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시 마스코트인 연오와 세오는 포항에 전해져 내려오는 유명 설화인 연오랑과 세오녀에서 따온 캐릭터들이다.
'포곡장전우수집항'이란 대울의 활처럼 굽은 백사장의 해변에 오른손으로 목덜미를 잡는다는 뜻으로, 포항의 해안단구가 발달한 지형이 이 문장에 알맞는다 해서 생겨난 설이다.
갯미기는 갯목을 뜻하는데 ‘갯’은 개울, ‘목’은 머리에 해당한다. 이를 한자로 옮기면 개울포(浦)와 목 항(項)이 되기에 생겨난 설이다.
근기국이 신라에 편입되고 난 이후 757년 경덕왕 대에 4개의 현이 명칭이 변하고, 또 고려 시대 초기에 명칭이 변해서 이어져 온다.
1914년, 일제강점기에 식민 지배를 위해 부군면 통폐합(대규모 행정 구역 개편)으로 앞선 네 개의 지역에 더해 현재 경주위치에 기계, 신광, 죽장을 묶어 영일만의 이름을 따 영일군을 짓는다.
1914년, 포항장의 이름을 따서 포항면으로 합쳐진다.
1949년, 수산업을 중심으로 포항시 승격.
포항 전투는 한국 전쟁이 터지고 나서 초창기에 있었던 큰 전투 중의 하나이다. 남한 면적의 대부분이 북한군에게 정복되었던 당시, 전쟁의 판도를 바꾸기 위한 초석이 되어주었던 전투이기 때문이다.
8월 5일, 수많은 북한군이 제3사단 후방지휘소가 위치한 포항여자중학교를 공격해 왔을 때, 71명의 학도의용군이 용감히 맞서 싸웠던 덕분에 포항 시민들이 피신을 하고 군이 제정비 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매체로는 포화 속으로라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이 편지는 포항여자중학교에서 싸운 71명의 학도의용군 중 한 명이었던 이우근 학도병이 전투 상황 당시에 어머니께 쓴 편지이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살아서 다시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이 아닙니다. 다시 쓸테니까요, 그럼..." 이 부분을 마지막으로 이우근 학도병의 편지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은 채, 피로 얼룩져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이 편지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경상북도 최초이자 유일하게 인구수 50만을 넘겨 특별시가 되어 일반구를 설치하였다.
형산강으로 인해 예로부터 포항의 지도는 시기에 따라 다른 형상을 띠었다. 퇴적된 삼각주 위로 생활권이 형성되어 왔기 때문이다.
경상북도 동해안에 위치해 있으며, 영일만과 호미반도를 끼고있다. 이로 인해 수산업이 발달해 있고, 또한 울산시부터 경주를 지나 영일만으로 현산강이 지나가고 있다.
해안선을 따라 해안단구가 좁게 형성되어 있고, 동해로 유입되는 형산강 및 자잘한 소하천을 따라 흥해평야, 영일평야 등의 충적지가 형성되어 있어서 농업 역시 발달해 있다.
서쪽은 태백산맥 끝부분에 위치해 산악지형을 이루며 평균고도가 비교적 높은 죽장면에서는 산촌의 형태를 띤다. 또 금호강이 죽장면 가사리에서 시작해 영천시로 흘러나가며 죽장면 상옥리에서 발원한 오십천이 하옥계곡을 거쳐 영덕군으로 흘러나간다. 촤고봉인 향로봉(930m) 외 높은 산들이 위치해 있다.
지형에 따른 생활권에 영향
논 농사는 포항의 지형상 중앙부부터 북쪽까지 이루어져 왔으나, 근대에 이를수록 영일만 면이 중심지로 발달하면서 자연스럽게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포항은 예로부터 낙동강의 퇴적 작용에 따른 지형의 변화가 이어져 왔다. 영일만의 삼각주 위로 상권이 발달했고, 1970년대 전까지는 이런 지형적 특성으로 고층 빌딩을 올리지 못한다. 그로 인해 경북 최대의 인구규모에도 시가지가 낙후된 듯한 모습이었다.
철강산업의 필요성을 인식한 박정희 대통령. 종합제철소 건설 자금을 외국에 모금하였으나 모인 금액은 목표액 33억 원의 0.4%인 1300만 원이었다고 한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선진국들과 국제 단체에서는 이를 두고 과시용 사업이라 보았다.
1965년 5월,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 피츠버그 철강단지를 방문해 제철소 건립 의지를 다지고, 이후 미국 제철소 건설 기술 용역 회사신 코퍼스의 포이 회장을 만나 의견을 피력한다.
그리고 충남 서천, 경남 울산, 삼천포 등의 제철소 건설 후보를 몰색한다 당시에 포항은 후보에 들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황병태와의 이야기 후 별 말 없이 포항으로 낙점하였다.
하지만 세겨은행이 대출을 거부했고, 국내외 많은 기관 및 회사들 역시 회의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여전했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박태준 회장에게 제철소 건설에 대한 모든 권한을 넘겨준다. 심지어는 국내 기관들의 회의적인 반응으로 난항을 격던 박태준에게 면전에서 불편한 요소를 전부 종이에 적게 하고, 그 종이에 사인을 해 돌려주며 국내에서 정치적으로 제철소 건설에 불편함을 겪으면 이 종이를 보여주라고 했다 한다.
그러나 여전히 제철소 건설 자금을 마련하지 못한 박태준은 결국 최후의 수단으로 대일 청구권 자금을 두고 일본과 협상하여 마침내 자금 조달에 성공한다.
이때 박태준 회장이 한 말이 훗날 포스코에서 '우향우 정신'으로 대표되는 저 제철보국 이야기이다.
2022년 9월 6일 오전 3시 초강력 태풍 힌남노가 북상하여 포항을 강타한다. 500년에 한 번 내릴까 말까 한 폭우가 내리고, 일일 최대 강수량이 541mm까지 올라간다. 30여개 공장의 지하가 침수되고, 공장의 일부분에는 지상까지 물이 차올랐다.
결국 감전과 폭발을 막기 위해 포스코 포항 제철소는 창립 이래 최초로 49년 만에 공장 전체 전원을 차단한다.
포항 시내는 장갑차가 구조를 다닐 만큼의 물바다였고, 형산강 일대에는 홍수 경보가 발령되었다. 특히 냉천의 폭이 좁아지는 하부 부분에 있었던 포항 제철소가 유독 피해가 막심했다.
축구장 1400여개의 공장 지대 반 이상이 침수되었고, 2조가 넘어가는 피해 금액이 발생하였다. 복귀까지 최소 6개월에서 1년은 걸릴 것이라 관측했으며, 또한 제철소를 중심으로 철강산업단지가 형성되어 있는 만큼 관련 산업의 초토화가 예상되었다.
제철소에서 고로(용광로)는 심장이라 불릴 만큼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정전 이후 제철소의 세 고로는 모두 정지되었고, 고로 안의 쇳물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굳어가고 있었다. 철이 완전히 굳는 데 까지는 총 200시간의 골든타임이 있었고, 그렇게 아연실색한 상황 속에 포스코는 복구 작업을 시작하였다.
숙련된 기술자, 사무직 등의 임직원은 물론이고, 은퇴한 전 직원들까지 복구 작업 총동원되었고, 거기에 인근 소방청, 해병대가 장비 및 인력을 지원해 주었다. 또한 50여개 민간업체, 국내 중공업자들이 소방펌프 고압 세척기 및 발전기 등을 지원해 주었다.
대형 모토 및 민감한 전기시설로 들어찬 압연공장에서는 오랜 노하우의 명장과 직원들이 일일이 기계를 분해하고 세척하였다. 그러나 거기서 나온 6000개 이상의 제어 시스템 칩을 건조할 방법을 찾지 못해 난항을 겪던 와중, 우연히 한 직원이 목욕탕을 다녀오다 건조 기계를 보고 아이디어를 얻는다. 그렇게 6000개의 칩을 건조하기 위해 임직원들이 각종 난방기와 헤어드라이어 등을 가져와 건조하였다.
침소 이틀 후, 하나 둘 공자에 전기를 돌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시 이틀 후, 3고로가 정상 가동되기 시작하였다. 제철소의 세 개의 심장 중 하나가 다시 뛰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침소 열흘 후, 골든타임 200시간 이내 3개의 고로를 모두 살려내는데 성공하였다.
제철소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으니, 이제 대동맥을 살릴 시간이었다.
토페도카(쇳물운반차)를 수리하기 위해 포항 제철소는 우선 300t 무게의 토페도카를 근처 공터에 옮기기로 했다. 이때 단지 내 현대제철 당진제철소가 여분의 운반차를 지원해 주며, 그렇게 토페도카 이동 작전 감행을 시작하였다. 도중에 광양제철소와 광진제철소도 동참하였고, 포항 산업단지 내에서도 지대가 높아 피해가 적었던 동국제강 포항공장도 힘을 보탰다.당시 동국제강 포항공장은 인장 시험기를 교체하기 위해 대한민국에 한 명 뿐인 엔지니어의 일정을 어렵게 섭외해 10월 11월로 맞춰 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힌남노 사태로 인해 포스코의 피해가 막심하다는 소식을 뒤늦게 듣고, 대승적으로 도움을 주지 않을 수 없다고 경영진들이 판단하였다. 그렇게 공사 일정을 한 달 가량 늦추고 포스코로 지원을 보낸다.그렇게 포스코는 1년도 6개월도 아닌 100일 만에 공장의 대부분이 정상적으로 가동되었다.
서로 세계 무대에서는 경쟁하는 사이이지만, 위기 앞에 하나로 뭉치는 철강인의 문화가 돋보이는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철강 산업에서 오랫동안 종사한 철강인들은 철이 대한민국 경제를 일으킨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물론 연간 산업계에 미칠 여파를 상정한 사업적 판단도 들어갔겠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앞 뒤 재쳐두고 같은 업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나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상남자 같았던 박태준 회장의 정신이 깃든 철강의 제국 위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13세 나이에 출가하여 19세에 승과 합격한다. 이후 10여개의 사찰 주지를 지내다가 1367년 공민왕 16년에 국사가 되었고, 1382년 76세 나이로 입적하였다. 심지어는 진각국사가 흥해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왕이 흥해를 현에서 군으로 승격하라는 명을 내리기도 하였다.
이방원과 나누었던 단심가로 유명한 정몽주이다. 포항 출신의 인물이라는 설이 있으며, 나름 포항시에서는 공식적으로 포항을 밝힌 8인에 올려 놓았지만, 현재로는 영천시 출신이라고 사실살 기정 사실화 된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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