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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3일간 경상북도 지리공부를 했습니다. 그중 저는 안동시를 공부했습니다.
안동의 옛 이름은 신라시대 고타야부터 고창, 영가, 길주, 복주 등이 있다.
안동이란 이름으로 고장명을 정한 것은 1204년 고려 때 "안동대도호부"라는 명칭으로 지역 이름을 정했다.
대도호부란 중국에서 외지를 다스리기 위해 군사적 요충지에 두었던 관서였었는데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까지 내려온 적이 있다.
이후 안동이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중요성이 감안되어 "안동대도호부" 가 되었다. 그래서 안동 이름의 뜻은 “동쪽을 안정시켰다. "라는 뜻이 되었다고 한다.
안동의 이름은 조선 중기 안동 출신인 퇴계 이황 때문에 알려지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선 안동 김씨들의 세도정치 때문에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여 독립운동의 성지라고 불린다.
안동이 한국 유교문화를 대표하여, 일본에 대항하는 항일도시로 일본이 인식해서인지, 부산에서 서울까지의 경부선 철도를 만들 때, 안동을 제외하고 인근의 김천을 선택하여, 부산-대구-김천-대전-서울로의 경부선을 만들어, 지금의 안동이 교통외지로 전락되어 쇠퇴해 버렸다고 한다.
안동시의 면적은 1522.27km²로 경북에 있는 도시 중 가장 면적이 크다.
안동시의 인구는 2022년 기준 15만4900명이다.
안동은 지리적으로 경북을 남북으로 양분하였을 때 북쪽 한가운데 자리잡은 경북 북부 지역의 중심에 해당하는 곳으로 정치, 문화, 경제, 사회, 교육 등 각 분야에서도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곳이다.
동쪽으로는 영양군과 청송군, 서쪽은 예천군, 남쪽으로 의성군, 북쪽으론 영주시, 봉화군과 이웃하고 있고 경북 도로망의 대부분이 방사선을 이루며 안동에서 만나는 경북 북부 지방의 교통 중심지이기도 하다.
안동지역은 하천이 많고 평야가 거의 없는 지형상의 특징 때문에 대규모 주거 지역이 발달하지 못하고, 하천의 합류 지점이나 강기슭에 형성된 소규모 농경지를 중심으로 작은 마을들이 들어서 오랫동안 큰 변화 없이 각각의 전통을 형성하면서 수백 년을 이어 오고 있다.
이같은 지형상의 특징은 인문상의 특징으로 이어져 안동지역의 많은 동성마을들을 형성하는 바탕이 되었고, 그 마을을 중심으로 전통적인 특성들이 이어져 오고 있다.
안동은 낙동강물이 비로소 합쳐진 곳이기도 하다.
강원도 태백부터 흘러 내려온 동강과 영양 일월산부터 시작되어 흘러온 물줄기가 낙강이 되어 만나게 되는 곳이 안동의 반변천 일대이다.
낙동강 덕분에 안동은 예로부터 물이 많았다.
때문에 안동은 두개의 물이 만나는 아름다운 곳이라는 의미로 지명이 영강이라고 불릴 때도 있었다.
안동의 대표 관광명소는 도산서원, 안동 하회마을, 월영교, 병산 서원, 봉정사, 만휴정이 있다.
안동 하회마을은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 있는 풍산류씨가 600년 동안 터를 지키며 살아온 씨족 마을이다.
세계적으로 전통과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되어 전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하회마을 안엔 옥연정사라는 건물이 있는데 서애 류성룡이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지었다.
하회탈은 안동의 대표 문화재중 하나로 국보 121호이다. 하회마을의 자랑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탈이고 턱이 분리되어 있어서 생동감 있는 표현이 가능하다.
도산서원은 460년전 퇴계 이황을 비롯한 여러 선비들이 지냈던 서원이다.
퇴계 선생은 오른쪽에있는 도산 서당에서 그 제자들은 왼쪽에 농운정사에서 지냈다.
도산서당은 부얶과 방과 마루가 하나씩 있는 소박한 집으로 퇴계 선생이 평생을 두고 소망하던 이상적인 집이었다.
농운정사는 퇴계 이황의 제자들이 지내던 공간인데 위에서 보면 장인 공 자와 닮았다.
도산서원은 이황이 살아 있을 땐 서당이었지만 이황 사후 후학들이 서당을 확장하여 서원으로 만들게 되었다.
그렇게 진도문이 생기고 그 안에 전교상이 세워 진다.
조선의 서원은 중국의 관료를 양성하는 것이 목적이 아닌 학문에 뜻을 가진 이들의 공부기관이자 성현을 기리는 제사 공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역 공동체의 정신적, 사회적인 구심적 역할을 했던 곳이 서원이다.
그런 것들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가 되었다.
월영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목조다리이다. 월영교에는 원이엄마라는 사람이 원이아빠에게 쓴편지가 적혀있다.
편지는 이응태의 부인이 아내와 뱃속의 아이를 남겨둔 채 요절한 이응태를 그리며 쓴 간찰이다.
원이엄마는 이 편지를 이응태 관에 넣었다.
편지 내용은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가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내 마음 어디에 두고 당신을 그리워 하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이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주세요. 꿈속에서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자세히 써서 드립니다. "라고 적혀있다.
그리고 원이엄마는 병으로 요절할 남편을 낫게 해달라고 자신의 머리카락과 줄기를 엮어 짚신을 만들었다.
그래서 부부가 살았던 귀례정 근처에 그 순고했던 부부애를 기리기 위해 우리나라에서 가장긴 목조다리인 월영교를 놓았다.
병산서원은 서애 유성룡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유성룡의 제자인 우복 정경세가 세운 곳이다. 서원의 첫 번째 문인 복례문의 뜻은 예를 회복하다 하는 뜻이다.
복례문을 열고 들어가면 나타나는 만대루 라는 누각은 2020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곳에선 유생들의 전체적인 모임을 한다거나 휴식 공간이기도 했고 학교의 강당 역할을 하기도 했다.
만대루를 지나면 본관인 병산서원이 나온다.
서원의 좌우엔 기숙사가 있는데 동쪽이 있는 기숙사는 동재 서쪽 기숙사는 서재라고 불린다.
병산 서원의 강의실은 입교당, 가르침을 세우는 전당이라는 뜻이다.
서원의 기본 구조는 공부를 하는 강학공간, 성현을 모시는 제향공간으로 되어 있다.
병산서원 가장 놀은 곳에 위치한 건물은 유성룡을 모시는 사당으로 존덕사라고 덕을 존중하는 사당이리는 의미를 담고 있다.
봉정사는 신라 승려인 능인대사가 영주 부석사에서 종이로 봉황을 만들어 날렸는데 그 봉황이 내려 앉은 곳에 절을 세운 것이 봉정사이다.
봉정사 맨 앞에는 만세루라는 건물이 있다.
만세루를 지나면 대웅전이 나온다.
대웅전 오른쪽엔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인 극락전이 나온다.
그리고 이들에 동쪽에 위치한 영산암은 봉정사의 수도처다.
영산암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은진전은 영산암의 주 불정이다.
봉정사가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이유는 굉장히 오래된 목조 건물이면서 시대별로 건물이 생겨났다.
고려 초기 때 극락전, 조선 초기 때 대웅전, 조선 후기 때 영산암이 건립되었다.
그리고 천 년간 재난 피해나 전쟁이 없었다.
만휴정은 만년에 휴식을 취할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만휴정은 조선시대 대쪽같은 직언을 하던 문신 김계행이 1497년 대사간으로 재임 중 실적을 지적하는 의견이 수용되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 세운 정자이다.
김계행이 이 정자를 지은 이유는 바깥풍경을 즐기기 휘안 것이 아닌 계곡소리에 연산군의 폭정에 염증을 느꼈던 귀를 씻기 위해 만휴정을 세웠다고 한다.
우리나라 안동 출신 유명인들은 귀주대첩으로 유명한 고려 장군인 강감찬, 성리학자 퇴계 이황, 시인 이육사 등이 있다.
그리고 안동에서 평생을 살며 업적을 남긴 사람은 권정생, 퇴계 이황, 유성룡이 있다.
권정생 작가는 일본 도쿄에서 자라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경상북도 청송군으로 귀국했다.
하지만 많이 가난하여 힘든생활을 보내다 부모님을 잃고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에 살게 되었다.
강아지똥을 비롯한 많은 권정생의 작품들이 조탑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쿠데타로 왕위에오른 세조와 함께 훈구파들은 권력을 독점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부패해져 갔다.
때문에 훈구파를 배척하는 사림이라는 세력이 나타났다. 이들은 오직 성리학의 이념만을 충실히 따랐다.
이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인물이 퇴계 이황이다.
이황은 어릴 때 공부의 재능이 있다기 보단 노력을 하며 공부를 해왔다.
배우기를 좋아하고 태도도 진지했다고 한다.
이황은 숙부 밑에서 공부하였다.
이황은 어려서 부터 성리학에 뜻을 두었다.
19살 이후부터 성리대전을 공부하며 마음으 기쁘고 눈이 열렸다고 한다.
이황은 오직 학문을 갈고 닦는데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벼슬이 있음에도 나라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나라에서 관직을 주어도 거부하거나 사직하었다.
그래서 이황은 직접 자신의 호를 관직에서 물러난다는 뜻으로 퇴계라 정한다.
이황은 도산에 서당을 지어 후학들을 가르쳤다.
이황은 자신의 내연을 바로잡는 수양론은 강조하였다. 이황은 평생을 학문연구에 몰두하고 후학을 가르치다 세상을 떠난다.
사단칠정논쟁이 이황이랑 관련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사단은 인간의 도덕성 네 가지를 말하고 칠정은 인간의 대표적인 일곱 감정을 말한다.
성리학에는 "이"라는 것과 "기"라는 것을 굉장히 중요시 한다.
이는 세상의 이치이자 원리이고 기는 그 원리에 의해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와 기를 놓고 인간의 감정과 도덕성을 적용 시키는 것이 사단칠정론의 핵심이다.
이황의 옆집에 사는 유학자 정지운은 천명도설이라는 성리학 이론을 정리하고 있었다.
정지운은 자신이 정리한 것을 이황에게 고칠 점이 있냐고 물어봤다.
이황은 "사단은 이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다. "를 "사단은 이가 발하고 칠정은 기가 발한다. "라고 고쳐 주었다.
이황은 사단은 이의 영역이고 칠정은 기의 영역이다 라고 생각하며 칠정은 사단에 개입할 수 없다고 이와 기를 분류하여 보았다.
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기대승이라는 젊은 학자가 이황에게 문제제기를 하면서 사단칠정논쟁이 펼쳐진다. 기대승의 입장은 사단은 선한 감정이고 칠정은 일반 감정인데 어떻게 그 둘을 나눌 수 있냐고 주장했다.
이것 때문에 논쟁이 벌어진 것이 사단칠정논쟁이다.
사단칠정논쟁 이후 조선철학은 이황의 논리를 따르는 학파는 영남학파, 기대승의 논리를 따르는 학파를 기호학파로 나뉘게 된다.
나중에 율곡 이이가 기호학파에 들어간다.
서애 류성룡은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 안동에서 자랐다. 어릴적 20대인 퇴계 이황의 제자로 들어가 자랐다.
류성룡은 책을 한번 읽으면 한 글자도 빼먹지 않고 기억해서 퇴계 이황의 수제자이고 퇴계 이황도 류성룡은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류성룡은 영의정 생활을 하다가 임진왜란이 끝나고 고향인 하회마을로 돌아와 침과 뜸을 놓는 법과 당시 백성들의 삶을 알려주는 침경요결, 임진왜란을 기록한 징비록을 적었다.
침경요결 덕분에 전쟁이 끝나고 힘든 백성들이 병에 걸리면 침을 놓아 약보다 효과적으로 나았다.
침은 비용도 많이 들자 않아 서민들에게는 부담감을 갖지 않고 치료할 수 있는 유용한 치료법이었다.
원래양반들은 의학에 대한 지식을 알고 있었지만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은 의학지식을 알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류성룡이 직접 침경요결을 지필하였다.
안동의 특산물로는 안동 한우, 안동소주, 하회탈, 안동 한지, 안동 참마, 안동 간고등어, 안동 사과, 안동 포, 안동 국화차, 안동식혜, 안동 찜닭 등이 있다.
안동소주는 쌀, 누룩, 물 외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1960년 쌀 부족으로 인해 순곡주 금지령이 내려졌다.
때문에 술 전통을 이어오기 힘들기도 하였다.
안동소주는 막걸리가 다 된 상태에서 지에밥과 누룩을 섞은 덧술을 다시한번 넣는다.
그 상태에서 25일간 숙성 시키면 청주가 되는데 그청주를 증류시켜 소주를 만든다.
그런 덧술을 세 번정도 반복한다.
안동 한지는 물에 젖어버려도 썩지만 않으면 처음처럼 복원이 가능하다.
오늘날의 양지는 수명이 1~200년정도 가지만 한지는1000년 이상가는 내구성을 지닌다.
안동의 한지는 닥나무 껍질을 벗겨 삶아내고 불순물을 골라 찧어낸 섬유를 찧어낸 뒤 물에 넣고 떠내 건조시켜 한지를 만든다.
안동 간고등어는 갓 손질된 고등어에 소금을 친 뒤 겉손과 속손이 합해져 하나늬 손이 된다.
옛날에는 냉장고가 없었기 때문에 고등어에 간을 칠 때 당시 냉동 역할을 하던 소금을 엄청 많이 넣었다.
반면 오늘날에는 냉장 보관이 가능하여 옛날 소금 친 것에 1/3정도밖에 치지 않는다.
간고등어는 소금으로 절여서 숙성시킨 것이기 때문에 깊은 맛은 간고등어가 좋고 그냥 심심하게 졸여서 먹을 때는 통고등어를 주로 쓴다.
안동포는 대마줄기로 만든다. 대마줄기의 껍질을 흐물흐물 불려 놓은 것을 생냉이라 한다.
익히지 않은 생냉이는 익힌 것 보다 품질이 10배나 좋다고 한다.
이 생냉이를 손끝으로 한올한올 가늘게 찢어낸다. 이 실로 베를 짠다.
옛날 아낙들은 베짜기를 무조건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혼을 할 수 없었다.
아낙들에게는 각자의 심정을 담은 노래를 하나씩 가지고 있다.
안동식혜는 18세기 중엽에 생겨 났다.
멥쌀이나 찹쌀밥을 지어 무와 고춧가루, 생강 등의 향신료와 섞어 엿기름물에 버무려 3∼4시간 발효시킨 음료로 맛이 시원하면서도 맵고 칼칼하며 김치보다 유산균이 많아 소화에 도움을 준다.
안동찜닭은 조선시대 안동의 부촌인 안 동네에서 특별한 날 해 먹던 닭찜을 바깥동네 사람들이 보고 안동네찜닭이라 부르기 시작한데서 유래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안동 구시장 닭 골목에서 손님들의 요구대로 이런저런 재료를 넣다보니 찜닭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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