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
곽 숙 자
이십오 년 동안 정들었던 집을 팔고 이사를 했다. 옛날에는 이사할 때 몽당 빗자루까지 챙겨 가기도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가구나 전자제품들은 건물에 부착된 집이 많아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살던 집보다 훨씬 작은 공간으로 옮기게 되니 버릴 것과 가져갈 것을 결정하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웃사람들이 “그렇게 오래 살던 집을 팔아 얼마나 서운하냐?”고 할 때마다 정성껏 가꾸던 감나무와 손때 묻은 가재도구들이 생각나 아쉬움이 많았다. 더구나 그 집에서 아이들이 모두 장성하여 결혼까지 했으니 우리 가족의 전성기를 보낸 집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곳은 우리 가족의 성장과 보람과 애환이 깃든 곳이기에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자식들이 분가하기 전에는 넓은 이층집이 편리했다. 모두 분가한 후, 우리 부부에게 큰 집은 오히려 쓸쓸하고 부담스러웠다. 옷이 몸을 담는 그릇이라면 집은 가족을 담는 그릇이라 할 수 있다. 몸의 크기에 따라 맞는 옷을 바꿔 입어야 하듯이, 이번 이사는 가족 수에 따라 적합한 집으로 바꾼 것이다.
삼십 년 전만 해도 이사를 할 때는 가족들이 이삿짐을 모두 챙기고 이사할 집에 가서도 식구들이 세간 정리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니 이사를 하면 몇 날 며칠 할 일이 많았다. 지금은 살림이 많든 적든 이삿짐센터에 맡기니 가족은 남의 일처럼 구경만 하는 식이다. 우리도 이번에는 이삿짐센터에 의뢰를 했다.
버릴 것을 선별하다 보니 어린 시절의 이사 풍경이 떠올랐다. 여덟 살 되던 늦은 봄이었다. 상자처럼 작은 우리 집을 장정들 여덟이 목도하여 “허이여 허여! 허이여 허여!” 구령에 맞춰 집게고동처럼 집을 떠메고 갔다. 그것은 상여를 멘 풍경과 비슷했다. 상여와 다른 점은 목도꾼들이 내는 소리와 집이 땅에 닿을 듯 낮게 멘 것이었다. 그 뒤를 따라 어머니는 이불 보따리를 이고, 열한 살과 열 살인 두 오빠는 저마다 힘닿는 대로 가재도구를 무겁게 들고 갔다. 동생은 내 차지였다. 처음에는 손을 잡고 걸어갔는데 동생이 졸면서 자꾸 넘어지니 업고 가야 했다. 얼마나 무겁고 힘이 들었던지,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간신히 따라갔었다. 가다가 집이 쉴 때면 우리도 쉬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자는 동생을 깨우느라 애를 먹었다.
그 집은 여순사건으로 집이 불탄 가족에게 나라에서 지어 준 방 한 칸 부엌 한 칸인 판잣집이었다. 어머니는 외딴 벌판에 지어준 집을 먹고 살기 위해 사람이 많이 사는 곳으로 옮겼던 것이다. 그때는 교통수단이 기차와 우마차뿐이므로 가난한 우리 집은 이삿짐을 이고 지고 하루 종일 걸어서 이사를 했다. 나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첫 번째 이사 경험이었다.
내가 결혼할 무렵, 우리 동네 전체가 철거를 당하게 되었다. 주민들이 반대를 했지만 나라에서 강제로 이주를 시킨 것이다. 그때 우리 집은 그 동네에서 제법 큰 집에 속했다. 이사할 장소는 바닷물이 들어오던 곳을 매립한 새 땅이었다. 목재로 된 우리 집은 여러 날에 걸쳐 낱낱이 분해되었다. 그것을 그대로 매립지에 옮겨지었다. 다시 지은 집은 구조와 방 크기가 이전 집과 거의 비슷했다. 새 터의 집은 골목길이 넓어졌지만 우리들의 놀이터였던 뒷마당이 없어진 것이 아쉬웠다. 앞의 두 차례 이사에서는 가옥 자체가 가장 중요한 이삿짐인 셈이었다.
이번 이사에서는 버릴 것을 두고 갈등이 많았다. 어떤 이는 이 년 동안 한 번도 쓰지 않은 물건은 필요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고 했다. 그러나 편물기는 몇 년 동안 다락에서 잠만 잘 때도 있지만, 삶이 따분하게 여겨질 때 꺼내서 옷을 짜면 시간 가는 줄을 몰랐었다. 재봉틀도 자리를 많이 차지하지만 때때로 나의 고독을 달래주는 친구와 같은 존재다. 특히 재봉틀은 외출복이건 홈웨어건 내 취향에 맞는 옷을 만들 수 있으니 없으면 불편함이 너무 클 것 같았다. 둘은 오랜 세월 나에게 창작의 기쁨과 성취감을 안겨준 공로자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집이 좁아 둘 다 가져갈 수 없어 고심 끝에 아무래도 사용 빈도가 적은 편물기를 버려야 했다.
새로 이사 온 집에서는 안방에 화장대를 없애고 컴퓨터를 놓은 것도 달라진 풍경이다. 좁은 방에 둘을 다 들여놓으면 복잡할 것 같아 더 요긴하게 쓰는 것을 택하다 보니 그리된 것이다.
결혼 후 사십여 년 동안 여러 번 이사를 했다. 셋방살이를 하다 처음으로 집을 샀을 때, 사업 때문에, 아이들 교육 때문에, 가족 수에 따라, 이사할 때마다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이삿짐도 매번 달랐다. 큰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하던 해 광주에서 서울로 이사를 왔다. 그때 가장 중요한 이삿짐은 흑백텔레비전이었다. 이십오 년 동안 살았던 집으로 이사 갈 때는 아이들이 한창 공부할 시기여서 책이 가장 중요한 이삿짐이었다. 이번에는 컴퓨터가 가장 중요한 이삿짐인 셈이다.
만물이 태어나고 번성한 후에는 소멸되듯이, 나의 이사도 내 삶의 흥망성쇠에 따라 행하여졌다. 이번 이사도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아무래도 눈을 감기 전까지 한두 번은 더 가게 될 것 같다. 그날이 언제인지 모르지만 다음번 이사에서 가장 중요한 이삿짐은 아마도 지팡이나 보청기가 아닐까 싶다. 종내에는 그마저도 두고 가겠지만….
첫댓글 "다음번 이사에서 가장 중요한 이삿짐은 아마도 지팡이나 보청기가 아닐까 싶다. 종내에는 그마저도 두고 가겠지만…."...너무나도 마지막 구절이 좋습니다.. 아름다운 곽숙자 선생님, 안녕하시지요..
고디고 아팠던 내용은 다 독자에게 맡기며 쓰신 글이군요. "허이여 허여! 허이여 허여!" 이사가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곽 숙자 선생님 고맙습니다.
지팡이와 보청기도 씁쓸하고 목도로 옮기는 집, 그 뒤를 따라가는 올망졸망한 행렬도 눈물겹네요.
하지만 그런 고난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글로 환생했으니요. 다시 읽어도 좋은 글입니다.
이사의 사연도 가지가지입니다.
참으로 어렵던 그 시절도 이제 이렇게 편안히 돌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월따라 중요시하는 물건이 다르다는 것, 정말 공감하며 잘 읽었습니다.
책에서 읽을 때도 참 좋았는데 이렇게 다시 읽으니 더 좋습니다.
집을 통째 들고 가는 이사 풍경이 특이합니다.
이사를 통해 삶 전체를 돌아보는 사유가 깊고
종내에는 그마저도 두고 가겠지만... 에서는 가슴이 쿵 울립니다.
요즘 한결같은 마춤수필과 달리 전편이 물 흐르듯 좋네요. 특히 마지막. -눈물이 찡하네요.
마지막으로 이사하는 집은 우리 함께 모이는, 같은 집이겠지요? 그때 우리는 무얼 챙겨가고 싶을까 생각해보게 하는 글입니다.
그때 무얼 가지고 어디로 가게 될지. 궁금증을 풀 수 있는 미래가 있다는 것도 행복이네요.
카페에 들어와 처음으로 읽은 작품입니다 다소곳하고 이쁜 곽숙자님의 모습이 보이는듯 합니다 어린시절의 이사풍경이 서글프면서도 아름다운 추억의 단상으로 와닿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