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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동학들과 더불어 문학이론을 공부하던 시절 접했던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 첫 구절은 지금까지도 강렬하게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책의 내용은 뚜렷하게 기억나지 않았지만, 위의 문장으로 시작되는 서두의 의미는 여전히 나에게 중요한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 지금은 인터넷의 발달로 각종 정보의 검색이 손쉽게 이루어지고, 급기야는 인공지능(AI)으로 인한 데이터의 활용이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 모르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문학을 연구하는 것 또한 이러한 토대에 영향을 받고 있고, 과거에 비해 텍스트와 기존의 연구 성과를 접하는 것이 훨씬 용이해졌다. 그래서 ‘디지털 인문학’이라는 분야가 새롭게 등장했다고 하겠다.
분명 다양한 자료에 접근하기 쉽다는 것이 문학 연구의 기반을 확장시키리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결국 텍스트를 분석하고 그에 관해 논하는 것은 연구자의 몫으로 남아 있다. 루카치는 서양의 고전들이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길을 가던’ 시대의 산물이지만, 세계에 조화와 통일성을 부여하던 신적 질서가 깨진 근대는 더 이상 ‘총체성’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고 진단한다. 그리하여 고대의 비극과 서사시를 대체한 장르로서 소설의 의미를 부각하고, 근대 소설의 출현 동기를 총체성의 관점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서양문학사 아니 최소한 독일의 근대문학사를 전제하지 않고는 쉽게 읽을 수 없다는 점을 젅[해야만 하지만, 작품의 분석과 그에 따른 문화사의 변화를 설명하는 내용은 대단히 인상 깊게 다가온다.
서가에 꽂혀있던 책을 오랜만에 다시 읽었으나, 문체나 내용까지도 여전히 어렵게 다가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아마도 책에서 분석 대상으로 삼고 있는 <돈키호테>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 그리고 톨스토이의 소설 등에 대한 깊은 이해가 전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 읽었을 때 분명 다음에는 분석 대상으로 삼은 작품들을 읽고서 다시 이 책에 도전하겠다는 다짐을 했던 것 같다. 언제 다시 이 책을 다시 읽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는 이 책에서 거론된 작품들 중 일부라도 읽고서 도전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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