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를 위해 사는 인생 빌 4:10-20/ 롬 14:8-9
우리나라는 요즘 세계 국제 정세에서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나라입니다.
북한의 핵문제로 동북아 평화는 물론 세계 최강국인 주변 4대 강국인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가 얽힌 가운데 4월27일에는 북한 지도자와 우리나라 대통령이 회담을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5월에는 북한과 미국 정상이 만난다고 합니다.
이것만으로도 역사적 사건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북한 김정은이 중국 주석을 비밀리 만난 것입니다.
그 일로 우리가 원하는 북한의 비핵화와 평화 협상은 중국이 끼어듦으로 훨씬 예측이 어렵게 된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미국 대통령은 FTA 재협상 문제로 한국이 양보하지 않으면 북한과 핵협상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은 참 복잡하고 힘든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렇게 어려운 현실에서 참 구원과 참 안식을 누리고 살 수 있는 길은 겸손하게 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랑으로 섭리하시는 하나님께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1:1-2)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시 121:7-8)
창조주 하나님만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십니다.
인간은 환경의 동물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환경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환경을 바꾸려고 노력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환경이 좋아지면 행복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환상은 사단이 속이는 거짓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환경이 많은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환경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주어진 환경이 절대적인 축복이나 행복, 승리를 보장해 줄 수 없습니다.
또 누구나 주어진 환경을 극복하고 다 승리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즉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환경을 극복하고 승리하게 됩니다.
본문은 사도바울의 이야기입니다.
사도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옛 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거듭나 어떤 환경에서도 자유하며 세상을 이기는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갑니다.
본문에서도 로마 감옥에 갇혀 죽음을 앞두고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 세상을 이기고 어떤 환경에서도 참 자유에 이르는 일체의 비결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 깨달은 일체의 비결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어떤 어려운 환경에서 자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1-12)
사도 바울은 어떤 환경에서도 주님 안에서 자유하면 자족의 비결을 배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다 환경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족과 기쁨을 찾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속은 것입니다.
시인 바이런은 “인간은 환경의 조롱거리 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다른 사람들 모두 주님을 배신해도 자신은 주님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주님이 붙잡히고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게 되자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합니다.
그런 베드로가 오순절 다락방에서 성령을 체험하고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합니다.
그리고 대제사장과 서기관에게 당당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8-19)
부활의 주님이 내게 오시면 창조주 하나님이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활의 주님이 함께 함으로 이 우주도 함께하여 참 만족이 옵니다.
이것을 체험하는 자는 참 자유가 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인간의 무능력에서 자유 합니다.
인간이 이 땅의 삶이 어려운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지만 첫 인간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아 하나님이 주신 창조의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이 엄청난 창조의 능력을 첫 인간 아담의 타락으로 다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창 3:17-18)
인간이 이 땅을 정복할 수 없고, 오히려 이 땅은 죄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남으로 오히려 어둠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또 인간은 부정적인 죄를 짓는 능력만 있고 복되고 의로운 능력은 다 상실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불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이 함께 하시니 옛 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거듭나 죄를 이기고 악한 세력을 물리치니 복된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사람들이 바울의 앞치마만 만져도 병이 낫고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 능력자가 된 것입니다.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행 16:18)
우리가 불행한 것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참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장로교 창시자 죤 칼빈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지 않고 해야 할 것은 하는 것이 참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능력을 주시는 분이 바로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불안한 미래에서 참 자유가 옵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부활의 주님 안에 있으면 미래의 것을 주님 안에서 다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롬 14:8-9)
부활의 주님은 나의 주인이 되어 영원한 삶을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불행은 다 미래의 불확실성입니다.
그것에 대한 두려움, 공포가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이 오시면 우리 미래는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 됩니다.
우리의 생명이 부활의 생명으로 주님이 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래를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다 주인이신 주님이 준비하고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모든 것이 풍성하게 다 준비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생명을 가진 자의 축복입니다.
구약에서 주님과 같은 삶을 살았던 사람이 요셉입니다.
신약의 용어로 부활의 주님의 생명을 가진 자입니다.
요셉이 목동부터 애굽의 총리가 되기까지 참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그 삶도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그때 준비하시고 풍성하게 채워주십니다.
목동에서 형들에게 노예로 팔리자 군대장관 보디발을 준비하여, 그 집에서 가정총무로 풍성함을 준비하셨고, 그 아내의 유혹을 물리치고 감옥에 갔지만 그곳에서 은혜 받는 간수장을 예비하셨고, 그곳에서 술 관원장과 떡 관원장을 만나 꿈 해몽을 하게 하셨고, 나중에 애굽 왕의 꿈 해몽까지 모두 하나님이 예비하신 일들입니다.
이 드라마와 같은 이야기는 우리에게 부활의 주님을 모시면 그분이 우리의 삶을 다 준비하고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래에 참 자유가 오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에게 죽음이 온다 해도 두려움이 없는 것은 내 안에 계신 부활의 주님이 심판장이 되어 우리를 천국으로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은 복음을 전하다 돌에 맞아 죽어가고 있지만 그의 얼굴이 천사와 같이 빛나는 것은 하늘 보좌 우편에 서 계신 주님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행 7:55-56)
우리는 하루도 예측하지 못하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미래의 불확실성이 날마다 축복의 하루가 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