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긴 여행이라 큰 트렁크를 꺼냈다. 먼저 가방을 열고 가방 속에 있는 것들을 꺼내 버릴 것은 버리고 다시 싸야 할 것은 싸야 하기 때문이다. 먼저 떠났던 여행지에서 돌아오면 늘 여행 가방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 무게가 아직도 어깨에 남아 있는 듯, 가방을 한편으로 치워 놓으면서 피곤함과 여운을 동시에 내려놓는다. 그다음 샤워를 하거나 침대에 엎어지거나 둘 중 하나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서야 가방을 정리한다. 가방 정리라고는 하지만 대충 꺼내야 할 것은 꺼내고 약이라든가. 휴대용 작은 드라이기 같은 것들은 그대로 두고 가방을 닫아 놓는다. 그렇게 닫아놓은 가방은 다시 여행을 떠나야 할 때 비로소 열린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누름판을 눌렀는데 가방이 열리지 않는다. 어? 이상하다. 하면서 다시 한번 비밀번호를 꾹꾹 정확히 돌린다. 그래도 열리지 않는다. "맞는데..." 다시 두 번, 세 번 눌러도 가방은 열릴 생각이 없는지 꽉 다문 입처럼 단단히 닫혀 있었다. 이쯤 되면 머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난다. 기억 속을 헤집어 비밀번호라고 생각되는 번호들을 하나하나 눌러본다. 생년월일을 넣어 보기도 하고 결혼기념일을 넣어 보기도 한다. 그냥 바라보는 것도 아까운 손자의 생일도 눌러보지만 요지부동이다.
가방도 자존심이 상했나 보다. 그 많은 비밀번호 중에 유독 자신과 교류할 수 있는 번호를 잊은 것에 대해 어쩌면 화가 났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저녁에 다시 해 봐야지 싶어 머리도 식힐 겸 컴퓨터 앞에 않는다. 이때도 물론 비밀번호를 치고 들어가야 한다. 어디 이뿐인가! 내 집으로 들어갈 때도 비밀번호를 꾹꾹 누르고서야 집으로 들어올 수가 있다. 살다 보니 내 집에 들어가는데도 비밀번호를 눌러야 하는 세상 속에 산다.
은행에 볼일을 볼 때나, 가입한 사이트에서도 들어가려면 그때도 비밀번호를 누르는 것은 필수다. 개인정보를 지켜 준다며 요구는 많은데,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내 비밀이 그렇게 대단한가?' 그냥 한 개만 만들어 두루두루 사용하면 좋겠지만 안 된단다. 요즘은 치매 초기인지 조금 전에 한 일도 생각이 나지 않는데 숫자 서너 개 가지고는 받아 주지도 않는다. 영어와 숫자 조합에다 특수문자까지 만들어 들라고 한다. 그뿐이 아니다. 툭하면 3개월에, 혹은 6개월에 한 번씩 비밀번호를 바꾸라고 성화다.
난 비밀 만드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다. 비밀은 음산함을 먹고 산다. 예를 들면, 친구의 비밀을 들어주고 나서 괜히 마음이 무거워질 때가 있다. 그게 싫어서 누군가 내 귀에 대고 “이건 비밀인데….” 하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하루에 몇 번이고 비밀번호를 눌러야 하니 이 무슨 아이러니한 일인지 모르겠다.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비밀을 몇 개씩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 내가 비밀이 많은 사람일까? 내가 나에게 질문해 본다. 아니다. 그냥 말하지 않을 뿐이다. 정말로 비밀이라면 말하면 안 되는 일이다. 문자로든 숫자로든 말해서는 안 되는 일이 비밀이다. 그런 비밀은 내게 없다. 그런데도 요즘 비밀의 덫에 빠져 산다.
처음은 아파트 현관문에서 시작했다. 비밀번호 누르는 ‘도어락’이 나왔을 때 제일 먼저 반긴 사람이 나다. 직장에 나가는 엄마로서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그 당시, 우리 아파트에서 제일 먼저 비밀번호 누르는 ‘도어락’을 설치했다. 식구들이나 나나 열쇠 챙길 일 없이 출근할 때 얼마나 발걸음이 가벼웠는지 모른다. 얼마나 좋았으면 지금도 기억이 선명하다. 그때는 비밀번호라는 덫에 걸려 허우적댈 거라는 생각은 미쳐 하지 못했다. 아마 나중에 죽어 하늘나라에 올라갔을 때도 비밀번호를 눌러야 문을 열어 줄지도 모르겠다. 천국의 문지기가 “여긴 특수문자도 포함해야 해요”라고 한다면, 그 순간 바로 땀을 흘리며 하늘을 떠돌지도 모른다. 그 비밀번호를 몰라 문이 열리지 않으면 오도 가도 못 하는 노숙자 신세가 되어 허공을 떠돌지 않을까 싶은 엉뚱한 생각도 든다.
아니, 아니! 그보다도 발등에 떨어진 불은 내 집 현관문 비밀번호를 잊을까 걱정이다. 요즘은 어제 한 일이나 조금 전에 한 일들도 오락가락이다. 정말로 현관문 비밀번호가 생각나지 않으면 그때는 정말 큰 일이다. 그래서 메모하는 습관을 기른다. 그런 내게 친구가 딴지를 걸었다. ‘얘, 치매 걸려 잊기 시작하면 메모했다는 자체도 잊어버려’ 한다.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며 글 쓰다 보니 이때서야 머릿속에 전등불 하나가 켜진다. 그럼, 그렇지! 내가 메모하는 사람이었지. 부리나케 휴대폰을 메모장을 연다. 선명히 쓰여 있다. 큰 가방 번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