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사진
활동사진, 옛날 우리동네 가설극장에 들어온 영화의 옛날 이름
동선 모두를 디테일하게 찍고 찍어서 다시 모니터링을 하고
사전에 배우 감독모두 모여 리허설을 하고
진짜 극장에서 상영하기 전까지 무수한 일이 있는 촬영현장
*활동사진motion picture , 活動寫眞
영화의 옛 명칭. 영어의 모션 픽처(motion picture)를 그대로 직역한 말이다. 1895년 최초의 영화로 일컬어지는 뤼미에르(Lumière) 형제의 시네마토그래프(cinématograph), 토머스 에디슨(Thomas Edison)의 바이타그래프(vitagraph)가 1897년 일본에 들어오면서 활동사진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일본에서 쓰던 명칭이 1903년 한국으로 들어와 사용되었다. 활동사진이라는 초기의 명칭은 말 그대로 '움직이는 그림'을 뜻하는 말이다. 말하자면 영화의 여명기에 움직이는 영상의 운동성을 강조하는 말이었다. 그 말 속에는 정지된 포토그램(photogram)의 연속을 통해 스크린 위에서 운동을 만들어내는 영화 이미지의 속성이 담겨 있다.
한편으로 '활동사진'이라는 명칭은 영화의 물질성을 강조한다. 그것은 영화의 사진적인 특성을 강조하면서 영화가 연속성을 가장하는 '거짓 운동'이라는 사실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활동사진으로서의 영화는 실재하지 않는 운동을 추상적으로 만들어내기 때문에 허위적이다. 하지만 점점 영화가 대중오락으로 정착하면서 활동사진이라는 명칭은 더 이상 효용성을 잃었다. 대중들은 영화의 이미지에 기꺼이 자신을 맡겼으며 영화의 물질적인 기반의 본질을 회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에 '활동사진'이란 말이 처음 등장한 시점은 1903년 황성신문(皇城新聞) 6월 23일 자로 동대문 한성전기회사 기계 창고에서 최초의 활동사진을 상영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신문에는 국내 및 여러 나라의 뛰어난 절승을 찍은 활동사진을 입장료 10전을 받고 보여 주었으며 관객들의 반응은 매우 뜨거웠다고 기록돼 있다. 한성전기회사에서의 첫 상영 이후 다른 회사들도 다투어 활동사진 상영에 나섰고 이때부터 한국 대중은 영화라는 근대적인 매체에 눈뜨기 시작했다.-
출처:영화사전 | 김광철 외 | 프로파간다
아리랑으로 불붙은 한국 영화 붐
본격적인 한국영화의 전성기는 나운규와 함께 열렸다. 1924년 부산에서 한국인 최초의 영화제작사인 조선키네마가 설립되었는데 나운규는 여기서 만든 「운영전」에 단역으로 등장하면서 처음 영화계에 발을 디뎠다. 그가 2년 후에 발표한 「아리랑」은 최초의 대형 흥행작이자 문제작으로, 한국 무성영화 전성시대는 나운규와 함께 시작되어 1937년 그가 타계함으로써 막을 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리랑」의 나운규의 등장으로 한국영화는 제1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한국 무성영화의 전성시대는 나운규와 함께 시작되어 1937년 그가 타계함으로써 막을 내리게 되었다. -ⓒ 역사비평사
그 시기에 「아리랑」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3·1운동 이후 민족주의의 고양, 일제가 유화정치를 펼치는 사회적 정세와 함께 영화계 내적으로 한국영화가 잇달아 흥행에 성공하면서 공급 부족까지 야기되는 호황기였기 때문이다. 그 이전의 한국영화는 거의 다 고대전설이나 문예작품을 토대로 만들어졌던 데 비해, 「아리랑」은 지주 · 마름 · 소작인 · 일제의 하수인 · 지식인 그리고 가난과 성적 희롱에 희생당하는 여성 등 철저히 조선의 현실에 기반한 인물을 등장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었다.
주인공 영진은 전문학교를 휴학하고 고향에 돌아와 철학을 공부하다가 미쳐버린 지식인 청년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런데 이는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현실에 대해 마음 놓고 조롱할 수 있는 장치가 되어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영화는 당시의 현실이 미쳐버릴 정도로 고통스러웠다고 우리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아리랑」은 당시 조선의 현실과 대중의 정서를 명민하게 포착했다. “논과 밭을 다 팔아서 아들 공부시킨다는 것과 그렇게까지 공부시킨 아들이 의외로 광인이 되었다는 것은 농촌의 중류가정이면 실제로 당하는 경지”였던 것이다. 당연히 대중들의 반응도 뜨거워서 1926년 상반기에만 110만 명의 관객이 들었다. 유명 영화감독이던 이경손에 따르면, 「아리랑」이 상영되는 극장의 분위기는 마치 어느 의열단원이 서울 한 구석에 공개적으로 폭탄을 던진 듯한 설렘이 가득했다고 한다.
전후의 부흥
해방과 6·25의 격변기를 지나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까지는 한국영화의 눈부신 전성기였다. 양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1955년 15편에서 1959년에는 연간 108편이 만들어졌고, 극성기 때에는 1년에 200편 이상이 제작되기도 했다. 그 동안 무관심과 무지 속에 외면당했던 이 시기 영화들을 발굴하고 새로이 바라보려는 노력도 최근에 시작되었다.
1955년작 「자유부인」(감독 한형모)은 바람난 교수부인이라는 센세이셔널한 소재를 통해 흥행에 크게 성공함으로써 이후 한국 영화산업 부흥의 기틀을 마련해준 영화이다. 식민지와 전쟁을 연달아 겪은 황폐한 시절에, 미국식 자유주의와 소비주의에 취해 춤추고 비틀거리는 자유부인의 모습은 전통적인 가부장제 사회가 크게 흔들릴 조짐을 보여준다. 당시 이 영화를 관람한 여성 관객들은 ‘우리와 거리가 먼, 타락한 여자 이야기’라고 지탄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선망과 동경, 그리고 두려움이 교차했다고 회고한다.
이 영화의 흥행 성공은 1954년에 나온 국산영화 면세조치와 함께 영화산업을 한껏 고무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영화가 주로 여성관객을 겨냥해서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은 매우 시사적인데, 이들 ‘고무신 관객’ ‘아줌마 부대’는 우리나라 영화산업을 성립시키는 초석이었다. 오늘날에도 여성 위주로 영화를 기획하는 것은 여전한데, 이는 한국영화의 특성과 관련해서 여러 가지 각도로 연구할 필요가 있는 대목이다.
1961년에 나온 유현목의 「오발탄」은 한국영화사 최대의 문제작으로 꼽힌다. 이 영화는 북에서 피난 내려와 서울에 정착한 어느 가족을 통해서 당대 한국사회를 짓누르고 있던 각종 문제들을 종횡으로 가로지른다. 이 가족이 사는 곳은 용산 미8군 뒤에 있는 해방촌이다. 박봉의 월급쟁이인 장남 영호를 중심으로, 늘 “가자, 가자!”라고 외치는 병든 어머니, 전쟁에서 돌아와 실업자로 전전한 끝에 은행을 터는 둘째아들, 미군부대 창녀로 전락한 여동생, 묵묵히 일만 하다가 출산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나는 아내, ‘나이롱 치마’와 새 신발을 사게 될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어린 딸들이 촘촘히 둘러 서 있다. 이들 가족이 펼쳐가는 스토리 라인을 통해 유현목 감독은 전후의 황폐함과 함께 한국 전통문화와 미국문화가 충돌하며 빚어내는 불협화음을 날카롭게 포착했다.
「오발탄」의 포스터 -1961년 4월에 개봉했던 이 작품은 당시 한국사회가 안고 있던 각종 문제들을 다루었다. 그러나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군사정권의 강압으로 상영이 금지되었다. ⓒ 역사비평사
신상옥은 감독이자 제작자로서 1960~70년대 한국 영화산업의 대부 역할을 했다. 그의 영화사인 신필름은 절정기 때 연간 28편의 영화를 쏟아냈고 산하 감독이 30여 명에 달했다. 그는 장르의 대가이자 테크닉의 장인이라고 평가된다. 군사정권에 의해 급격하게 근대화가 추진되던 시기를 배경으로, 복잡한 정체성을 가진 주인공을 통해 어지럼증과 혼돈에 사로잡힌 동시대의 풍경을 담아냈다. 그의 작품들이 하나둘씩 재평가의 무대 위로 오르고 있는 가운데, 이 시기 한국영화사를 발굴, 기술하는 데에 선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한 학자는 신 감독의 작품들이 전체적으로 “근대화에 의해 파괴된 공동체적 가능성에 대한 좌절의 기록이자 그 변화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60년대 급격히 동요하는 대중들의 정서구조를 의미 있게 전달하려는 문화적 실천의 결과물”이라고 평가한다.
예컨대 「천년호」의 경우, 억압과 폭력에 희생당한 여성을 천년 묵은 여우와 결합시킨 줄거리를 통해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의 욕망과 원한에 대해 갖는 두려움과 그것을 잠재우고 순응시키는 작용을 어떻게 이루어내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한국적 공포영화이다.
출처: 우리는 지난 100년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1 | 한국역사연구회 | 역사비평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