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왕이 다시 다른 오십 부장과 그 오십 인을 엘리야에게로 보내니 일러 가로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의 말씀이 속히 내려오라 하셨나이다”
12. 엘리야가 저희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너와 너의 오십 인을 사를찌로다” 하매
본문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한 자가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받으면 얼마나 더 강퍅해지는 가에 대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하시야 왕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선지자 엘리야가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잘못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죄에 대한 결과를 전달하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분노합니다. 그래서 그는 50부장과 50명의 군사를 두 번씩이나 보내서 엘리야를 잡아오도록 명령합니다. 그러나 엘리야를 잡아오기는 커녕 엘리야를 잡으러 보냈던 1백2명의 군사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것도 엘리야의 말 한 마디에……
우리는 여기에서 평소에 우리의 언행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하시야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무감각하게 지으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병이 들었을 때에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는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의지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에게 나타나셔서 아하시야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는 아합에게도 그랬듯이 당장 잡히면 죽을 수도 있는 말을 담대히 전합니다. 심판의 메시지를 받은 아하시야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장 엘리야를 잡아오라고 불호령을 내립니다.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백50명을 갈멜산의 대결에서 승리하여 모두 죽이자 그 소식을 들은 아하시야의 어머니 이세벨이 엘리야를 잡아 죽이려고 했던 것과 비슷한 장면을 아하시야는 연출하고 있었습니다. 부모에게서 보고 들은 대로 그는 여전히 악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 이세벨은 가나안의 제사장 엣바알의 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더러운 우상 숭배를 이스라엘에 보급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아합 왕까지 완전히 자기 손에서 놀아나도록 조정하였습니다. 그러한 부모 밑에서 자란 아하시야가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병이 들자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을 찾습니다. 불레셋에 위치한 에그론에는 바알세붑을 섬기는 신전이 있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볼 수 있는 10가지 재앙 중에 “파리떼”의 재앙을 보아서 알 듯이 그 당시 사람들은 파리의 신을 섬겨야 재앙을 면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상 숭배하는 부모를 둔 아하시야의 머리 속에는 하나님보다는 재앙을 면하게 해 줄 우상이 더 먼저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파리의 신을 찾아가서 자기에게 재앙이 임하지 않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더 악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교인, 택함받지 못한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첫 번째 현상이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에 하나님 앞에 먼저 엎드려서 회개할 생각보다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세상적인 방법을 찾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할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귀찮고 힘들게 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사람까지 헤치려고 하는 악을 범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잡기 위해 사람들을 보냈다가 보낸 사람 전원이 죽음을 당합니다. 첫 번 51명의 죽음이 아하시야에게는 대수롭지 않았는지 또 51명을 보냅니다. 그러면서 겸손해지지 않고 더 강퍅한 모습을 보입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의 말씀이 내려오라 하셨나이다.”그리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의 말씀이 속히 내려오라 하셨나이다.” 이 모습을 볼 때, 아하시야 왕은 자신의 죽음을 예고한 소식에는 무척 분노하지만, 다른 이들의 죽음에 대한 소식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면, 숙연해지고 겸손해져야 정상인데 오히려 더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너무나 이기주의적인 사고방식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아하시야는 하나님의 사람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자, 하나님의 권위 앞에 수그리지 않고 오히려 세상의 왕권을 이용하여 엘리야를 잡으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하시야처럼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잘못하고 죄를 짓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경고하고 권면할 때에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네가 나보다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기에 나에게 경고하느냐”는 식으로 따지며 싸우려고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세상적으로 볼 때에 내가 너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데 감히 누구에게 경고하고 가르치려고 하느냐”라고 합니다. 많은 이들의 실수가 여기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위와 세상의 권위 중에 어느 것이 위에 있습니까? 물론 세상의 권위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므로 감히 하나님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내가 더 높은 위치에 있으니까, 내가 더 어른이니까”라며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무시합니다.
그런데 이런 이들의 반응을 살펴보면,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지 않았다”라고 합니다. 그 말씀을 전달한 사람을 무시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며 더 나아가 하나님을 경멸한 것임을 그들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성경에 대해 무식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패망하리라”라고 하십니다(호 4)
아하시야는 끊임없이 엘리야를 잡으려고 자신의 왕권을 이용하지만, 그의 초조함과 반대로 엘리야는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엘리야는 엘리야를 잡으러 온 50부장을 향해 의연하게 한 마디 말을 합니다.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너와 너의 오십 인을 사를찌로다.” 그의 권위 있는 한 마디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50명의 군인들과 50부장을 태워 죽입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갈멜산에서 엘리야가 하나님께 간구할 때에 제단 위에 불이 내렸던 것을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진실로 “불(fire)의 선지자”였습니다. “불(fire)”이 무엇입니까? 불은 성령님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 불이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성령으로 임하시지만, 믿지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불인 지옥불로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제사를 드릴 때에만 하나님께서는 불을 내리셨습니다. 즉 엘리야는 하나님의 참 선지자라는 말입니다.
물론 엘리야의 마음 속에는 두려움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대를 이어서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아합과 이세벨, 그의 아들 아하시야를 보며 답답하기도 하고 또다시 죽음을 생각하기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두려움을 믿음으로 극복하고 입을 열어 선포합니다.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너와 너의 오십 인을 사를찌로다!”
우리는 입으로 시인할 때에 구원을 얻습니다. 입으로 말한다는 것은 이미 마음 속으로 믿는 것을 시인한다는 말입니다. 마음 속에 두려움이 있을 때에 우리는 걱정 근심거리를 밖으로 토해냅니다. 그러나 두려움이 임하더라도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라는 말씀을 생각한다면, 사랑이신 하나님을 믿을 때에 두려움이 사라짐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어도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두려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엘리야도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계시므로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를 갖고 믿음으로 선포했을 때에 그의 믿음대로 하늘에서 불이 내려 그를 잡아가려고 했던 이들을 모두 심판할 수 있었습니다.
아하시야가 만약 엘리야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하고 정중하게 모셔올 마음이 있었다면, 군사들이 아니라 높은 사람 몇 명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엘리야를 정중하게 모실 의향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세운 하나님의 사람도 권위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의 첫번째 특징은 어떠한 권위에도 순종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권위는 하나님께서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영적인 권위를 인정하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직까지 하나님을 제대로 경외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자기 생각과 같고 또 자기에게 좋은 말을 하면 순종하고, 자기와 생각이 다르거나 축복이 아닌 책망이나 부정적인 말을 하면 기분이 나빠서 결코 순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갈멜산에서의 대결을 아하시야의 어머니 이세벨은 직접 보지 못하고 아합을 통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듣자 더욱 마음이 강퍅해져서 분노하며 엘리야를 죽이지 못하면 신들이 자기에게 저주를 내리기를 원한다며 스스로를 저주했습니다. 결국 자신의 저주대로, 그리고 하나님의 선지자의 예언대로 그녀는 비참한 최후를 맞습니다.
어머니가 주의 종을 대하는 저주받을 언행을 보고 들으며 자란 아하시야……
우리 같으면 부모의 전철을 밟아 저주받은 인생을 살고 싶지 않을 텐데, 그는 그의 어머니를 본받아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했던 갈멜산의 사건과 50부장의 사건을 들으면서도 마음에 찔림도 받지 않고, 변화도 받지 않고 더욱 강퍅해져만 갔습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가 행했던 것과 똑같이 엘리야를 잡으려고만 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접하면서 아하시야가 답답하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우리도 아하시야처럼 행할 때가 가끔 또는 자주 있었음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성경 속에 나오는 어떤 인물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과거 속에도 이런 일이 있었음을 인정하고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고 엘리야처럼 살아온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 더욱 감사하며 더욱 겸손히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삶의 적용]
나는 심판의 메시지를 들을 때, 그 동안 어떻게 반응하였는가?
더 강퍅해져서 그 메시지를 전한 사람과 다투며 그에게 무자비하게 하거나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가? 아니면 그 자리에서 꿇어 엎드려 회개하는가?
앞으로 나는 심판의 메시지를 들을 때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 것 같은가?
나는 누군가와 다툴 때에 분노하며 그를 잡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가?
아니면, 해야 할 말을 권위를 갖고 하는가?
모든 말을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하는가? 아니면,
세상적인 지식과 사고와 권위의식을 갖고 하는가?
나는 하나님의 사람인가, 아니면 평범한 신자인가, 아니면 마귀의 종인가?
성경에는 선지자, 제사장이라는 말 이외에 ‘하나님의 사람’이 나온다.
선지자나 제사장이라고 해서 모두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즉 교회에 다닌다고, 교역자나 중직자라고 해서 다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다.
평신도 중에도 하나님의 사람이 있을 수 있으며,
목회자 중에도 마귀의 종이 있을 수 있다.
오늘날 다원주의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 마귀의 종이다.
그러나 느헤미야와 같은 사람은 평신도로서 잘못된 제사장을 꾸짖고 성전을 정화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분별할 수 있는가?
나는 하나님의 사람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갖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의 사람인가?
나의 부모님은 교회와 목회자들에 대해 어떻게 대접하며 살아왔는가?
나의 부모님은 "목사", "사모"라고 말하는가, "목사님", "사모님"이라고 말하는가?
나의 부모님들의 신앙생활은 겸손했는가? 아니면 자기 주장이 강하여 잘 다투었는가?
교회 욕을 하는 것을 자주 들으며 자랐는가?
하나님의 사람 또는 목사님에게 강퍅하게 말하거나 대하는 것을 자주 또는 가끔이라도 보았는가?
회개하라고 하거나 찔리는 말을 하는 사람을 공격하는 것을 자주 또는 가끔 보았는가?
누군가 잘못을 지적해주었을 때에 부모님이 회개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부모님이 나에게 잘못할 때마다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가? 아니면
잘못하고서도 더 강퍅해져서 부모의 권위로 자녀들을 힘들게 하는가?
그러한 것들이 내 잠재의식 속에 남아있어서 나도 똑같이 행하고 있지는 않는가?
나는 나의 자녀들(또는 새신자들) 앞에서 어떤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가?
자녀들(또는 새신자들) 앞에서 목사님의 욕을 스스럼없이 하고 있지는 않은가?
목사님과 반대되는 의견을 거침없이 하고있지는 않는가?
그래서 목사님에게 무의식적으로 불순종하도록 본을 보이고 있지는 않는가?
자녀들 앞에서 하나님을 잘 섬기는 배우자의 욕을 가끔이라도 하지는 않았는가?
내 자녀들과 새신자들이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가?
나와 똑 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가?
만약 아니라면, 내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겠는가?
나는 하나님만 바라보는가? 아니면
나에게 조금이라도 상처를 준 사람에게 되갚아주기 위해 밤잠을 설치는가?
밤에 잠을 잘 자지 못한다면, 나의 영적인 상태를 심각하게 점검해야 한다.
무언가 생각이 많기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는 것이며
하나님께 다 맡기지 못했기 때문에 평안히 잠을 잘 수가 없는 것이다.
또는 잘못된 식습관(카페인 등)으로 인해 잠을 이루지 못할 수도 있다.
잠이 오지 않으면, 당장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려야 한다.
밤에 잠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고 계시는 것이다.
잠이 오지 않음으로 컴퓨터 앞에 앉는다던가,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던가 하는 것은 벌써 어둠의 세력에 잡혀있다는 증거이다.
“……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 도다”(시 127:2)
따라서 잠이 오지 않으면, 잠을 주시는 하나님 앞에 간구해야 하며 하나님께 엎드리라는 신호임을 잊지 말고, 잠이 들 때까지 간구하던가 철야를 해서라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라.
오늘 받은 은혜와 감사의 제목은?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오늘도 저에게 잠을 주셔서 건강한 삶을 살게 해주심을 감사 드립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삶이 얼마나 편한 삶인데,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았음을 고백합니다. 잠자리에 들면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고백하고 평안히 잠을 자야 하는데, 기도한 뒤에도 내려놓지 못함으로 인해 밤잠을 설친 때가 많았습니다. 저의 믿음이 적음을 불쌍히 여기사 저에게 더 큰 믿음을 주옵소서.
(항상 밤에 잠을 잘 잘 수 있도록 허락하심을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주님만 전적으로 신뢰하고 잠자리에 들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깨닫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잠을 잘 때마다 이것이 죽는 연습이라는 생각을 하며, 혹시 깨어나지 못하더라도 주님 품에 안길 수 있다는 행복한 생각에 잠겨 평안히 잠들게 하시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저희 부모님들의 신앙생활에 대해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오늘 그것을 생각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의 제가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를 알게 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부모님의 신앙생활의 결과가 현재의 제 모습이라면, 저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저와 저희 조상들의 죄악을 용서하여 주시고 십자가에 저희의 모든 정욕을 못 박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변화시켜 주옵소서.
또한 제 자녀들에게 잘못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고, 앞으로는 그들에게 새롭게 변화된 모습인 겸손한 종의 섬기는 모습만 보일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섬겨주심으로 권위를 인정받은 것처럼 저를 겸손한 부모로 만들어 주옵소서.
(아무 것도 잘난 것이 없는 저에게 훌륭한 부모님을 주셔서 그분들의 신앙생활을 통해 저에게 이런 복을 내려주심을 감사 드립니다. 저도 부모님의 신앙을 본받아 저희 자녀들에게 신앙의 본이 되는 부모가 되어 저를 통하여 그들에게 복이 임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도록 허락하여 주옵소서)
사람들에게 저의 모습이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으로 비춰지기를 소원합니다. 저를 낮추고 또 낮추셔서 주께서 원하시는 그릇으로 빚어주시고 주님의 도구로 온전히 사용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만 영광 받아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김 수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