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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법(惺法)스님 <隨筆>
2월 하순이다.
정확히 2월28일 이니 내일부터 양력으로는 춘삼월이다.
대동강(大同江)물도 풀린다는 우수(雨水)가 지난 지 열흘이 가까워 오는데도 바람 끝은 여전히 가시가 돋쳐 있다. 이따금씩 누런 흙먼지를 안고 오는 회오리바람이 오는 봄을 막아보려고 기를 쓰고 있는 것 같다.
50사단 신병교육대 중대 사전(中隊舍前)에 영천군 고경면 일대 장정(壯丁)들이 현역병으로 징집 되었다. 미지의 <군대생활>에 대한 불안과 3년이란 긴 세월이 주는 암담함에 장정들은 하나같이 초상집에 문상 온 표정들이다. <사람>에서 <군인>이 되는 맨 처음 관문은 <머리>검사였다. 막사 담벼락에 차려놓은 임시 이발소에서 <군인>의 기준을 벗어난 머리는 이발병들의 <바리캉>에 의해 무자비하게 뜯기었다. <사람 사는 곳>의 미련을 훌훌 벗어 던져버리지 못하고 더벅머리 채로 들어온 장정들이 꽤 많았다. 그들은 바리캉의 먹잇감이 될 때까지 <쪼그려 뛰기>를 하기 도 하고 십여 명씩 어깨동무를 하고 <뒤로 취침>, <앞으로 취침>도 하였다.
나는 미리 겁먹고 머리를 빡빡 밀고 온 겁쟁이들 틈에서 그 모습들을 멍하니 구경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건 단순한 구경이 아니었다. 곧 나에게도 닥칠 남의일 같지 않은 위기의식에, 서서히 몸도 마음도 늪 속으로 가라앉는 그런 묘한 분위기속의 <참교육 현장>이었다. 이른바 <짬밥>도 한 숟갈 뜨기 전에 <군기>부터 바짝 들어버린 것이다.
연병장(練兵場)에서 들려오는 먼저 입대한 훈련병들의 악에 받힌 구령소리가 한층 참교육효과를 높였다. 누런 흙먼지의 진원지가 바로 저기구나 하고 느꼈을 때의 그 절망감은 제대 후에도 가끔 입대하는 꿈을 꾸게 하였다.
“중(僧)도 군대오나?!”
누군가의 자조 섞인 빈정거림에 새삼 승복을 입고 입대한 한 스님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같이 입대한 스님들이 있었겠지만 오직 그 스님만이 승복을 입은 채로 움쩍 않고 앉아 있었다. 중이 군대왔다고 빈정거리든, 수군거리든 아랑곳 않고 처음 집결했던 그 자리에 흙먼지를 고스란히 맞으면서 가부좌를 튼 그 모습은 마치 벽면참선 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순간 나는 저 스님이 어떻게 이 험한 사바세계에서 <군인노릇>을 할 것인가 싶어 참 안쓰럽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요란한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앉아>, <일어서>반복에 미리 견습 한 쪼그려 뛰기에 뒤로 취침, 앞으로 취침으로 내 코가 댓 자나 빠지고 보니 스님을 가맣게 잊고 말았다.
4월 중순이다. 완연한 봄 이다.
거꾸로 매 달아도 국방부 시계는 간다더니 6주간의 신병훈련이 끝났다. 마치 군대생활을 다 한 것만 같았다. 그렇게 엄격하게 통제했던 PX(영내매점) 출입도 자유롭게 허용이 되고 막걸리 왕대포도 한잔 할 수가 있었다. <더블 백>을 깔고 앉고서 배치를 기다리는 순간이다. 101보(전방부대)로 떨어지면 그날로 탈영 한다는 치도 있었지만 고된 훈련과정을 당당히 졸업했다는 성취감에다 오랜만에 맛본 취기에 봄바람까지 어우러지니 월남(越南)엔들 못 가랴 싶은 배포가 생겼다.
평생을 못 잊을 사람 중에는 아주 특별한 은혜를 입었거나 그 반대의 경우가 있다. 주는 것 없이 끌리는 사람이 있는 가하면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이 있다.
나 에게 훈련병들의 대표 격인 향도(嚮導)를 하라고 권하던 내무반장 차 하사(車下士).
내가 완강하게 거절하자 <빳다> 세대를 때리고 복(福)을 차버린다며 하지 말라고 했다. (제대 후에 군대 이야기 할 때는 열대 맞았다고 뻥 쳤었다). 그 후 그는 나를 은근히 불러서 중대 기수(旗手)를 하라고 하였다. 빳다 세대와 향도를 바꾼 지 며칠 지나지 않은 탓도 있지만 다시 거절할 배짱이 없었다. 그의 진심이 느껴졌었기 때문에 순순히 권유를 따랐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중대기수가 되고부터는 훈련병 시절을 반은 공으로 먹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단체기합으로 무거운 엠 원 소총을 거꾸로 들고 오리걸음을 할 때마다 기수는 중대기를 들고 속도를 맞추어 걸어가면 되었다. 그리고 그 외에도 <기수열외(列外)>의 솔솔 한 특권이 주어졌다.
뱁새눈에 자글거리는 목소리. 어느 것 하나 호감 가는 구석이 없다. 식사 때면 어김없이 군화발로 식탁위에 올라가서 자글거리는 목소리로 <동작 그만!>을 외친다. 7중대 소대장 한 중위(韓中尉)가 시끄러워서 밥을 못 먹겠다는 게 이유였다. 그 순간 식당풍경은 정말로 가관이다. 막 한 숟갈 떠 넣는 놈, 씹던 놈, 삼키던 놈, 국 뜨는 놈, 김치 집어 올리는 놈이 그 상태로 딱 멈추었다. 눈에 거슬리는 한두 놈을 <시범케이스로 조지고> 난 뒤에야 식사를 계속 <실시>할 수 있었다. 따라서 항상 식사시간이 부족하여 허겁지겁 퍼 먹어야했다. 그 때의 습관이 아직까지 남아 있어서 밥 먹을 때 가끔 아내로부터 ‘누가 뺏어 먹느냐’는 핀잔을 듣곤 한다.
정훈(政訓) 시간에 이순신 장군이 노량진(鷺梁津)에서 <죽었다>고 한 한 중위다. 노량해전(露梁海戰)과 헛갈린 듯한데 <전사>도 아닌 <죽었다>고 강조하는 그 무지함에 이순신 장군이 영등포역에서 죽었다고 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다 싶었다.
50사단 7중대 훈련병들은 한 중위가 제대 할 때까지(그는 제대말년 이라고 자랑삼아 말 하곤 했다)이순신 장군을 노량진에서 수없이 죽였을 것 이다.
주는 것 없이 밉다는 말이 맞춤복 같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한낮이 설핏 기울었다.
호기롭던 배포가 취기와 함께 사라지고 <어디로 팔릴까>하는 두려움이 슬금슬금 기어 나올 때 꽁무니에 파란 연기를 달고 기름 냄새를 풍기며 군용트럭이 줄지어 중대 사전으로 들어왔다. 한(韓) 중위가 아닌 처음 보는 중위가 두툼한 서류뭉치를 들고 사병 두 명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직감적으로 <이제 팔리는 구나> 싶었다. 시동을 켠 채로 대기하고 있던 트럭은 처음 보는 중위가 호명하는 신병들을 싣고 차례차례로 중대 사전을 떠났다. 이른바 101보로 명받은 신병들을 싣고 떠나는 것이었다. 얼마지 않아 트럭들이 모두 사라졌다. 트럭과 함께 거의 모든 신병들이 사라졌다. 남은 신병들의 얼굴에 적어도 최전방은 면했구나 하는 안도의 빛이 스친다. 서바이벌 게임에서 용케 살아남은 것 같은 기분을 숨길수가 없다. 나의 얼굴표정도 저들과 꼭 같을 것 같다. 트럭이 출발 할 때 엉엉 울던 병사가 떠오른다. 밥통에 붙어있는 <밥풀>을 떼어 먹으려고 새카맣게 달려들어 머리를 쳐 박던 장면이 스쳐 지나간다.
호루라기 소리와 기합소리와 구령소리가 끊이지 않던 연병장에 평화가 찾아왔다. 누런 흙먼지도 자취를 감추었다. 내 이름이 호명된 것은 중대 사전에 어둠이 서서히 내릴 무렵 이었다.
“......이상 12명, 명(命) 부산 군수사!”
“짜식 군대복은 있 구만.”
언제 왔는지 차 하사가 내 어깨를 툭 치면서 싱긋 웃고 있었다.
“군수사가 뭡니까?”
“군수사령부(軍需司令部). 옛날엔 돈 있고 빽 있는 놈들만 가던 곳이야. 군대생활 잘해라.”
어쩌면 그를 제대 후에도 잊지 못할 거란 생각을 하면서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그의 등을 향해 나는 거수경례를 붙였다.
스님.
옷깃만 스쳐도 인연 이라는데 불가(佛家)에서는 오백 겁이 쌓인 인연 이라면 서요.
‘겁(劫)’이 뭔가 싶어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몇 가지 비슷비슷한 설명이 있던데 그중 하나가, ‘사방 십리 되는 바위에 천년에 한 번씩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오는데 그 천사의 옷자락에 바위가 닳아서 모두 없어지기까지의 시간’ 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바위가 크다고 강조할 때 <집채만 한 바위>라고 하는데 <사방 십리 되는 바위>라니 <뻥>이 너무 심한 것 같습니다. 더구나 천사가 <일 년에 한번> 내려와도 목이 빠질 지경 인데 <천년에 한번> 내려오는 옷자락에 스쳐 바위가 다 닳다니요. 그것도 오백 번 이라니 <뻥>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스님만은 오백 겁을 쌓은 인연이고 싶네요. 그 많은 훈련병 중에서 부산으로 열두 명이 명(命) 받았는데 그중에 스님과 내가 끼었잖습니까. 열두 명도 전쟁 통에 아이 잃어버리듯 다 잃어버리고 군수사 예하부대로 최종 배치를 받았을 때는 스님과 나 둘만 남았었지요. 비록 같은 내무반은 아니었지만 같은 중대(中隊)에서 군대생활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스님과의 인연은 오백겁도 모자란다고 우기고 싶습니다.
“연강(然江)선생. 오늘은 나 하고 생선회에 약주 한잔 할까요?”
외출증을 받아들고 부대정문을 나설 때 성법(惺法)스님이 웃으며 나를 슬쩍 꼬드긴다. 언제 술 시합 한번 하자던 것이 생각난다.
군대생활이 한창 고달픈, 춥고 배고프고 잠 오는 신참 때에 영양실조로 국군 통합병원에 후송된 적이 있던 스님이다. 식사 때 <고기>를 먹지 않아서였다. 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부처님도 군대생활 기간은 예외로 봐주실 거라’ 면서 ‘계율도 살아 있어야 지킬 것 아니냐’ 고했더니
‘훈련병 때도 견뎌냈는걸요’ 했던 스님이 농처럼 한 말을 실천 하려는가 보았다. 참고삼아 일러두지만 스님과 나는 반말도 하지 않았다. 서로 깍듯이 존댓말을 썼다. 따라서 호칭이 항상 부담이 되곤 했는데 스님의 법명(惺法)을 알고 그리고 내가 치기어린시절 친구들 사이에 통용되던 호(號)가 연강(然江)이었음을 고백(?)하고 난 뒤 호칭문제는 저절로 해결되었다. 스님과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성법스님, 연강선생 하며 불렀고 때로는 성법, 연강 하고 부르기도 하였다.
“감히 청하지는 못할망정 바라고 바라던 바입니다.” 나의 장난기 어린 대꾸에,
“허허허. 연강이 문자 쓰시는 게로구먼. 불감청(不敢聽) 이언 정 고소원(固所願) 이라. 오늘한번 일탈해 봅시다.”
성법도 자못 유쾌한 표정이었다. 우리는 참외서리 하는 악동들처럼 자갈치 시장에서 생선회와 소주를 한보따리 사들고 영도(影島)로 건너갔다. 늦은 봄날의 따가운 햇살쯤은 태종대(太宗臺) 바닷바람이 충분히 감당하고 있어 굳이 그늘을 찾지 않아도 되었다. 바닷물이 찰랑이는 백사장에 앉아 성법과 나, 그리고 갈매기와 파도소리가 어우러져 소박한 연회를 벌렸다. 나는 성법의 마음을 짐작하고 있었기에 외출 때면 늘 그렇게 술자리를 같이 한 것처럼 하였고 성법역시 그 어떤 이유나 설명도 없이 술친구가 되었던 것이다.
어렸을 적부터 나의 해(太陽)는 이야기책 속에 나오는 나그네의 해처럼 서산으로 <뉘였 뉘였>졌었다. 수평선 저 멀리 어선 한척이 갈매기 때들의 호위를 받으며 포구로 들어오고 있었다. 붉은 해가 서쪽하늘과 바다를 곱게 물들이더니 마치 바다 속에서 누가 잡아채기라도 한 듯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뉘였 뉘였>지는 해가 얼마나 여유롭고 낭만적인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해가 지자 소박하고 작은 연회가 끝나고 언젠가부터 마음의 빚을 갚기 위해 벼르고 별렀던 성법의 일탈도 끝이 났다. 훈련병 시절에도, 영양실조로 쓰러졌던 신참병 시절에도 지켜왔던 계율을 파계(破戒) 하면서 우정을 나누어 마셨던 연회가 끝이 난 것이다, 그 후 성법과 나는 군대생활을 마칠 때까지 술자리를 같이하지 못했다. 아니 하지 않았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술은 자기를 알아주는 벗을 만나면 천 잔도 적다 (酒逢知己千鍾少주봉지기천종소) 하였는데 이미 성법과 나는 태종대 앞바다를 다 마셔도 부족할 지기가 되었고 군복무 중에도 항상 스님인 성법에게 더 이상의 술자리에 대한 부담을 주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누구나 다 그랬겠지만 교련(敎鍊)시간은 정말 싫었다. 3학점을 이수하면 군복무 기간이 3개월 단축 된다는 달콤한 미끼가 달려 있었는데 그건 결코 매력이 있는 유혹이 되지못하고 나에게는 <꼴 난> 3개월이었다. 그런데 그 꼴 난 3개월이 <꼴값>을 옹골지게 하는 곳은 역시 군대였다.
국방부시계가 제일 게으름을 피우고 더디 갈 때가 제대말년 3개월일 것이다. 축지법이라도 쓰듯 그 염증 나는 세월을 훌쩍 뛰어넘게 해준 것이 그렇게도 싫어했던 교련 이었다. 은근히 적대감을 키웠던 교련 교관들 에게 조차도 미안한 마음을 가지게 만든 <꼴값> 덕분에 예비군복을 입고 맞이한 부산 서면 로타리의 가을 하늘은 또 다른 모습으로 파랗게 웃고 있었다. 그런데 자꾸만 뒤돌아 봐 지는 건 미련이 남아서가 아니라 부러운 시선으로 쳐다보던 수많은 눈들이 그곳에 있기 때문일 게다. 더구나 성법 혼자 두고 온 마음이 차마 성큼 떠나지 못하고 그곳에서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내가 제대 후 어영부영 보낸 석 달은 성법에게는 거꾸로 매달린 듯 보낸 세월 이었을 것이다. 성법이 중대 사전에서 입고 있던 그 승복 차림으로 나를 찾아와 준 것은 1월 하순 저녁 무렵이었다. 당분간 마음수양도 하고 공부도 할 토굴 같은 암자(庵子) 라도 찾아보겠다던 성법.
‘연강선생, 인생하처불상봉(人生何處不相逢) 이라 하잖습니까. 살아 있으면 어느 곳에서든 만나게 되겠지요.’
짧은 만남을 못내 아쉬워하는 나에게 화두(話頭)처럼 던지고 빙긋 웃어주고 돌아서 가던 성법스님. 나는 긴 그림자를 끌고서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서산에 겨울해가 <뉘였 뉘였> 지고 있었다.
그 후로 살기에 바빠서 성법스님을 잊고 지내기도 하였지만 사찰에 갈 기회가 있을 때마다 수소문 해 보았으나 인연이 닿지 않았다,
사람이 살다보면 우연(偶然)이 일을 그르치기도 하고 꼬인 매듭을 풀어 주기도 한다. 우연히, 그야말로 우연히 며칠지난 대구 매일신문을 뒤적이다가 낯익은 얼굴을 만났다. 순간 나는 20여년이 지났지만 한 눈에 성법임을 알아보았다. 분명 글쓴이는 <성법스님> 이었고 맨 마지막에 해인사 주지(海印寺 住持) 라고 소개 되어있었다. 해인사라니! 대구와 해인사는 지척간이 아니던가. 같은 하늘아래에서 살고 있었으면서도 어쩌면 그렇게도 닿지 못했을까.
목을 빼고 기다리던 일요일이 오자 나는 새벽같이 해인사로 길을 나섰다. 극적인 해후(邂逅)를 위해 미리 연락하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참고 참아왔던 길이었다. 그런데 호사다마(好事多魔)란 꼭 이럴 때 쓰라고 만들어낸 말인가 보았다. 아니 일을 그르친 우연 이었다. 마침 주지스님은 서울로 출타 중이었던 것이다. 주지스님이 내가 찾고 있던 성법임을 확실히 확인한 것으로 만족하고 돌아서는 수밖에 없었다.
‘한번 출타 하시면 기약이 없으시니 꼭 연락드리고 오시라’는 종무소 스님의 말씀 따라 몇 번의 전화 끝에 가까스로 통화 할 수가 있었다.
“성법스님 저를 아시겠습니까?”
“허허허 아다마다요. 어찌 연강선생을 모르겠습니까.”
“한번 뵙고 싶습니다.”
“요즘 제가 일이 좀 생겨서 출타가 잦습니다. 사전에 연락주시고 꼭 한번 오세요.”
그러나 성법스님과의 극적인 해후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계속 부재중 이다가 어느 날 종무소 스님이 ‘주지스님 깨서 해인사를 떠나셨다’고 하였다.
그날.
성법스님을 만나기 위해 ‘해인성역’에 들어섰을 때 무언가를 ‘결사반대’ 한다는 현수막이 곳곳에 걸려 있었다. 바로 그 때문인가 싶어 어디로 가셨는지 물어보지도 못했다. 그 후 몇 번인가 해인사 종무소를 통하여 스님의 소재를 알고자 했으나 허사였다. 아마도 젊은 시절 내게 말했던 토굴 같은 암자에서 산새와 바람과 구름을 벗하고 세상사를 잊으셨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세속의 나이 마흔 중반에 불보사찰 통도사(通度寺), 승보사찰 송광사(松廣寺)와 함께 우리나라 3대사찰로 꼽히는 법보사찰 해인사(海印寺)주지를 지낸 큰 그릇이었으니 모든 걸 내려놓고 심산(深山)에서 신선공부라도 하시는지 모를 일이다.
스님.
인생하처불상봉(人生何處不相逢) 이라 하셨지요. 그런데 상봉은 서로 만나는 것이고 불상봉은 서로 만나지 아니하는 것 즉, 서로 못 만나는 것 이 아닙니까. 그래서 이렇게 만나 뵐 수가 없는 것입니까. 혹시 불상봉이 아니고 필상봉(必相逢) 이라고 해야 되는 건 아닙니까. 저의 짧은 지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스님께서 반드시 다시 만날 다짐처럼 말씀 하셨으니까 직접 설명을 해 주셔야지요.
강물은 막히면 돌아서가고 더 막히면 넘쳐서가고 때로는 땅속으로 스며들어 가기도 합니다. 가파른 길을 만나면 성질도 부리지만 평탄한 길에서는 강변의 풍치도 돌아보면서 유유자적(悠悠自適)흘러갑니다. 그런 멋을 닮아보려고 연강(然江)이라 했는데 흉내도 못 내고 있습니다.
구중심처(九重深處)의 계곡물도 모이면 자연스럽게 강물이 되니 그 또한 연강이 아니던 가요. 산새와 바람과 구름과 연강, 그리고 스님이 함께하면 다섯 벗이니 오우가(五友歌)를 읊조려 봄직도 하잖습니까. 그런데 산도 깊고 구름도 깊고 스님의 마음마저 그 깊이를 헤아릴 길이 없으니 연강은 흘러갈 곳을 모르고 있습니다.
스님.
우리 속인(俗人)들은 삼세판을 좋아합니다. 군대에서 처음 만났고 제대 후 두 번째 짧은 만남이 있었고 이제 삼세판째가 남았습니다. 오늘이 입추이자 말복입니다. 더위도 초복, 중복, 말복 이렇게 삼세판을 더워야 물러갑니다. 어차피 속세에 벗을 두셨으니 세상 속으로 어려운 걸음 한번은 해 주셔야겠습니다.
건강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삼세판째 <필상봉>할 수 있을 테니까요.*
2014. 8. 7. 然 江 合 掌.
*스님과 헤어지고 40년 뒤 2016년 8월 그 무덥던 어느 날. 인터넷을 뒤지고 海印寺와 曹溪宗 종무소로 수소문하여 惺法스님의 거처를 알게 되었다. 스님은 晉州 護國寺 住持로 계셨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올 때에 찾아뵙기로 하였다.
10월8일 토요일.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호국사로 향해 길을 나섰다. 가을비가 축복처럼 내리고 있었다.
호국사 처마에 낙숫물이 떨어지고 스님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法問이 빗방울과 함께 대웅전 마당을 촉촉하게 적시고 있었다.
“스님! 점심공양(供養) 참 맛이 있었습니다. 손수 끓여 주시던 茶맛도 일품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건강하셔서 더욱 고맙습니다.”*
첫댓글 惺法스님은 然江이 不相逢과 必相逢의 의미가 같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相逢을 미루었던 것이었군요.
琴川선생님.
성법스님을 해인사 에서 못뵌이후 어디 깊은 산속에 계시는가 예단하고 적극 찾아 나서지못한 저의 불찰 이었습니다.
술자리에서 한 친구가 일침을 놓길래 정신이 번쩍들어 인터넷과 종무소로 수소문한지 30분이 안되어 스님과 통화할 수가 있었습니다. 人生何處不相逢은 진짜로 맞습니다.
명심보감에 나오는 예긴데 그저 한번 해본소리일 뿐입니다, 몸집이 작은 젊은 스님이 대중목욕탕에서 몸을 씻고 있는데 덩치 큰 학생 한 놈이 옆자리에 앉더니 ‘야, 내 등 좀 밀어’ 하는 것이었다, 힐끗 한번 처다 보고는 등을 밀어준 후 ‘나도’ 하고 등을 내밀었더니 ‘이 새끼 너 뭐야’ 하기에 ‘나 중이야 ’ 했더니 ‘이 새끼 버르장머리 없이, 임마 나는 중3이야’ 라고 했다.
선생님에게는 寸鐵殺人과 諧謔이 번득입니다. 덕분에 웃음으로 하루를 시작 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