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 고린도전서 12:12-31
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14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15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6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19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22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23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24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29 다 사도이겠느냐 선지자이겠느냐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30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지난 시간에 이어서 은사와 은사의 목적에 대해서 함께 나누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 보면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함이라는 말씀이 계속 나옵니다. 그러니까 은사의 목적은 한 마디로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함이라는 거예요.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심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안에서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덕이라 함은 유교나 불교에서 말하는 겸손이나 겸양, 자기를 낮춤, 상대를 배려함 등의 덕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덕은 같은 속성과 본질로 지어져 가는 하나님의 집 짓기를 말합니다. 완전히 다른 이야기죠? 여기서 덕은 ‘건축하다’라는 뜻의 ‘오이코도메오’입니다. 그 하나님의 집을 짓는 일이 이 세상에서는 ‘교회’라는 형태로 잠깐씩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집이 건축되는 곳이에요. 묵시 안에는 이미 완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서 지상의 교회가 존재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아파트 모델 하우스처럼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모델 하우스인 셈입니다. 속히 입주하길 기다리면서 맛만 보는 곳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교회를 통해서 배워야 하는 것은 아들을 죄인들에게 내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또 죄인들을 위해 피 흘리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집으로 지어져 가는 그것입니다. 그 모든 과정에서 성령의 각종 은사가 나타나게 되고 또한 그 모든 은사는 하나님 나라, 그러니까 내가 만인을 섬기고 만인이 나를 섬기는 하나님 나라의 본질과 속성을 보여주는 은사임을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사도가 사람의 몸을 모델로 해서 설명해 주고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은사를 받아서 내가 완벽한 사람이 되고 능력자가 되는 게 아니고 마치 어린아이처럼 그 은혜와 사랑을 누리고 즐거워하고 찬송하는 것이 바로 교회의 본분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절대 의존적인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는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에요. 은사는 주시는 분이 따로 있고, 또 주시는 분의 목적대로 기능하는 은사입니다. 그리고 주시는 분이 거두어가시면 그냥 쉬면 됩니다. 쉽게 말하면 한 번 장로는 영원한 장로 그런 건 없단 말입니다.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잖아요. 교인들 투표로 장로 직분을 받으면 항존직이라고 해서 끝까지 장로죠. 그러나 교회의 직분은 오직 성령의 은사로만 기능합니다. 그리고 그 직분은 성령께서 은사를 주시는 동안에만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되는 직분이에요. 은사를 거두어 가시면 쉬면 돼요.
그러니까 내가 능력을 발휘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게 아니라 나부터 하나님의 집으로 지어져 가는 모든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게 은사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으면 되는 거예요. 그것을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 자기 자신을 검열하고 반성하고 다듬고 하는데 그런 걸 하지 말라는 거예요. 어린아이처럼 엄마가 먹여주는 신령한 젖을 먹으면서 그냥 자라나면 됩니다.
(베드로전서 2장)
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2 갓난 아기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이게 성령의 은사가 하는 일이에요. 어린아이들에게 젖먹이는 일입니다. 기저귀를 찬 젖먹이는 엄마가 기저귀 갈아주고 모든 것을 공급해 주죠. 그러니까 믿음 안에서 산다는 말은 그냥 사는 거예요. 완벽해지려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벽을 기대하시지 않습니다. 우리 육신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은사는 성령의 은사인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을 알면 됩니다. 안다는 말은 그분과의 사귐 안에 있다는 말이에요. 그 사귐만으로 충분한 상태를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내어주신 그 사랑만 남기시기를 원하신단 말입니다. 스바냐서에 보면 하나님이 기쁨을 참지 못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지요. 그냥 보시기만 해도 좋은 겁니다. 왜? 우리 안에 예수가 있기 때문에.
오늘은 12장에 나오는 모든 은사 가운데서 바울이 콕 찍어서 이야기하고 싶은 방언에 관해 공부하겠습니다. 방언은 고린도 교회에서 가장 오해가 많은 부분이고,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전에 9절에 나오는 병 고치는 은사를 먼저 말씀드릴 텐데, 그 이유는 이런 것으로 사기 치는 자들이 많아서입니다.
여러분, 병은 왜 생깁니까? 죄 때문입니다. 모든 병은 죄의 증상으로 나타납니다. 에덴에서는 병이 없었어요. 벌거벗고 다녀도 피부병이나 감기가 없었어요. 그래서 성령의 은사로 병을 고친다는 것은 병이 낫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에요. 병의 근본 원인인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데에 목적이 있어요.
마태복음 9장을 보면 예수님이 중풍 병자를 낫게 하십니다.
(마태복음 9장)
1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2 침상에 누운 중풍 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3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
4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5 네 죄 사람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예수님이 중풍 병자를 고치시고는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십니다. 여기에 목적이 있는 거예요. 중풍이라는 병이 문제가 아니라 죄가 문제입니다. 사도들 역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지만, 그 능력이 사도들에게서 나온 게 아니잖아요. 성령의 역사로 예수님의 주되심을 증거하는 게 목적이었어요. 복음이 목적이라니까요. 이게 병 고치는 은사를 주신 목적이에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죽을 병이 나았다고 해서 다시 안 죽습니까? 다 죽어요.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는데, 그 나사로가 다시 죽었잖아요. 성경에서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란 말에요. 모든 능력과 역사가 다 예수님의 주되심을 증거하는 거예요.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님을 말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은사는 성도의 유익을 위해서라고 합니다. 10절에서부터 나오는 내용이 14장에서 다시 반복되는데, 그만큼 이런 은사를 오해할 소지가 많기에 사도가 반복 설명을 하는 겁니다. 한 마디로 모든 은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하늘의 신령한 복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고 또 그것들을 사모하고 이 땅에서도 누리며 살게 하기 위해서 주어지는 것이지 그 은사를 내 목적을 위해서, 내 필요를 위해서 챙기고, 또 내 목적대로 사용하거나 사람들에게 자랑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교회의 목적을 위해서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 있는 자들은 이미 모든 은사를 다 받은 자들이에요. 그 믿음 안에 모든 은사가 다 있단 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성령의 은사 없이 예수를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문제는 그런 믿음 없이 은사라고 사기 치는 자들입니다. 주가 되신 분과의 아무 관계성이 없는데도 능력의 종, 은사의 종이라고 사기 치는 자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6장에도 나오잖아요.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그러니까 주님과의 관계가 없이도 얼마든지 그런 현상이나 능력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2절부터 사도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야기합니다. 아까 말씀드리기를 은사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라고 했죠.
앞에서 읽은 에베소서 1장을 보면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한마디로 그리스도의 충만이에요. 그리스도의 충만이 누굽니까? 바로 여러분이에요. 하나님은 여러분이 아니면 스스로 하나님이 안 되기로 하셨다니까요. 여러분이 아니면 충만하지 않기로 하신 거예요. 이게 한 마디로 사랑이죠. 유행가의 사랑과는 완전히 질이 다른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게 통일되는 충만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통해서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몸을 중심으로 모든 세계 만물,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 게 새롭게 형성되는 것을 하나님의 경륜, 비밀한 경륜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먼저 우리 몸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충만이 되기 위해서 성령이 역사하셔야 합니다. 성령이 오신 목적이 그거예요. 이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성령의 능력과 은사로 우리 몸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새롭게 지어져 갑니다. 성경이 말하는 교회는 이런 그리스도의 몸으로의 교회입니다.
(에베소서 2장)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분명하죠? 모퉁이 돌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똑같은 본질과 속성의 돌들로 하나님의 집으로 함께 지어지는 겁니다. 이것을 성경이 덕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몸으로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지어지는 일을 위해서 성령이 오셨고, 또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거기에 대한 설명이 오늘 본문 12절에서 31절입니다. 사람의 몸을 모델로 해서 설명하고 있어요.
그럼, 성령께서 새롭게 만드신 그 몸이 어떤 몸인지를 지금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바울 사도가 사람의 몸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설명하는데, 그렇다고 그리스도의 몸이 인간의 몸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의 몸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없죠. 아프면 내가 아픈 거지 가족이 아픔을 대신할 수는 없어요. 그런데 본문에 보면 한 사람이 고통을 받으면 그리스도의 몸 전체가 아프다고 해요. 이런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면 교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같은 신학을 하고 같은 교단 간판 아래 모여도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아니라는 거예요. 인간들의 어떤 능력으로도 한 몸을 만들 수는 없으니까요. 생각해 보세요. 나는 나인데, 내가 어떤 사람의 눈이 되거나 귀가 될 수는 없어요. 자기 몸의 한 부분으로 여길 수가 없단 말입니다. 부분이 아니라 ‘나’가 전부예요. 나는 나로 인해 살고 나를 위해 살고 있습니다. 아무리 부부라도 부인이 출산할 때 남편이 같이 아파하지는 않잖아요. 이렇게 누가 나를 대신할 수 없는 것을 철학에서는 실존주의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몸은 그 출발이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한 분의 죽음에서부터 그 몸이 잉태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인간들의 능력 밖의 일이에요. 오직 하나님의 약속과 전능으로만 이루어집니다. 그러니까 나 대신 죽으신 한 분으로 인해서 내가 살고, 그분이 채찍으로 맞으심으로 인해서 내가 나음을 입는 이런 비이성적인 현실에 참여된 자들이 한 몸 된 교회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등장하는 거에요.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 한 분이 죽으심으로 해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건 세상 사람들이 들었을 때 도저히 이해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의 한 몸 된 교회만 이해가 되는 거죠.
(고린도후서 5장)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이걸 사랑이라고 해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이 말은 그 사랑이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에게 강제적으로 부어졌다는 말입니다. 죽음이라는 죽음같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 안에서 한 몸이 지어집니다. 사도바울은 12절에부터 그걸 이야기하고 있어요. 고린도 교회가 그 그리스도의 한 몸 된 교회를 아는지 묻습니다.
저에게 교회 문제로 상담하시는 분들이 항상 묻는 게 어디 좋은 교회 없느냐고 합니다. 세상 교회들이 다 썩었는데, 어디 건강한 교회가 없느냐고. 그러면 제가 답하죠. 그런 좋은 교회를 찾으려고 하지 말고 당신이 교회가 되는 게 먼저입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라면 어떤 교회에 가도 상관없습니다. 심지어 대한불교 조계종에 가서 앉아 있어도 당신은 교회입니다. 거룩한 교회입니다. 세상 교회들이 다 없어져도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완성되어 있고 또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 거룩한 교회는 묵시 안에 완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 지상에 교회가 하나도 없어도 하나님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목사가 한 사람도 없어도 아무 불편이 없어요.
그런데도 신학교에서는 하나님도 교회가 없으면 아무 일도 못하신다고 가르칩니다. 그건 개신교가 아니라 가톨릭이에요. 가톨릭은 구원이 교회에 있다고 하기 때문에 그리 말할 수 있어요. 그들은 교회의 권위가 성경 위에 있다고 하니까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셨어요.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입니다. 인간이 손을 댈 수도 없고 어떤 악마도 해칠 수 없어요. 그게 교회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런 거룩한 교회는 인간들이 만들 수가 없어요. 인간의 선택이 아니란 말입니다.
교회를 자꾸 개혁한다고 하는데,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교회는 인간이 개혁할 수 없어요. 그리고 그 교회는 한 번도 타락한 적이 없어요. 머리가 그리스도신데 몸이 어떻게 타락합니까? 교회는 인간들의 손을 떠나 있어요. 그 교회를 배우기 위해서 세상 교회가 있어야 합니다. 세상 교회의 용도는 그거예요. 이것이 아닌 저 교회라는 것을 배우기 위해 있는 게 세상 교회예요.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말 그대로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있고,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 있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건 사람의 의지나 열심으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 있다는 말은 하나님의 약속이 실행된 교회만 교회라는 뜻이에요. 에베소서 1장 3절부터의 말씀처럼 창세 전에 이미 아들의 피로 죄의 속량이 이루어졌다니까요. 그때 우리는 없었잖아요. 우리가 있기도 전에 아들의 피가 먼저 있었단 말이에요.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 교회만, 그렇게 아들의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아들들이 된 그 교회만 교회라는 말이에요. 그것을 배우기 위해서 여러분은 지금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완성된 교회는 이 역사 속에 오신 성령에 의해서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 현재 진행형이에요. 물론 묵시 안에 있는 그 교회의 그림자로서 지상의 교회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데 그게 언제입니까? 창세 전이죠. 그 창세 전 주님의 십자가에 못 박힌 현실이 역사 속에서도 똑같이 재현되었습니다. 이천년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자기 사람들을 품에 안고 함께 영단번의 제사로 하나님께 드려졌습니다.
창세 전에 이미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아들들이 지음을 받았고,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과 죽음 같은 사랑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날 우주 물리학자들이 아무리 연구해도 알 수 없는 게 태초, 즉 시작을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하는 말이 그냥 우연히 빅뱅, 거대한 폭발이 있었고 우주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밖에는 설명이 안 돼요. 그런데 성경은 그 태초로부터 시작하잖아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리고 성경은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분의 그 창조의 목적은 아들의 영광, 그리고 아들 안에 있는 아들들을 위해서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
그러니까 억지로 아등바등 돈 벌려고 생각하지 마세요. 통장 열 개 있어도 아무 소용 없어요. 그거 가져서 뭐 할 건데? 이 우주 만물이 모두 너희 것이라고 하는데..실감이 안나세요? 부자집 앞에서 구걸하던 나사로 천국 갔다니까요 그 이름부터가 ‘하나님이 도우신다’에요 평생을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 안으로 사라진 거에요 그 하나님을 받았으면 다 받은 거잖아요.
그렇게 성도는 이 세상 속에 있으면서 세상과도 구별된 다른 존재예요. 세상이 가는 그 길로 같이 갈 수가 없는 사람들이에요. 세상은 맘몬을 섬기죠. 많이 소유하는 게 생명인 줄 알아요. 그런데 그 맘몬은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맘몬이 줄 수 있는 건 nothing이에요. 며칠 전 카페에도 올렸는데, 돈(맘몬)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인간만 몰라요.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어요. 하늘을 나는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 그들은 수고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먹이고 입히시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백합화 한 송이 피는 것, 하늘에 새들이 나는 게 다 하나님의 영광이에요. 그들은 그 하나님의 영광을 다 드러낸단 말이에요. 그런데 인간들은 다른 것을 좇아가잖아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지어진 인간이 돈을 좇고 권력을 좇고 세상 힘. 이건 모두 자기 이름이죠.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 자기 이름을 위해 살아갑니다. 노아 홍수 후에 사람들이 바벨을 쌓았는데, 그 목적이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서였어요 하늘 끝까지
그러니까 이 세상 교회들이 같은 간판을 붙이고 하나 되려고 해도 그건 목사의 욕심이지 대한 예수교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함께 못 박힌 적이 없기 때문에 그 생명도 나누어지지 않은 거예요. 대한 예수교는 사람의 신학과 교리로 뭉친 집단이지 예수님의 부활의 몸과 연결된 산 자들이 모임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총회 하면 돈봉투나 돌리고 그 따위 짓이나 하죠.
나는 참 이해가 안 돼요. 노회장, 총회장이 되면 뭐 할 거예요? 그게 생명책에 기록되는 겁니까? 전부 다 자기 이름이잖아요. 내 인생에 이름 한번 남기고 싶은 겁니까?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는데, 그 이름이 저주라는 사실을 모르는 겁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에 예수의 이름만 남기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계시록에 보면 성도들의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니까요. 우리가 이렇게 교회로 모이는 것도 예수 이름으로 모이잖아요. 예수 이름으로 모인다는 말은 각자의 이름이 하나님에 의해서 빼앗겼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왜 총회장 한번 돼 보겠다고 봉투 돌리고.. 그건 교회 아니에요.
그렇게 스스로 계신 분의 몸 안에서만 있음이 된 자들로서 각자 지체이기 때문에 그 지체들은 스스로 자기를 돌볼 필요가 없고 또 내가 나에 대해서 어떤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기를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에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를 하나님이 체크해서 갈구신다면 구원받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자존심 때문에 나를 책임져보려고 하는데, 제발 그런 거 하지 마세요. 어린아이들처럼 똥 싸고 오줌 싸면 엄마 아빠가 다 치워주신다니까요. 여러분이 여태까지 살면서 싸놓은 똥이 얼마나 많겠어요?
그렇게 내가 나에 대해서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입니다. 한 마디로 내 인생이라는 게 없음을 평생 확인당하면서 살게 되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뭐라고 합니까?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하죠. 이건 나에게 주가 계신다는 뜻이에요. 그들을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라고 합니다. 27절에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 하잖아요. 그들만 주가 계심을 알게 됩니다. 그들만 자신을 점검하고 판단하지 않아요.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선악의 몸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 독생자(모노게네스)의 지체로 사는 게 무엇인지를 인생 끝 날까지 배우게 됩니다.
선악이 하나로 된 모노게네스.. 모든 인간은 두 마음을 가진 자인데,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그 선악의 두 마음으로부터 유일하게 자유로우신 분이에요. 그래서 독생자라고 합니다. 독생자라는 번역이 좀 이상한데, 모노게네스, 선악이 하나인 분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하시는 모든 일이 선이에요. 경건하다는 유대인에게 쌍욕을 해도 선이고, 성전에 들어가서 채찍을 휘둘러 상을 뒤집어엎어도 선이고, 세리 창녀들과 술을 마셔도 선이에요. 하나님이 정하신 몸은 그런 몸입니다. 히브리서 10장에 하나님이 한 몸을 예비하셨다고 하는 그 한 몸이에요. 그 한 몸을 이루는 자들을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10장)
5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이 몸이에요. 그리고 이 몸은 우리 각자의 몸이 합쳐져서 되는 몸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으로 지어지는 몸,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시는 그 몸으로서 우리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빠져야 합니다. 이 몸을 이루는 일에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역할로 세상 종교인들의 모임, 소위 말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목사, 장로, 집사를 투표로 뽑아서 세우는 교회는 그 한 몸과 상관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할입니다. 그런 인간들의 종교성이 부정되면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역사 속에 발생합니다. 묵시 안에 완성된 교회가 지상에 나타날 때는 그런 사건, 말씀의 사건으로 나타납니다. 성령의 은사로서 나타나는 교회입니다. 표현이 좀 어려운데 이렇게밖에는 설명할 수 없음을 이해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성도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죽음, 그러니까 그 언약의 죽음을 계속 재현하면서 그 한 몸의 거룩과 그 한 몸에서 나누어지는 생명을 누리고 찬송하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주신 은사의 목적은 그런 거예요. 그러면서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않음을 알게 하심을 위해 성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성령이 주체로 일하십니다. 지금도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고, 또 우리를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짓기 위해서 우리의 모든 불순물을 쳐내시는 일도 같이 하십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부터의 말씀이 모두 그 말씀이에요. 그건 우리에게 절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일들이지요. 핍박받고 우겨싸이고 따돌림 받는 게 왜 있어야 합니까?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지으시는데 불필요한 불순물들이 그런 사건을 통해서 하나씩 털려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큰 은사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화목제물로 내어주신 그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거예요.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한 몸으로 지어져 가는 것이에요. 아담이 실패한 그 한 몸이에요.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은 자기 몸에서 나온 하와에게 선악과 먹은 책임을 떠넘기잖아요.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고 했던 아담이 범죄의 책임을 자기 여자에게 떠넘겼단 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결혼한 부부가 같이 살면서 배우는 게 뭡니까? 우리는 결코 한 몸이 될 수 없다는 거죠. 그거 배우라고 결혼하는 거예요. 아담에게 받은 이몸으론 절대 천국 못간다는 거
그럼, 창세기 2장 24절의 그 “한 몸이 될지니라”의 한 몸은 뭐예요? 분명히 하나님이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고 하셨거든요. 그 몸은 뭐냐고요? 그건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에 의해서 한 몸을 이루는 그 교회 이야기입니다. 그 일을 하시는 분이 성령이고, 성령의 은사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한 몸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사람과 같이 되셔서 죄인들과 연합되신 거예요.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면서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신 게 그런 뜻입니다. 예수님이 죄인과 연합되셔서 죄인들이 받아야 할 심판을 대신 받으시므로 해서 창세 전 아버지와의 약속이 다 이루어지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마침내 성령이 교회에 오시게 된 거예요. 아담이 우발적으로 선악과 범죄를 저질러서 부랴부랴 대책을 세우신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언약의 죽음에 기초한 성령의 오심, 그 성령께서 예수님의 몸 된 교회에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거저 넘겨주신 근거가 됩니다. 그 죽음이 근거가 돼요. 그래서 그 어떤 것도 그 일에 토를 달고 시비를 걸 수 없어요. 로마서에서 그러잖아요. 누가 너희를 정죄하리요..
그래서 교회는 세상 끝 날까지 그 한 가지 일, 즉 예수님의 죽으심을 전해야 합니다. 지붕 위에 십자가 세워놨다고 교회가 아닌 거예요. 언약의 죽으심이 뭔지 모르면 교회 아니에요. 교회가 할 일은 그거예요. 11장 26절의 말씀 그의 죽으심을 전하는 일.
그렇게 성도들에게 거저 입혀주신 의와 거룩이 어떠한 것인지를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심으로 깨닫게 되고 (이게 지식의 은사, 지혜의 은사입니다.) 그 은혜와 사랑을 찬송하는 일에 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은사를 주신 목적은 그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여기서 말하는 거룩, 의, 지혜, 구원은 원래 우리에게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것들을 잘 깨닫고 잘 개발해서 발휘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우리의 거룩이요 예수님이 우리의 의요 예수님이 우리의 지혜요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 외부의 누군가가 거저 입혀주시는 것으로 구원받는 게 은혜의 영광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자꾸 자기를 계발해서 하나님의 진리에 도달하려고 하는지 참, 그걸 한 단어로 종교라고 합니다. 그 대표적인 게 불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가 전부 불교화 되었어요. 전부 그걸 따라가요. 불교는 자기 안에 있는 신성(불성)을 지혜로 깨달아 해탈해서 자기도 신이 될 수 있다,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서 시작한 건데 기독교가 전부 그쪽으로 가버렸어요.
전에도 얘기했지만, 성경 공부가 어떻게 보면 참 위험할 수가 있습니다. 성경 안에 숨겨진 진리를 깨달아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것. 그건 복음 아니에요 요즘은 교회가 관상기도니 뭐니 희안한 짓거리를 하는데 불교에서 말하는 ‘선’ 있잖아요. 그런 거해서 영성을 개발한다? 그건 불교지 기독교가 아니에요. 선악과 따먹은 행세를 그렇게 드러내는 겁니다.
이렇게 방금 읽은 고린도전서 1장 30절 같이 반드시 그리스도의 세례, 그 죽음 안에 함께 묶인 자로서 교회의 정체성이 있습니다. 그 죽음에 연합되지 않으면 교회가 없어요. 그런데도 자꾸 십자가를 피해 가려고만 합니다. 바울이 그랬잖아요. 나는 그리스도 예수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알지 않기로 했다는데 말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그 죽음이 뭔지를 모르고, 그 죽음에 연합되는 게 뭔지를 모르면서 자꾸 성령 받아 거듭나고 성령 은사, 세컨브레싱, 임파테이션이 어저고 그러는데 제가 단언하지만 십자가를 모르면 아무것도 모르는 겁니다.
(로마서 6장)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이 연합이에요. 이 연합이 없으면 여전히 죄의 지배 아래 그대로 있는 겁니다. 이 연합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은 자가 됩니다. 죽은 자에게는 죄도 사망도 역사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가 됩니다. 이게 바로 새 생명으로 행하게 하심이에요
그리스도의 한 몸은 그런 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그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은사가 나타나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은사의 기능은 바로 그 한 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거예요. 너희들은 이미 죄에 대해서 죽은 자이고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로서 한 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한 몸 된 교회에는 어떤 차별이 있어서도 안 된다..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그리스도의 한몸 지체가 되었기 때문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일본 사람, 중국 사람, 대한민국 사람, 미국 사람 누구라도,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을 마셨고 같은 세례를 받아서 같은 생명으로 살아난 자들이기 때문에 어떤 차별도 없다는 게 13절부터의 내용이에요.
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그 지체들에는 어떤 차별이 있을 수가 없다.. 모두 예수님의 공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기 때문에 종이나 자유자나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다 한 성령을 받아 마셨다.. 평생 강도짓을 하다가 십자가에 달린 강도나 복음 전도로 죽을 고생을 한 바울이나 그리스도의 한 몸의 지체로서 누가 더 귀하고 덜 귀한 차별은 없다는 말입니다. 유영철이나 강호순 같은 연쇄 살인범들도 성령이 임하면, 그리스도의 다 이루심을 거저 전가하시는 성령이 임하면 예수님의 의와 거룩이 아무 대가 없이 그들에게 입혀지고 그러면 그들도 아무 차별이 없는 한 몸이 됩니다.
아마 나중에 우리가 그 나라에 가 보면 깜짝 놀랄 일이 많을 거예요. 분명히 와 있어야 할 사람은 없고, 없어야 할 사람을 보게 되는 일들이 생길 겁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몸은 인간들의 됨됨이나 인간들의 행위가 조건이 될 수 없는 몸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죽으심에 기초한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에 인간들의 판단이나 협조와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약속의 실행이며 또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영광)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은 자기 영광 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은 자기밖에 모르는 분입니다. 자기 뜻대로만 행하시는 분이에요. 그것을 다른 말로 전능이라고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모든 인간의 생각이나 뜻이나 기도를 다 들어주시면 어떻게 되겠어요? 문제가 참 많겠죠? 여러분도 마찬가지예요. 평생 기도를 많이 하셨을 텐데 그 기도를 다 들어주셨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저는 끔찍합니다
그런데도 고린도 교회는 그런 하나님의 뜻을, 그런 성령의 역사를 오해했습니다. 자신들이 그런 은사를 받을만한 자격이 있고, 또 자신의 믿음에 따라 보상으로 그런 은사가 주어진 줄로 알았어요. 내가 얼마나 믿음이 없었으면 이런 은사를 주셨을까, 내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기기에 얼마나 부족했으면 이런 은사까지 주셨을까 라고 생각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에게서 은사의 조건이나 자격을 찾으려고 했단 말이에요.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원에 가서 나무뿌리를 왜 뽑습니까? 거기에 뭐가 들어갑니까? 밤잠 안 자고 나무뿌리를 뽑은 내 의지 노력이 들어가잖아요. 그건 벌써 은사가 아닌 거예요. 은사는 말 그대로 거저 주시는 선물이에요. 고린도 교인들이 그랬단 말에요 자기에게서 조건이나 자격을 찾으려는 사람들.. 그렇게 잠 안 자고 철야하고 금식하고 자기 몸을 학대까지 하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야 말겠다는 선악과 먹은 아담의 열심
어떻게 그렇게도 하나님과 성경을 오해할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오늘날 한국 기독교가 이방 종교화되었어요. 요즈음은 은사뿐만 아니라 남들보다 새로운 지식, 신상을 가져 보겠다고 모여서 원어 공부하는 사람들많은데요.. 참 한심하죠. 그러니까 결국 은사가 하나님의 선물로서 은사가 아니라 자기 선택, 자기 열심, 자기 깨달음의 산물이 되었어요. 그래서 은사의 목적을 알지 못하면 결국 남는 건 자기입니다. 원어까지 알고있는 기특한 나
여기서 우리는 은사라는 것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길로 가버린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말씀을 믿지 않고, 복음의 진리를 붙들지 않고 자기가 본 것, 자기가 체험한 것들을 믿는 것. 그러면서 그런 것에 예수 이름만 가져다 붙이는 자들 그들을 예수 무당이라고 합니다. 방언하고 예언한다면서 길흉화복을 점쳐주고 신비주의 기복주의로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 우리가 수없이 많은 그런 양복 입은 무당들을 봐왔잖아요. 우리가 거쳐 온 세상 교회들, 한국 교회를 망친 그런 신비주의, 기복주의.. 요즈음은 또 신사도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미혹하던데, 기가 막힌 사람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제가 신사도운동에 대한 자료를 많이 뽑아놨는데, 오늘은 시간이 없어서 다음에 나누도록 하겠는데요 그들이 한국교회를 망친 기복주의 신비주의의 총합이에요 이젠 드러내놓고 막가는 겁니다.
요한일서에 보면 요한 사도가 우리에게 명령하는 게 있습니다. 너희들은 영을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이미 많은 거짓 선지자가 나타났고, 적그리스도의 영이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게 이천 년 전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 교회가 시작된 그때로부터 이미 그런 일들이 시작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럼, 적그리스도의 영과 거룩한 성령을 어떻게 구별합니까? 요한 사도는 육체로 오시고 십자가에서 약속을 다 이루신 예수만으로 충분한가 아니면 거기에 다른 것을 끼우고 섞어넣는가? 은혜의 복음 그 진리 외에 인간의 신학이나 여러 지식이 혼합된 것으로 진리의 기준을 삼는가? 그러니까 한 마디로 그가 어떤 말을 가졌는지를 분별하는 겁니다. 말이 곧 영이란 말입니다. 예수로 충분한가? 십자가 은혜의 필연성을 아는가? 아니면 그것으로는 부족하고 인간의 열심과 인간의 헌신이 보태져야 구원이 완성된다고 말하는가? 그걸 분별하는 거예요. 인본과 신본의 충돌입니다.
한번 보세요. 은사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십자가 은혜, 그 하나님의 의만 증거하는지 아니면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는지를 말입니다. 제가 젊은 시절에 다닌 교회 목사가 제법 유명한 사람인데, 금요일만 되면 사람들 모아놓고 철야를 해요, 모인 사람들 사이로 돌아다니면서 방언하고 머리에 안수를합니다. 그러면서 방언 통변이 나옵니다. 그럼 안수받은 그들이 어떻게 여기겠어요? 하나님이 지금 목사를 통해서 나에게 계시를 주셨구나.. 하는 겁니다. 그런 거 한 번 받고 나면 성경을 믿겠습니까, 자기가 체험한 걸 믿겠습니까? 결국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거지요 이게 바로 거짓 선지자, 적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지금도 순복음교회 같은 데서는 이런 거 많이 합니다. 제가 예전에 우리 누님이 다니는 순복음에 한 번 가봤거든요. 예배 끝나도 사람들이 안 가요. 뭐 하는가 봤더니 목사들이 줄을 쭉 서있고, 각각의 목사 뒤에 또 줄이 백 미터는 되게 서요. 기도 받고 가려고 말입니다. 그 짓들을 한다니까요. 그들에겐 예수그리스도 외에 또 수십명의 목사가 중보자가 되는 겁니다. 한마디로 예수 안 믿으면서 목사 믿고 교회 믿는 사람들이 한국 교회 교인들이에요
요즈음 원어 공부하는 사람들도 똑같아요. 우리 교회에 있다가 그쪽으로 빠져나간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에게 진리는 성경이 아니라 원어입니다. 스트롱 사전이 진리예요. 스트롱 사전을 펴놓고 성경을 새로 쓰고 있다니까요. 하나님이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선택하신 것은 그 안에 비밀을 숨겨놓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문자를 공부하는 거에요 그러나 그 문자는 진리를 담기 위한 그릇이지 문자에 진리가 없다는 사실을 애써 부정하는 거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경의 세계는 피가 있는 성도에게만 열려있는 세계입니다. 예수님의 피뿌림이 없으면 출입금지인 곳이 성경의 세계란 말입니다. 인간의 어떤 열심으로도 그 문은 열리지 않아요
이렇게 십자가 지신 주님의 죽음과 생명에 연합되지 못하면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으로 신령한 것을 대신하게 됩니다. 그런 것을 신령한 것으로 착각해요.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쉽게 말하면 너희들은 지금부터 신령한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배워야 한다는 말이에요. 너희들이 뭔가를 오해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육체의 일로 예수를 섬기려고 하고 있구나.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어느 누구도 성령으로 하지 않으면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 끝. 너희들이 방언하고 예언하고 병 고치고 온갖 초자연적 현상들이 나타나도 그게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 되는 관계성을 만들어줄 수가 없다. 그런 건 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그럼, 그분이 나의 주님이 되는 일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성경말씀대로 성령으로만 이루어집니다. 그 성령이 어떤 성령? 예수님의 다 이루심, 십자가 죽음과 부활하심, 하나님의 약속이 온전히 이루어진 그 은혜의 영광을 우리에게 그대로 값없이 입혀주시고 증거해주시는 그 성령의 일하심이 없이는 예수가 나의 주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나의 주가 되시는 관계성은 인간들의 어떤 행위 능력 밖이다. 인간들의 어떤 종교적 열심으로도 안 된다. 예수가 주님이신 것을 아는 것, 그리고 그분의 한 몸으로의 교회로 그분의 지체가 되고 그분과의 사귐 안에 있는 그것이 신령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성령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몸은 그분의 죽으심에 참여되고 그분의 부활에도 연합된 몸인데 그 일이 성령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아는 것이 너희들에게 허락되었다. 그리고 그 몸을 섬기기 위한 은사도 주어졌다. 그러니까 신령한 자답게 행하라는 게 12장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은사는 그리스도의 한 몸 된 지체들인 성도를 섬기기 위한 은사들이다. 이게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이에요. 그 은사들은 모두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높이고 증거하는 기능으로 주어진 은사이니까 그렇습니다.
즉 성령의 은사는 다 말씀에 기반한 은사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아직 성경이 완성되기 전이기 때문에 방언과 예언과 통역 같은 것들로 복음의 진리가 먼저 선포되어야 하고 또 기록된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주되심을 증언하기 위한 말씀이지요, 그래서 성경이 완성된 이후로는 그런 방언과 예언 등의 이적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습니다. 약 1900년 동안 방언 같은 이적이 없었어요. 다른 종교에는 나타날지 모르지만, 기독교에는 그런 게 없었던 거에요 그래서 20세기에 미국 아주사에서 갑자기 나타난 방언은 가짜란 말입니다. 성경의 방언이 아니에요 오늘날 오순절파에 의해 급속하게 퍼진 그 방언 방언 아닙니다.
완성된 성경을 진리로 믿게 되는 것이 바로 진짜 기적입니다. 다른 기적은 없습니다. 이게 능력입니다. 능력 행함이란 게 다른 게 아니에요. 이 성경 전체가 예수 말씀이고 또 내 이야기인것을 믿게 되는 이게 기적이에요. 그리고 이것을 사람들 앞에서 증언할 수 있는 게 능력 행함입니다. 내가 이것을 증언하므로 해서 이 증언을 받은 사람이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십니다’..라고 깨닫고 믿게 되는 것이 기적이고 능력 행함이에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너희가 나보다 더 큰 일을 하리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이 뜻이에요. 예수님이 중풍 병자도 고치고, 귀신 들린 자도 쫓아내고, 38년 된 병자도 고치셨잖아요. 그런데 너희가 그런 일보다 더 큰 일을 행한다고 하신 말씀이 바로 이 능력을 말합니다. 주 예수와 사랑의 관계 안에서 그 사랑의 높이와 넓이와 깊이와 크기를 바로 아는 것과 그 사랑을 증거하고 나누는 일이 바로 가장 큰 은사이고 능력 행함이에요. 고린도전서 13장에서도 교회는 누구나 그 사랑의 은사를 받은 자들이고, 그 은사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이런 성령의 은사가 없으면 반드시 거짓 것을 믿게 된다. 미혹의 영을 좇아가게 된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9절의 말씀이 바로 그거예요.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반드시 거짓 것을 믿게 된다.
13절을 보면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그러니까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과 한 몸이 되는 건 깊은 연관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그 성령의 은사와 세례의 관계는 무엇인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고 한 성령을 마셨다고 하는데, 이 말씀은 요즈음 오순절이나 신사도 운동을 하는 사람들처럼 세컨브레싱이니 임파테이션이니 그런 이야기가 아니에요. 예수 믿음 후에 다시 주어지는 은사나 능력 등을 말하는 게 아니라 좀 전에 로마서 6장에서 읽었던 그 세례를 이야기합니다. 주님의 죽으심에 연합된 세례를 계속 반복적으로 우리에게 적용시켜 주시는 겁니다. 그게 고린도후서 4장의 내용이거든요. 세컨브레싱이니 임파테이션이니 하는 것들은 결국 자기 증명으로 되먹임되는 것이지 성령세례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성령 세례는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합된 자들에게 십자가라는 영원한 현실을 그들 심령에 새겨주시고, 또 반복적으로 그 죽음을 살아내게 하시는 것을 말합니다.(고후4:11)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로부터 출발하고 십자가의 영광만 증거하고 높이는 교회입니다. 그들에게 나타나는 생명 현상에 관한 것이 14절에서 27절의 말씀이에요. 그러니까 같은 통점을 가지고 같은 것을 감각하면서 함께 자라나는 한 몸으로의 공동체만 성경이 말하는 교회이고 그 교회는 세상 어디에 있든지 머리이신 주님의 보호와 다스리심 안에 있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말합니다. 그렇게 수직적 관계로서 한 사람 한 사람들이 성령 안에서 서로 연결해서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게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시공간을 초월한 한 몸으로서의 교회입니다.
고린도전서 5장에서 바울이 그렇게 이야기하잖아요.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다.. 이게 한 몸이에요. 이렇게 고린도전서를 쓴 바울은 한 성령 안에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에, 한 몸이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묵시 안에 완성된 교회로 우리가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전하고자 했던 십자가의 신비를 이 고린도전서를 통해서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게 신령한 거예요.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입니다.
세상 종교인들이 오해할 수밖에 없는 말씀들이 우리에게는 진리로 들리고 예수로 읽힙니다. 성령의 은사로 말입니다. 이게 방언이고 예언이에요. 그래서 바울은 신령한 은사를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않는다고 하면서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 각종 은사를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치유, 능력 행함, 예언, 방언, 영 분별, 통역 같은 은사로 쭉 열거하면서 이 모든 것은 한 성령이 그의 뜻대로만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 집회나 은사집회에서 하는 것처럼 자기 목적과 필요를 위해서 작동하는 그런 은사는 없습니다. 그건 모두 가짜예요. 각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은사는 없단 말입니다. 오직 성령께서 성령의 뜻대로 성령의 목적대로만 나누어주시는데 그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능력이라는 뜻입니다.
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유익은 개인의 유익이 아니라 공동의 유익, 곧 교회의 유익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성도에게 주어지는 은사는 예수님의 주되심을 드러내고 그 은혜의 필연성을 고백하게 하기 위한 것이지 각 개인에게 사유되어 사람을 유익하게 하고 또 사람의 가치와 가능성 사람을 자랑하는 데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은사가 있으면 한 차원 높은 신앙이고 은사가 없으면 초보적인 신앙으로 여기는 게 오늘날 세상 교회의 현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가장 큰 은사는 예수를 믿는 은사입니다. 그게 가장 큰 기적입니다. 모든 은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키는 은사입니다. 그것 말고 다르게 기능하는 은사가 있다면 다 가짜입니다. 그래서 은사를 설명하는 12장 끝에서 사도는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합니다. 그게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내어주신 사랑,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랑이에요. 13장에서 말하는 사랑은 그 사랑입니다. 인간들에게서 나올 수 있는 사랑이 아니라 요한일서 4장에서 말하는 그 사랑, 하나님 아들의 죽음 안에서 주어지는 새로운 생명입니다.
죽은 자들에게는 사랑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죠. 사랑은 산 자들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을 모르면서 은사를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죽은 시체들의 시체놀이밖에 안 됩니다. 결국 자기 사랑이라니까요.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그리스도라는 그 사랑, 아들이라는 그 사랑을 모르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 사랑 안에 있지 않으면 소리 나는 꽹과리와 같다. 심지어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서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알고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리스도 예수와 사랑의 관계 안에 있지 않으면서 어떤 능력을 행한다 하더라고 그건 오히려 하나님의 저주라는 말입니다.
그럼,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이냐? 그걸 또 오해할까 싶어서 바울이 친절하게 설명까지 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런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 있습니까? 이 모든 것을 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예요. 그분만 할 수 있는 사랑이란 말입니다. 내 것을 다 팔아서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살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희생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건 자기사랑에 다름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 아니에요. 세상에는 슈바이처나 마더 테레사처럼 그렇게 자기희생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의인들 많잖아요. 그러나 그들도 예수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지 않으면, 그 사랑 안에서 하는 게 아니라면 다 헛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십자가의 사랑없이도 얼마든지 그런 것들을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다른 종교인들도 다 하는 거니까
그래서 바울은 13장 시작부터 방언과 예언을 이야기하면서 예수님의 그 사랑을 아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방언과 예언이 바울이 말하는 사랑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왜 하필이면 방언과 예언으로 사랑을 설명하는가? 바울이 소위 은사장이라고 하는 12장에 이어서 사랑을 이야기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단 말입니다. 바울은 매우 논리적인 사람이거든요. 어찌 보면 좀 생뚱맞게 은사를 이야기하는 12장과 14장 가운데 사랑을 이야기하는 13장이 있어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방언에 대해 올바로 알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방언은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에도 방언이 나옵니다.
(이사야 28장)
1 에브라임의 술 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은 화 있을진저 술에 빠진 자의 성 곧 영화로운 관 같이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세운 성이여 쇠잔해 가는 꽃 같으니 화 있을진저
2 보라 주께 있는 강하고 힘 있는 자가 쏟아지는 우박 같이, 파괴하는 광풍 같이, 큰 물이 넘침 같이 손으로 그 면류관을 땅에 던지리니
3 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이 발에 밟힐 것이라
4 그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있는 그의 영화가 쇠잔해 가는 꽃이 여름 전에 처음 익은 무화과와 같으리니 보는 자가 그것을 보고 얼른 따서 먹으리로다
5 그 날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남은 자에게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시며 아름다운 화관이 되실 것이라
6 재판석에 앉은 자에게는 판결하는 영이 되시며 성문에서 싸움을 물리치는 자에게는 힘이 되시리로다
7 그리하여도 이들은 포도주로 말미암아 옆걸음 치며 독주로 말미암아 비틀거리며 제사장과 선지자도 독주로 말미암아 옆걸음치며 포도주에 빠지며 독주로 말미암아 비틀거리며 환상을 잘못 풀며 재판할 때에 실수하나니
8 모든 상에는 토한 것, 더러운 것이 가득하고 깨끗한 곳이 없도다
9 그들이 이르기를 그가 누구에게 지식을 가르치며 누구에게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가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려는가
10 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하는도다
11 그러므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가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12 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13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사 그들이 가다가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걸리며 붙잡히게 하시리라
14 이러므로 예루살렘에서 이 백성을 다스리는 너희 오만한 자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15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는 사망과 언약하였고 스올과 맹약하였은즉 넘치는 재앙이 밀려올지라도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리니 우리는 거짓을 우리의 피난처로 삼았고 허위 아래에 우리를 숨겼음이라 하는도다
16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라
17 나는 정의를 측량줄로 삼고 공의를 저울추로 삼으니 우박이 거짓의 피난처를 소탕하며 물이 그 숨는 곳에 넘칠 것인즉
18 너희가 사망과 더불어 세운 언약이 폐하며 스올과 더불어 맺은 맹약이 서지 못하여 넘치는 재앙이 밀려올 때에 너희가 그것에게 밟힘을 당할 것이라
19 그것이 지나갈 때마다 너희를 잡을 것이니 아침마다 지나가며 주야로 지나가리니 소식을 깨닫는 것이 오직 두려움이라
20 침상이 짧아서 능히 몸을 펴지 못하며 이불이 좁아서 능히 몸을 싸지 못함 같으리라 하셨느니라
21 대저 여호와께서 브라심 산에서와 같이 일어나시며 기브온 골짜기에서와 같이 진노하사 자기의 일을 행하시리니 그의 일이 비상할 것이며 자기의 사역을 이루시리니 그의 사역이 기이할 것임이라
이 말씀은 북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신 하나님의 경고예요. 교만한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는데, 어떻게 징계하시는가 하면 징계에 사용되는 도구가 생소한 입술, 곧 다른 방언을 가진 앗수르입니다. 앗수르를 이용해서 이스라엘을 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이러니 하게도 이스라엘의 방언 때문입니다.
9절에서 11절을 보면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그들은 선지자들의 말을 술주정으로 듣고 얼렐레 까꿍하는 놀리는 소리로 들었다는 겁니다. 그게 방언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내어버려 두신 자들에게는 그런 방언에 다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밖에 안 들렸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에게 “우리가 젖먹이들이어서 얼렐레 까꿍 하는 거야?” 라고 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에게는 그렇게 들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방언으로 알아듣는 자들에게 생소한 입술, 다른 방언인 앗수르를 보내서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를 전하는 선지자의 말을 그냥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하는 경계하는 말, 교훈 정도로 알아듣는 사람들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계시가 못 알아듣는 방언이기에 하나님은 앗수르라는 방언을 보내어 그들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약에서부터 방언은 하나님의 심판을 내포하는 방언입니다. 그리고 그 심판의 이유까지 제시하는데, 그게 16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시온에 한 돌을 두셨는데, 그 돌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들은 그 돌에 걸려서 넘어진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씀인가 하면 이스라엘 역사 내내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어서 말씀하신 게 있는데, 그게 모두 한 돌을 가리켰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약속입니다. 그 약속, 그 복음을 알아듣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선지자들이 전하는 모든 말씀이 방언이 되어버립니다. 같은 말씀이 로마서에도 나옵니다.
(로마서 9장)
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였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33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라는 믿음이 아닌 인간들의 종교행위나 율법행위로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유대인들에게 바울이 경고하는 거예요. 그들에게는 예수는 부딪치는 돌이며 십자가 복음은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이 됩니다. 이게 바로 은혜와 행위의 충돌이에요.
그러니까 방언은 하나님이 귀를 열어주시고 새 생명을 주신 자들에게 주어지는 십자가 복음입니다. 복음은 천국 방언인 거예요.
신약에서 처음 방언이 등장하는 곳이 마가 다락방입니다. 오순절 날 마가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방언이 나타났어요. 그런데 그 방언을 듣는 사람들이 각자 자기 나라, 자기 지방의 말로 들렸다고 하잖아요. 이게 언어의 통일입니다. 성령이 임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만 소통될 수 있는 하늘의 언어로서 나타난 방언이에요.
그래서 이 방언 안에는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이 다 들어있습니다. 마가 다락방에서 나타난 최초의 방언은 복음이라고 하는 계시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십자가라는 복음으로만 소통되는 하늘의 언어로서의 방언입니다. 그 복음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바로 심판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복음으로 모이고 복음을 나누고 복음으로 즐거워하는 여러분들에게 방언은 그 기능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따로 방언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는 거예요. 이 말씀들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음으로 들리고, 그 복음을 즐거워하고 또 그 복음을 함게 나눈다면 지금도 여러분은 통일된 하늘 언어로서 방언을 하고 계신 거에요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방언을 오해했습니다. 방언을 그냥 신비한 체험으로 소유하고 경쟁하고 자랑하려고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고린도라는 도시에는 이방 신을 모시는 거대한 신전도 있고, 신의 계시를 받는 사제들도 있다 보니 교회로 모인 사람들 역시 그런 헬라의 신비 종교에 물든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도 방언하고 예언하고 했던 사람들이에요. 그런 신비한 현상들은 세상 모든 종교에 다 있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고린도 교회 안에서 방언과 예언의 문제로 서로 갈등과 충돌이 있자 바울은 은사의 목적과 기능을 설명하면서 먼저 방언과 예언을 들어서 설명합니다. 그것들이 고린도 교회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방언이 세상이 알아듣지 못하는 하나님의 약속, 그리스도라는 복음이고 그 복음을 알아듣지 못하는 게 심판인 것처럼 예언 역시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하나님에 의해서 실행되고 성취되는지를 하나님의 사람들, 다시 말하면 교회에만 계시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의 은사가 아니면 몰라야 하는 게 바로 예언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에게 성경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로 들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해석되면 그게 예언이에요. 그러니까 앞일을 미리 알려주는 점장이 같은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교회에 맡기신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예언이라고 합니다. 은행 예금처럼 ‘예’는 맡긴다는 의미예요. 교회에 맡기시고 교회에 의해서만 해석되는 진리의 말씀들이 예언입니다. 방언에 통역이 없으면 알아들을 수 없듯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세상 역사의 중심에 자리하고, 또 그를 위해서 진행되고, 그에 의해서 종결되는 하나님의 언약이 바로 그 예언의 내용입니다.
한 마디로 예언이든 방언이든 초대 교회에 주어진 모든 은사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였습니다. 그러니까 신년에 축복 대성회에 가서 예언 받았다고 하고 그들이 방언 통변한다는 건 다 귀신 들린 거예요. 초대 교회 때는 성경이 정경으로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예언의 은사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졌어요. 그러니까 방언이 통역되면 그게 곧 예언이에요. 그리고 그 예언들이 정리되고 모아져서 오늘 우리가 읽는 66권의 성경으로 완성되었습니다. 13장에서는 그런 하나님의 계시의 종결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분명하죠? 없어진다니까요. 그때는 부분적으로만 주어졌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부분적으로 주어졌던 것들이 다 모아져서 성경으로 완성되었으면 그다음부터는 폐하는 거예요. 없어진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방언과 예언은 한시적으로, 부분적으로 주어진 것이고, 그런 부분적인 것에만 매달리는 사람들을 11절에서 어린아이라고 합니다.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분명하죠? 어린아이 때의 일을 버리는 사람이 장성한 사람이잖아요. 다큰 어른이 아직도 따지치기나 하고 있으면 치료가 필요한 정신지체아지요. 여러분은 완성된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약속이신 예수를 우리가 알고 믿잖아요. 그런데 왜 또다시 방언이 있고 예언이 있느냔 말입니다. 초대 교회에도 이렇게 방언하고 예언하는 것을 어린아이의 것이고 어른이 되면 버려야 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완성된 성경을 가지고 있는 오늘날 교회가 방언하고 예언하는 사람들을 고급 신앙인으로, 그러지 못한 사람을 저급한 신앙인으로 생각합니까? 한 마디로 그들은 성경의 진리를 보지도 듣지도 믿지 못한 자들입니다.
성경 자체가 그들에게는 방언이에요. 그래서 성경이 그들에게 심판이 됩니다. 방언을 알아듣지 못하는 그들에게 성경은 그 자체로 심판입니다. 성경의 세계는 피가 있는 성도들에게만 열어주는 진리의 세계라고 했지요. 이 성경의 세계는 ‘피’라는 비번이 없으면 절대 열리지 않습니다.
그들 말고 성경을 대상으로 연구하고 학습해서 자기 목적(구원까지 포함)에 이용하는 자들을 종교인이라고 하는데, 그들에 의해서 오늘날 대부분 세상 교회가 거짓된 가르침에 물들어 있습니다. 평생을 교회 다니면서도 교회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평생을 예수 믿고도 예수가 누구신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에요. 참 답답하죠? 그렇게 천국에 가고 싶어 하는데 천국이 무엇인지를 몰라요. 그렇게 성경에 나오는 모든 단어가 오해되고 왜곡되고 변질되었습니다. 누가 그리 한 것입니까? 이천 년간 교회가 그리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교회를 하나님의 원수라고 합니다.
바울이 지금 은사를 이야기하면서 왜 그리스도의 몸을 이야기하는지를 여러분이 아시겠지요?. 그 그리스도의 몸 외에는 교회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뭘 다시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고 합니까? 초대 교회가 얼마나 개판인데 말입니다. 바울이 마지막에 로마 감옥에서 그러잖아요. 자기가 그렇게 애쓰고 두들겨 맞고,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복음을 전했던 아시아의 교회들이 다 떠났다고 하잖아요. 초대교회란 건 없는 거에요
참 안타깝게도 오늘날 대부분 교회가 거짓 교사들에 의해서 다른 복음, 다른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그들을 향해서 ‘아니오’를 할 수 있어야 해요. ‘그것이 아니고 이것입니다’를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입니다. 땅끝에 세워진 증인들입니다. 큰 성 길 가로 내몰린 그 두증인입니다.
내어버려 두심의 심판은 그런 거예요. 자기가 믿고 싶은 예수를 믿도록 내어버려 두심, 하나님의 간섭과 개입이 없는 상태. 이땅에 종교인들 얼마나 열심이 있습니까? 우리 바로 옆에 대형 교회 있잖아요. 온 동네 하나를 다 사들이는 대형 교회들.. 종교 생활하면 재미있거든요 자기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착각 새벽부터 철야까지.. 그러다 보면 스스로 자기 최면에 걸립니다. ‘아 나는 예수 믿는 성도가 맞구나’.. 그러다가 교회에서 직분까지 받게 되면 그때부터는 충성 경쟁이 나옵니다. 복 받고 상급받기 위한 충성 경쟁. 그러나 그들은 그런 열심 때문에 지옥 갑니다. 그게 바로 내어버려 두심의 심판입니다.
그래서 그들과 우리가 말이 통하지 않는 건 당연한 겁니다. 왜 못 알아들을까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못 알아들어야 정상이니까요. 그러니까 설득하려 하지 마세요. 이건 가르쳐서 될 일이 아니에요. ‘성령으로 하지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고 할 수 없느니라..’ 예수에 대해서 학습하고 공부하고 연구하고 섬기고 충성하고 헌신하고 다 할 수 있지만, 그분이 나의 주가 되시는 것은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창세 전 약속, 이미 이루어진 묵시의 모든 것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테텔레스타이.. 그걸 우리에게 전가해주시는 성령이에요 우리를 그렇게 다 이루어진 흠 없는 아들들로 여겨주시는 것.. 바로 그것이 세상 종교인들과 다른 점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주시는 자들에게만 나타나게되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라는 사랑이고 생명입니다. 세상은 알지못하는 그 사랑이고 그 생명이에요
다음 시간에 13장과 14장을 연결해서 하나님의 큰일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나누도록 하고 오늘 강론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베푸시는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알게 하시려고 우리 교회에 성령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각자에게 주신 믿음 안에서 믿음의 분량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더 크게 더 높게 더 깊이 알아가는 그런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시고, 말씀을 혼잡하게 하고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을 향해 담대하게 복음의 진리를 증거할 수 있는 그런 복된 증인들이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시는 은사로 말미암아 든든히 서 가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