할 뿐이었다.
“목표를 향한 노력에는 실패가 없어요. 이것은 성공의 단계일 뿐이에요.”
이 말은 오늘 유튜브 쇼츠를 돌려보다 보게 된 아데타 쿤보의 말이었다. 아데타 쿤보는 NBA의 농구선수로, 영상 속 인터뷰에서 기자에게 이번 시즌이 실패라고 생각하냐는 물음을 받고서 침착하고 논리정연하게 반박하며 마지막에 이런 말을 남겼었다. 우선 다투지 않는 것이 실력이라는 이번 학기 주제를 나타내는 듯한 모습에 첫 번째로 인상적이었고, 그의 가치관에 두 번 인상적이었다. 단지 실패를 두려워할 뿐인 나에게, 도전을 위해 꼭 필요한 가치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에는 문태준 시인의 시를 차용하여 자신의 오늘 하루살이를 말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에 나는 솔직하게 말해서, 저녁 모임 30분 전에 대략 적으로 시집에 시 제목을 둘러보고 몇몇 시들을 읽어보고서 알맞은 시를 고를 생각이었다. 그러나 막상 시를 찾아보기 시작하자, 내가 한 생각이 얼마나 오만한 것이었는지를 금방 알 수 있었다. 내가 본 문태준 시인의 시는 정말…, 너무나 진솔한 이야기 하나하나였다. 일상의 한 부분을 이야기 한다는 부분에서, 떠올리기 어려운 부분을 캐치해서 이야기 한다는 점에서 정말 참신했고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어쩜 이리 정곡을 콕콕 찌를 수 있을까. 순간순간을 대하는 태도도, 글을 대하는 태도도.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면이 있었다.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무언가로 꽉꽉 차 있는 사람이라면 이에 가로막혀 지나치는 부분들을 콕 집어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로서는 소홀히 그저 저녁 모임을 적절하게 때우기 위해 이용하려 했던 시집에서,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일종의 순수함을 마주한 셈이었다. 결국 나 또한 진솔하게, 오로지 느낌이 닿는 시를 찾아 차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결국 내가 고른 시는 다음과 같았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아서
문태준
그녀가 나를 바라보아서
백자와도 같은 흰빛이 내 마음에 가득 고이네
시야는 미루나무처럼 푸르게, 멀리 열리고 내게도 애초에 리듬이 있었네
내 마음은 봄의 과수원
천둥이 요란한 하늘
달빛 내리는 설원
내 마음에 최초로 생겨난 이 공간이여
그녀가 나를 바라보아서
나는 낙엽처럼 눈을 감고 말았네
나는 이 낙엽처럼 눈을 감고 말았네라는 말이, 마치 지금 이 시를 읽으며 얼떨떨해하는 나의 심정을 이야기하는 것만 같았다. 고로 나는 뒤통수가 얼얼한 이 경험을, 너무나 소중하게 간직하고자 오늘의 이야기로 남긴다.
behind : 또 하나 이야기에서 빼는 이유를 생각해 보자면, 여유가 있지 않을까 한다. 가끔 글을 쓰다 보면 이건 꼭 써야만 한다는 강박이 들 때가 있는데, 덜어내는 글을 쓰다 보면 그 강박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무작정 이야기의 파도 속으로 뛰어들기 전에, 잠시 여유를 가질 수 있다. 한 발자국 멀어진 채로, 내 마음에 중도를 잡은 채로, 조금 더 차분하게 이야기를 다룰 수 있다. 우와아아아악 하고 쏟아내는 느낌이 아니라, 급한 마음 가라앉히고 조곤조곤. 그러다 보면 오히려, 내가 놓치고 가게 되는 것들도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결국 이야기란 애초에 이야기 할 건 이야기 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첫댓글 하루! 잘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