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부여와 손을 잡다.
마한-말갈 연합(한예맥)이 고구려의 지배에서 벋어난 시점은 197년 경일 것이라 생각된다. 189년 요동태수로 부임한 공손도는 재빠르게 주위를 장악해 가면서 군벌로 성장한다. 처음에는 필요에 의해 고구려와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였겠지만, 발전을 위해서는 고구려와의 일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 준비과정으로 공손도는 부여와의 동맹을 원했고 선비와 고구려에 밀려 나날이 세력을 잃어가고 있던 부여 역시 공손도와의 동맹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공손도는 부여의 위구태(尉仇台)와 혼인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뜻밖의 사건이 고구려에서 발생하였다. 197년 발기와 이이모(연우)의 왕권 다툼이 벌어진 것이다.
삼국지 위지 고구려전
건안(建安:후한 헌제 196-220년) 중, 공손강(公孫康)이 출군(出軍)해 공격하여 그 나라를 격파하고 읍락(邑落)을 불태웠다. 발기(拔奇)는 형이면서도 즉위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연노가(涓奴加)와 함께 각기 하호(下戶) 3만여 명을 거느리고 공손강(公孫康)에게로 나아가 항복하고 비류수(沸流水)로 돌아가 거주하였다. 항복했던 호(胡) 또한 이이모(伊夷模)를 배반하자 이이모(伊夷模)가 다시 새로운 나라를 세웠으니 지금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발기(拔奇)는 마침내 요동(遼東)으로 가고 그의 아들은 구려국(句麗國)에 머물렀으니 지금의 고추가(古雛加) 박위거(駮位居)가 바로 이 사람이다.
발기와 연노부의 6만여 명이 대대적으로 반발하여 공손도(고구려전과 삼국사기의 공손강은 오류라고 생각함)에게 항복한 발기가 비류수에 살았고, 공손도가 출격하여 나라를 격파하였고, 이로 인해 수도를 옮길 정도이니 당시 고구려는 공손도에게 상당한 영토를 잃었을 것이다. 저자는 이 때 고구려가 낙랑의 지배권도 잃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고구려의 패퇴로 실질적 지배자를 잃은 낙랑을 차지한 것은 부여였을 것이다.
북사 백제전에 “東明之後有仇台,篤於仁信,始立國于帶方故地.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遂為東夷強國”라 하여 공손도와 혼인동맹을 맺은 구태가 대방 땅에 백제를 세웠다고 하였고, 삼국지 위지 부여전에서는 “漢末, 公孫度雄張海東, 威服外夷, 夫餘王 尉仇台更屬遼東. 時句麗·鮮卑彊, 度以夫餘在二虜之間, 妻以宗女”라 하여 공손도의 종녀와 결혼한 것은 부여왕 위구태라고 하여 차이가 있는데, 이는 부여의 위구태가 공손도와의 혼인동맹을 맺고, 대방을 차지한 기록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이 사실이 북사 백제전에 기록된 것은 후에 대방의 마한유민이 백제로 옮겨감에 따라 생긴 오류라 생각된다.
부여가 대방을 차지한 것은 앞장에서 인용한 기록들에서도 나타난다. 즉, 삼국지 위서 견초전에서 공손강이 초왕(峭王; 요동속국 오환대인 소복연(蘇僕延))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파견한 한충(韓忠)의 발언에 “我遼東在滄海之東,擁兵百萬,又有扶餘﹑濊貊之用” 이라 하여 공손강이 부여와 예맥의 병력을 이용할 수 있다고 하였고, 제기 延康元年(220년) 기록에 “濊貊、扶餘單于、焉耆、于闐王皆各遣使奉獻”라 하여 예맥과 부여선우가 동시에 (혹은, 예맥+부여의 선우가)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이 때 등장하는 예맥이 공손씨와 원수가 되어있던 고구려일 수는 없으므로 낙랑의 예맥 즉, 마한-말갈 연합의 한예맥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 낙랑을 차지한 공손도가 이를 낙랑과 대방으로 나눈 이유는 무엇일까? 요동군을 나누어 요서군과 중요군(혹은 요서중요군)을 설치하여 태수를 두었던 공손도이니만큼, 같은 이유로 나누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피치 못할 중대한 이유가 있었을 수도 있다.
삼국지 위지 한전 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爲帶方郡, 遣公孫模·張敞等收集遺民, 興兵伐韓濊, 舊民稍出, 是後倭韓遂屬帶方.
낙랑을 차지한 공손도(또는 공손강)는 구심점을 잃고 흩어져있던 낙랑인(遺民)들을 모으는 한편, 마한-말갈 연합과 동일 민족인 부여의 위구태를 내세워 반발을 최소화한 후, 낙랑을 장악하고 있던 한예(韓濊)를 공격하자 마한-말갈(舊民) 연합은 항복하고 위구태의 부여를 실질적 지배자로 받아 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 50여 년간 피지배층으로 전락했던 낙랑인과 지배층이었던 마한-말갈 연합 사이에는 앙금이 크게 쌓였을 것이고, 이로 인해 낙랑인은 낙랑군에, 마한-말갈 연합은 그 근거지가 있던 대방군에 나누어 통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영찬은 낙랑군연구에서 유민(遺民)을 낙랑의 한인(漢人)으로 보고, 구민(舊民)을 고조선 유민으로 보았는데 낙랑군이 설치된 지 300년이나 지난 시점까지 한인(漢人)과 고조선 유민이 융화되지 않았을 수 없고(오영찬은 이미 낙랑인의 출현을 이야기하고 있다), 대방군을 분리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으므로 저자의 설명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제 마한-말갈 연합의 실질적 지배자는 부여가 되었고, 후한과의 조약을 통해 안정을 추구했던 고구려와는 달리, 부여나 공손도는 영토 확장을 꿈꾸었기 때문에 마한-말갈 연합의 복수를 용인하였을 것이다. 이제 부여의 지원을 받는 말갈은 다시 백제와 신라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내해이사금
8년(203) 겨울 10월, 말갈이 국경을 침범하였다.
초고왕
45년(210) 겨울 10월, 말갈이 사도성에 와서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자 성문에 불을 지르고 도망하였다.
49년(214) 가을 9월, 북부의 진과에게 명령하여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고 말갈의 석문성을 습격하여 빼앗게 하였다. 겨울 10월, 말갈이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침입하여 우술천에 이르렀다.
구수왕
3년(216) 가을 8월, 말갈이 적현성에 와서 포위했으나 성주가 굳게 수비하니 적이 퇴각하였다. 왕이 정예 기병 8백 명을 거느리고 그들을 추격하여, 사도성 밖에서 격파하였는데, 죽이거나 사로잡은 적병이 많았다.
16년(229) 11월, 말갈이 우곡에 들어와 사람과 재물을 약탈하였다. 왕은 정예군 3백 명을 보내 방어하게 하였다. 그러나 적의 복병이 양쪽에서 협공하여 우리 군사가 대패하였다.
앞서 인용한 견초전에서 오환의 초왕에게 견초가 사신으로 간 시기는 조조가 원담(袁譚)을 격파(205년)하기 전이고, 말갈의 공격은 부여와 마한-말갈 연합이 동맹을 맺은 이후라야 가능하였다고 가정하였을 때, 말갈이 신라를 공격하던 203년 이전에 공손도는 낙랑을 차지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그 시점은 197년에서 203년 사이일 것이다. 공손강 때에 이미 점령한 낙랑을 낙랑군과 대방군으로 나누었으므로 삼국지에 마치 낙랑군을 차지한 시점을 공손강 때의 일인 것처럼 기술된 것이 아닌가한다.
그러나 부여의 낙랑 지배는 곧 끝나고 만다. 공손강의 사망(220년 또는 221년) 이후 공손공이 집권하면서 공손씨-부여의 동맹은 그 힘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 같다. 황초(黃初, 220-226) 중에 부여에 신속하던 읍루가 독립을 쟁취하였다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삼국지 위지 읍루전). 그리고 216년 이후 229년까지 말갈의 공격이 없었던 것은 부여의 지원이 원활치 못한 것이 그 원인이 아닌가 한다.
이제 마한-낙랑 연합은 약해진 부여를 버리고 다시 강력해진 고구려와 손을 잡는다. 그 시점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말갈의 마지막 공격이 229년에 있었다는 점으로 보아 공손연이 공손공으로부터 정권을 빼앗은 228년부터 공손연과 위나라의 사이가 급속히 나빠지던 232년 사이가 아닌가 한다. 그 이유는 앞장에서도 인용한바있는 위명신주(魏名臣奏)의 하후헌(夏侯獻)의 표(表)에서 알 수 있다.
宿舒親見賊權軍衆府庫,知其弱少不足憑恃,是以決計斬賊之使.又高句麗﹑濊貊與淵爲仇,並爲寇鈔.(숙서(宿舒)가 친히 적(賊) 손권의 군중(軍衆)과 부고(府庫)를 보고는 그들이 약소(弱少)하여 의지하기에 부족하다는 것을 알아 이로써 적(賊)의 사자를 참수할 계책을 결정했습니다. 또한 고구려(高句麗), 예맥(濊貊)이 공손연과 원수 사이가 되어 아울러 구초(寇鈔)했습니다.)
이 표에서 숙서(宿舒)가 오나라를 방문한 것을 언급하면서 고구려 및 예맥이 공손연과 원수가 되어 싸우던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데, 공손연이 숙서(宿舒), 손종(孫綜)을 오나라에 보낸 것은 232년 10월의 일이므로, 이 시점 이전에 예맥 즉, 마한-말갈 연합이 공손연-부여의 동맹과 결별하고, 고구려와 동맹을 맺은 것이 아닌가 한다. 예맥이 단독으로 공손연과 싸우기에는 절대적으로 힘이 부족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때 고구려는 낙랑-대방을 차지하지 못하였다. 전쟁의 신 사마의가 고구려의 성장을 용인할리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