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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녕의 소설을 오랜만에 읽었다. 작가의 단편집인 <은어낚시통신> 이후에 문예지에 수록된 단편들을 간간이 읽은 것으로 기억되는데, 이 작품의 출판 기록을 보니 이미 출간된 지 20년 정도가 지났다. <사슴벌레여자>라는 제목의 장편소설로, 이 작품의 내용은 물론 그 결말조차 흥미롭게 다가왔다. 어떤 사유로 인해 기억을 잃고 방황하는 남자와 그를 발견하고 자기집으로 이끌어 함께 기거하도록 하는 키 작은 여성 ‘서하숙’이 주요 등장인물이다. ‘해리성 기억상실’의 증세로 이전의 기억을 잃고 시청 지하철역에서 깨어난 남자는 지하철역 근처에서 방황하고, 우연히 편의점에서 서하숙이라는 여자를 만나 그녀로부터 숙소를 빌어 살게 되는 내용으로부터 시작된다.
여기에 다른 사람의 기억을 이식하여 살아간다는 ‘기억 이식’이라는 소재가 등장한다. 자신의 기억을 잃은 남자는 서하숙의 주선에 의해 기억 이식회사에서 파견된 인물 M과 무인호텔에서 은밀하게 만나, 사슴벌레를 키우던 ‘이명구’라는 인물의 기억을 이식받는다. 다른 사람의 기억을 이식받아 살아가던 남자는 이명구의 애인이었던 차수정이라는 여성과 만나고, 기억 이식의 부작용으로 인해서 그녀의 죽음을 목도하게 된다. 기억 이식의 부작용을 알아챈 회사에 의해 이식된 기억을 회수당하고, 기억 이식의 징표로 ‘사슴벌레 문신’이 몸에 새겨진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같이 지내던 서하숙 역시 몸에 사슴벌레 문신이 있음을 알게 도는데, 제목의 <사슴벌레 여자>는 결국 서하숙을 지칭하고 있다고 이해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의 과거를 토로하던 서하숙의 기억은 과연 온전한 것인지, 아니면 이식된 기억으로 사는 것인지도 모호할 수밖에 없다. 그러던 중 우연히 옛 직장 동료를 만나 가족을 만나게 된 남자는 비로소 자신의 본래 이름(이성호)을 찾고, 가족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잃어버린 기억은 회복되지 않는다. 자신을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고 한다는 여동생의 말을 전해 듣고, 남자는 이성호라는 정체성을 버리고 다시 서하숙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작품의 결말이다. 즉 자신의 본래 면목을 회복하지 못하고, 기억을 잃은 채 익명의 존재로 살아가는 모습을 이성호와 서하숙이라는 인물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자신의 기억을 다 잊어버리고 새로운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인간의 허구적인 욕망을 작품으로 그려낸 것이라 여겨지고, 어쩌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사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말이라고 이해된다. 그리하여 과거의 인연들과는 완전 격리된 채 새로운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이성호와 서하숙의 존재는 현대인의 소외된 자아를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작품의 배경이 대도시인 서울이라는 점을 주목할 수 있는데, 그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어우러져 살고 있지만 개개인은 파편화된 존재로 살아가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가족 혹은 직장이라는 공간을 일단 벗어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과 관계가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저 무심하게 여기면서 살아갈 뿐이다.
때로는 흥미를 끌만한 특별한 일이나 사람에 대해서 관심이 집중되기는 하지만, 시간이 지나 대중들의 주목도가 떨어지면 그마저도 빠르게 잊혀진 ‘사건’의 하나가 될 것이다. 바로 이러한 대도시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이들의 삶을 이성호와 서하숙이라는 인물들을 내세워 형상화했으며, ‘기억 이식’이라는 소재는 타인의 삶에 대한 관심을 촉발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의 뇌리에서 결국 잊히고 만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라 해석할 수 있겠다. 특히 인터넷의 기술이 발달하고 대면의 기회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삶을 두사람의 전형적인 형상으로 그려낸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하겠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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