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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 처사 배군 묘지명병서〔槐潭處士裵君墓誌銘並序〕
내가 과거에 “화산(花山안동)에 배 처사(裵處士)라는 사람이 출중하여 대산(大山) 이 선생(李先生)의 문하에서 배웠으며 사람이 총명하고 특출하며 뜻을 돈독히 하고 행실을 힘써서 무리들 중에 그에 비교할 이가 드물다.”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그 이후 적막하게 다시는 그에 대한 소식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기이하게 여겼다가 끝에 가서는 의아하게 여기며 항상 마음에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 처사의 아들 현두(顯斗)가 공의 유고 약간 권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 주고 인하여 눈물을 흘리며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요구하면서 “아버지께서는 불행하게도 30세에 돌아가셔서 지업(志業)을 크게 이루지 못하였고 평소에 저술한 것도 오직 이것뿐입니다. 숨겨진 덕망과 그윽한 빛이 인하여 막히고 사라질까 매우 두렵기에 감히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합니다. 원하건대 집사께서는 부디 한 편의 글을 지어서 후세에 민몰되지 않게 해 주시면 은혜를 입음이 클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이미 처사가 일찍 세상을 떠난 것에 놀랐고 또 현두의 사람됨을 가상하게 여겨 곧바로 유고를 가지고 열람해 보니, 그 책에서 상수(象數)를 발휘(發揮)한 것과 유묘(幽眇)한 이치를 궁구한 것은 비록 고정(考亭주자(朱子))의 원숙하고 노련한 벗이라 하더라도 이보다 지나칠 수 없을 듯하였다. 그리고 그중에 도학(道學)에 관한 여섯 개의 그림은 더욱 찬란하게 이치가 구비되어 성명(性命)의 근원을 천명함과 학문의 요체를 들어 보인 것이 모두 옛 성현의 은미한 뜻과 밝은 가르침에 근본하여 조리가 분명하고 맥락(脈絡)이 관통하였다. 한 번 봄에 이치가 명백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 마치 손바닥을 가리키는 듯하였으며 또 앞 시대의 사람들이 밝히지 못했던 것을 밝힌 것이 많았으니, 만일 공부를 함이 극도로 친절(親切)하고 도에 나아감이 지극한 바가 있지 않았다면 어찌 그렇게 될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대개 대산 선생에게 배우고 난 뒤에 터득한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대산 선생께서 얼마 있지 않아 돌아가시고 처사도 불행하게 단명하여 장도(長途)에 달리는 뛰어난 말로 하여금 문득 여기에 그치게 하고 말았으니, 하늘의 뜻은 과연 어떠한지 모르겠다.
처사의 이름은 상열(相說)이고 자는 군필(君弼)이며 본관은 흥해(興海)로 관찰사를 지낸 휘 삼익(三益)의 동생 휘 삼근(三近)의 7대손이다. 증조부는 응만(應萬)이고 조부는 행목(行睦)이다. 아버지는 집(緝)이고 어머니는 안동 권씨(安東權氏) 경여(慶餘)의 따님으로 원릉(元陵영조의 능호) 기묘년(1759, 영조35) 12월 모일에 내성현(乃城縣) 유록동(呦鹿洞)에서 처사를 낳았다.
처사는 어려서 남다른 자질을 지녀서 겨우 글자를 배울 때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알 수 있었다. 집에 책이 없어서 처음에 《역학계몽(易學啓蒙)》을 빌려서 즉시 문을 닫고 침잠하며 연구하였는데, 몇 달 되지 않아 완전히 통달하였다. 이를 이어 율려(律呂), 산수(筭數), 천문(天文), 지리(地理),도검(鞱鈐)등의 책을 보아서 모두 묘리를 통달하였다. 더욱 복희씨의 《주역》에 깊이 탐구하여 《주역》의 이치를 잘 이용하는 뜻을 터득하여 거의 종일토록의 생활이 이 원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밤에는 천상(天象)을 관찰하여 별자리를 분변하고 낮에는구고(句股)를 펼쳐서 산천을 측량하였다.일영대(日影臺)를 만들어 시간을 계산하고혼천의(渾天儀)를 제작하여 천체(天體)의 도수를 살폈다. 또기삼백(朞三百)을 추론하여 기영(氣盈)과 삭허(朔虛)를 모두 고르게 하였다.모두 스승에게 배우지 않고 나면서 알아 스스로 터득한 것이 이와 같았다.
호상(湖上)에 유학함에 미쳐서는 드디어 옛날에 했던 공부를 다 버리고 수사(洙泗공자)와 낙건(洛建정주(程朱))의 학문에 마음을 오로지 쏟고 뜻을 전일하게 하였으니 대개 장차 공부가 진척하고 진척하여 그침이 없어서 원대한 학업을 마칠 것 같았다. 처사와 같은 이는 어찌 뛰어난 재주와 호걸의 선비가 아니겠는가. 논자들은 장수하지 못한왕중엄(王仲淹)과 그 불행함이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왕중엄이 살 때는 대산 선생과 같은 선각자가 없었기에 가령 오래 살았더라도 꼭 조그만 성취에 편안히 여기지 않을 리가 없었을 터이니, 어찌 처사가 같은 시대에 훌륭한 스승을 만남이 있어 결국에는 학문의 조예가 어떤 지경에 이를지 알 수 없을 정도였는데 갑자기 이와 같이 죽어 버리는 것과 같겠는가. 이것은 불행함이 왕중엄보다 더욱 심한 것이니, 아! 슬프도다.
처사는 응대함에 겸손하고 공경하였으며, 명령을 좇아 부지런히 움직이며 한결같이 순종함을 장자(長者)의 마음에 맞게 하였다. 부모를 섬김에 지극히 효성스러워 물을 긷고 절구질하는 일과 비천한 일 등 모든 것을 상황에 따라 어버이의 수고로움을 대신하지 않음이 없었다. 한 분뿐인 형에게 매우 우애롭게 대하여 잠자리와 책상을 반드시 함께하였다. 부부 사이에는 삼가 규문(閨門)이 엄숙하였다. 행의(行誼)가 순비(純備)하고 사람과의 응대가 곡진하니, 이에 이웃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며 심복하였다. 문로(門老)들이 처사를 위하여 서재를 지어 거처하게 하니, 처사를 따라서 배운 자 중에 또한 성취한 사람이 많았다. 처사께서는 한결같이 겸손하고 마음을 비워 공손한 태도로 아무런 능력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고을 사람들이 이것으로 더욱 칭찬하여 관찰사에게 벼슬을 천거하려고 하는 데 이르자 처사가 힘써 저지하였으니, 처사가 문달(聞達)을 구하지 않음이 대부분 이와 같았다.
성품이 아름다운 산수를 좋아하여 일찍이단양(丹陽)에 들어가 여러 승경을 차례로 유람하였으며, 집 주위의 회화나무 아래에 조그만 못을 파고 이름을 ‘직방(直方)’이라 하니, 안동(安東)의 선비들이 괴담 처사(槐潭處士)라 일컬었다. 저술로는 《성리찬요(聖理纂要)》, 《사서찬요(四書纂要)》, 《심경품목(心經稟目)》, 《서계쇄록(書計鎖錄)》, 《을수제강(乙數提綱)》이 있고, 《예설초록(禮說抄錄)》과 《역대초록(歷代抄錄)》 같은 것은 모두 책을 완성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대저 처사의 재주의 탁월함과 학문의 매진함에 있어서 인물이 아득히 적을 이때에 호상(湖上)의 문하생 입장에서 말한다면 정히 이른바법중용상(法中龍象)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한미한 농포(農圃) 가운데서 분발하여 일어나 곧바로 우주 간의 일을 담당하고야 그만두려고 한 사람이니, 무리에서 고출(高出)하고 대중에서 빼어난 사람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미 이런 인재를 태어나게 해 놓고 곧바로 또 속히 목숨을 빼앗아 감이 이와 같아 학문을 마무리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내가 어찌 하늘에 원망을 돌려 하늘의 뜻이 과연 어떠한지를 알지 못하겠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처사는 정조 기유년(1789, 정조13) 4월 모일에 죽어 묘소는 유록동(呦鹿洞) 묘좌(卯坐) 언덕에 있다. 장례를 지낼 때 모인 사림이 삼백여 명이었다. 부인은 풍산 김씨(豐山金氏)로 우추(遇秋)의 따님이다. 두 아들을 두었으니, 장남은 곧 현두(顯斗)이고 차남은 현기(顯箕)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처사의 태어남이 / 處士之生
어찌 우연이겠는가 / 夫豈偶然
신인이 그 마음을 비추어 보니 / 神人鑑其衷
앞서서는 태고 글자의 꿈을 꾸었고/ 則有太古字之夢作於先
이물이 그 상서로움을 드러내니 / 異物呈其瑞
집 앞에 팔괘상의 소나무가 자랐네/ 則有八卦象之松生於前
이것은 장차 세상에 크게 훌륭한 일을 하여 / 是盖將大有爲於世
문명의 덕을 걸어 / 以揭文明之德
하늘에 규벽의 찬란함을 두려 함이었네 / 有若奎璧之爛然於天
그러나 단 샘물은 쉽게 마르고 / 而醴泉易渴
영지는 뿌리가 없네/ 靈芝無根
다만 사람에게 그 남은 향기를 실컷 먹이니 / 徒使人飫其餘芳
그 남긴 자취를 어루만지면서 흠모하며 애도하기가 끝이 없네 / 撫其遺塵而欽愛悼惜之無垠
나는 처사가 보답을 받는 것은 / 吾知處士之食報
반드시 뒷사람에게 있을 것임을 알겠네 / 其必在於後人也夫
[주-D001] 도검(鞱鈐):
고대의 병서(兵書)인 《육도(六韜)》와 《옥검편(玉鈐篇)》의 병칭이다.
[주-D002] 구고(句股):
직각 삼각형을 표시하는 수학 용어이다. 직각을 낀 짧은 변이 구(句), 긴 변이 고(股)이다.
[주-D003] 일영대(日影臺):
태양 광선의 이동에 따라 그 그림자의 방향을 알아보는 대(臺)로 해시계를 말한다.
[주-D004] 혼천의(渾天儀):
《서경》에 나오는 선기옥형(璿璣玉衡)으로, 해ㆍ달ㆍ별의 천상(天象)을 그려서 천체의 운행과 위치를 관측하던 기계인데, 사각(四脚)의 틀 위에 올려 놓고 회전시키면서 관측하도록 되어 있다.
[주-D005] 기삼백(朞三百)을 …… 하였다:
《서경》 기삼백(朞三百)의 주에 “기영(氣盈)과 삭허(朔虛)의 분한(分限)이 고르게 된다.[氣朔分齊]”라고 하였는데, 해가 하늘과 만나는 주기는 360일보다 5와 235/940일이 더 많은데 이를 기영이라 하고, 달이 해와 만나는 주기는 360일보다 5와 592/940일이 적은데 이를 삭허라 하니, 기영과 삭허를 합쳐서 윤달이 생긴다. 《書傳 堯典 蔡沈注》
[주-D006] 호상(湖上):
안동 일직면에 있는 소호리(蘇湖里)로 이상정(李象靖)이 있었던 곳이다.
[주-D007] 왕중엄(王仲淹):
왕통(王通, 584~617)을 말한다. 자는 중엄(仲淹), 사시(私諡)는 문중자(文中子)이며, 강주(絳州) 용문(龍門) 사람이다. 수(隋)나라 때 경학가로, 촉군 사호서좌(蜀郡司戶書佐), 촉왕 시독(蜀王侍讀) 등을 역임하였다. 육경(六經)의 효용을 중시하였으며, 그 체재를 본떠 여러 저술을 남겼으나 모두 전해지지 않고, 《논어》를 모방하여 지은 《중설(中說)》만 남아 있다.
[주-D008] 단양(丹陽):
충청도 단양이 아니라, 우탁(禹倬)을 모시는 단산서원(丹山書院)이 있는 영해(寧海)를 말한다. 우탁이 영해(寧海)의 사록(司祿)이 되어 나갔을 때 민심을 현혹하는 요신(妖神)의 신당(神堂)을 철폐하였는데, 영해 사람들이 그의 공로를 잊지 못하여 단산서원을 세워 추모하였다.
[주-D009] 법중용상(法中龍象):
불교 용어로, 대중에서 뛰어난 큰 스님을 말한다. 용은 어족(魚族)의 왕이고 상(象)은 짐승의 왕이므로 그렇게 말한다.
[주-D010] 신인이 …… 꾸었고:
배상열의 문집 《괴담유고(槐潭遺稿)》 권1에 실려 있는 〈태고몽기(太古夢記)〉에 의하면, 배상열이 신축년(1781)에 의자에 기대어 낮잠을 잤는데, 노인이 나타나 주는 책에 ‘태고천토(太古天土)’라는 네 글자가 기록된 꿈을 꾸었다. 깨어나서는 이 글자가 《주역》의 사상기우(四象奇偶)를 말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깊이 연구하여 쓴 글이 바로 이 기문이라고 한다.
[주-D011] 이물이 …… 자랐네:
배상열의 문집 《괴담유고(槐潭遺稿)》 부록 권6에 실려 있는 김진동(金鎭東)이 지은 행장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배상열이 사는 영해의 집 동산(東山)에 특이한 소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제일 아래 가지에서는 솔방울이 1개, 둘째 가지에서는 솔방울이 2개, 셋째 가지에서는 솔방울이 4개, 넷째 가지에서는 솔방울이 8개, 다섯째 가지에서는 16개, 여섯째 가지에서는 32개가 각각 달려있었다. 제일 위의 가지에는 솔방울이 하나도 달려 있지 않았는데, 《주역》의 원리가 1태극에서 64괘로 나누어지듯이 앞으로 이 가지에 64개의 솔방울이 열리기를 바라며 아침저녁으로 가 보았다. 배상열은 이 소나무를 보고 만물은 각기 태극(太極)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증험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초동(樵童)이 그 소나무를 베어 버렸는데, 그러자 배상열도 병이 들어 일어나지 못하여 죽고 말았다고 한다.
[주-D012] 영지는 뿌리가 없네:
“영지는 뿌리가 없고 예천은 근원이 없네.[靈芝無根, 醴泉無源.]”라는 말은 삼국 시대의 학자인 우번(虞翻, 164~233)이 아우에게 보낸 편지에 보인다. 《天中記 卷43》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김영옥 송희준 (공역) | 2020
余嚮則聞花山有裴處士者出。學於大山李先生之門。而
聰明特達。篤志力行。流輩中罕見其比云。旣而寂然不復有聞。故始奇而終訝之。常往來於心。今處士之子顯斗。持遺稿若干卷示余。因泣求誌其墓曰。先人不幸三十而歿。志業未克大闡。平日所著述。惟是而已。深懼潛德幽光。因遂湮晦。敢以請。願執事幸垂一言。俾不沒於後則受賜大矣。余旣愕處士之早世。又嘉顯斗之爲人。雅靖可愛。卽取閱焉則其書之發揮象數。竆極幽妙者。雖考亭之老友。似無以過此。而其中道學六圖。尤燦然具備。所以闡性命之源。揭問學之要者。悉本於前聖賢微旨明訓。而條理分開。脈胳貫通。一寓目。無不了然若指掌。而多前人所未發。倘非用功之極親切而造道之有深至。烏能然乎。此蓋學於
大山後得之者。而惜乎。先生未幾而易簀。處士又不年。使長途逸駕。便止於此。不知天意果如何也。處士名相說字君弼。系出興海。觀察使諱三益之弟。諱三近之七代孫也。曾祖應萬。祖行睦。父緝。妣安東權氏。慶餘之女。以元陵己卯十二月某甲。生處士于乃城縣呦鹿洞。幼有異質。甫受文字。能聞一知二。家無書。初得啓蒙書。卽閉門潛究而盡通之。迤邐看律呂,籌數,天文,地理,韜鈐等書。皆妙達。尤深於羲易而得善用之義。殆有終日而不離是者。夜觀天象。以辨星辰。晝布句股。以測山川。作日影臺以候時。制渾天儀以察度。又推朞筭。令氣朔均齊。皆非有師承而深知自得如此。及遊湖上。遂盡棄舊工。專心一意於洙泗洛建
之學。蓋將進進不已。而究遠大之業。若處士者。豈非絶異之才而豪傑之士哉。論者謂可與古王仲淹之不克壽。同其不幸。然仲淹時。無先覺如大山先生者。就其久視。未必能不安於小成。豈若處士之並世有遇。畢竟造詣未知至於何境。而奄忽乃爾者耶。是則其不幸較甚焉。嗚呼悲夫。處士自幼遜悌。唯諾趨走。一順適長者心。事父母至孝。凡井臼役及鄙賤之事。無所不隨而代勞。篤友一兄。枕案必同。謹於造端。閨門肅穆。行誼純備。酬接曲盡。於是鄰里皆悅服。門老至爲築書齋以居處士。從學者亦多成就焉。處士一味謙虛。粥粥若無能。鄕黨以此益多之。至欲薦聞於道伯。處士力止之。其不求聞達類如是。性愛佳山水。嘗入
丹陽。遊歷諸勝。宅邊槐樹下鑿小塘。名以直方。花之士尊稱爲槐潭處士。所著述有性理纂要,四書纂要,心經禀目,書計瑣錄,乙數提要。如禮說,歷代抄記。俱未及成書云。夫以其才之卓越。與其學之邁往。當此人物渺然之時。自湖門言之。眞所謂法中龍象。而從寒微農圃中奮起。直欲擔當宇宙間事乃已者。有不足以拔萃出類言。顧乃旣生之。旋又奪之速如是。使不得有所究竟。吾安得不歸怨於天。以爲不知其意之果如何云爾耶。處士以正廟己酉四月某甲卒。墓在呦鹿洞負卯原。葬時士林會者三百餘人。配豐山金氏。遇秋之女。有二子。長卽顯斗。次顯箕也。銘曰。
處士之生。夫豈偶然。神人鑒其衷則有太古字之夢作於
先。異物呈其瑞則有八卦象之松生於前。是蓋將大有爲於世。以揭其文明之德。有若奎璧之爛然於天。而醴泉易渴。靈芝無根。徒使人飫其餘芳。撫其遺塵而欽愛悼惜之無垠。吾知處士之食報。其必在於後人也夫。
晉陽鄭宗魯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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