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영화의 형식적 특성을 말하자면 웨스 앤더슨은 잡지 같은 영화를 만드려고 했다는 생각이 든다. 4:3 비율의 화면에 비치는 장면들은 마치 도판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컷으로 정지된듯한 화면과 활자의 감각들, 인물들의 움직임까지 정지된 것처럼 묘사한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정지된 화면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정지된 듯한 모습을 연기하라 주문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웨스 앤더슨의 유머인 동시에 동적인 사건들을 정적인 기억으로 서술하는 방식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연출은 내레이션과 더불어 화면의 달라지는 색감과 함께 활자의 질감을 만들어내고 관객은 마치 잡지, 그러니까 말 그대로 프렌치 디스패치를 읽고 있는 듯한 감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또 다른 특징을 살펴보면 이번 영화의 모든 화면들은 트래킹 샷으로 만들어졌다. 좌우로 움직이며 인물의 움직임을 평 향하며 일정한 거리를 두고 찍으며 깊이감을 만들어 낸다. 트래킹 하는 카메라와 인물 사이의 거리는 세계와 예술이라는 간극을 만들어 낸다. 그 간극은 관객에게 향수(노스탤지어)를 전한다. 웨스 앤더슨은 그 향수를 정지된 순간들이라 말하고 있다.
이런 형식들로 그가 전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은 무엇일까? 우선 반복되는 숫자 ‘50’을 살펴본다면 프렌치 디스패치는 50년이라는 세월 동안 50개국에서 50만 부가 팔리고 있고 심지어 극 중 인물인 로젠 탈러가 받은 형기가 50년이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올해 50을 맞이한 웨스 앤더슨 자신을 아서에 투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편집장인 아서의 죽음으로 시작해 잡지사를 이루는 기사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지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영화를 언뜻 보면 마치 언론에 대한 헌사를 바치는 것처럼 오해를 할 수도 있다. 웨스 앤더슨은 ‘뉴요커’를 탐독했던 자신처럼 하나의 예술적 동지로서 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 순간 아서의 죽음은 프렌치 디스패치라는 예술의 자장 안에서 영원히 회자되며 존재할 것이고 웨스 앤더슨 자신 역시 영화라는 형태로 남아 플레이되는 것이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이 영화는 ‘예술품’이 아닌 ‘예술가’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극 중 대사 중에 모든 것에는 아름다움이 있는데 그 아름다움에는 비밀이 있다는 문장이 나온다. 앞서 향수에 관한 이야기를 했지만 우리가 대상에서 어떤 향수를 느낀다면 거기서 풍기는 아우라가 훌륭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읽어내고 밝혀내는 예술가들이 있고 영화 속에서 그것은 아서이고 그 아서는 감독 자신인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제의식은 흑백과 컬러를 다루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한 본 내용인 3개의 기사를 다루는 형식을 보면 일반적으로 중요해 보이는 기사의 내용이 전개되는 사건들은 흑백으로 처리하고 그것을 다루는 서술자의 상황은 컬러로 보여준다. 일반적인 방식으로 갔다면 액자 속 내용을 컬러로 입히고 서술자를 흑백으로 처리했을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기사 속 내용으로 등장하는 68 혁명도 감방에 수감된 미술가의 이야기나 경찰서장 아들이 납치된 사건이 아닌 그것을 써 내려가는 사람들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 그 자체가 아닌 그것을 언어화하고 볼 수 있는 형태로 다듬어 내는 이들에게 헌사를 바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주제의 한축은 외로운 이방인으로서의 아서다. 그의 방에 걸린 문구는 ‘no crying’ 울음 금지이다. 이 말은 연민에 빠져 기사를 쓰지 말라는 경고이자 담백하고 정갈한 글을 쓰라는 메시지다. 로벅 라이트가 쓴 요리사 네스카피에에 관한 글에서 슬픈 부분이라 버려진 글에서 감정이 동요하게 되고 버려진 부분을 기사에 실으라 주문한다. 네스카피에는 죽음의 문턱에서 발휘했던 용기에 관해 질문을 받았고 그는 자신이 외국인이고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해야 만 했던 행동이라 말하게 된다. 그에 로벅은 흑인이자 동성애자인 자신 역시 그러하며 이곳엔 우리가 너무 많다는 이야기를 한다. 아서는 마음속으로 그 글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텍사스를 떠나 프랑스라는 이국의 땅에서 불어가 아닌 영어로 잡지를 출간하는 권태롭고 타인에게 무관심한 마을에서 50년을 보낸 자신의 모습을 봤을 것이다. 영화는 마지막이 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아서의 죽음을 애도하며 부고 기사를 쓰려고 모두 모인 직원들의 모습을 비춘다. 거기엔 마침 아서의 생일을 기념해 배달된 케이크가 와있다. 배가 고픈 필진들은 케이크를 나눠 먹으며 한 마디씩을 보태며 기사를 써나간다. 탄생의 축하와 죽음에 대한 애도가 동시에 진행되는 현장, 그 속에서 생각과 의견의 모여 기사는 만들어진다. 웨스 앤더슨의 영화 속에는 상대를 이해하는 이들의 정서는 없다. 모두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고유의 방식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의 삶에 방식에 대해 존중과 우애를 가진다. 이것이 그가 사람을 보는 그에게 가장 이상적인 인간관계상이라고 보고 있는 듯하다.
그에게 예술은 순간을 고정하여 낯선 곳으로 옮기는 작업이자, 그것이 불러오는 향수에서 무얼 느끼게 하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예술에 대한 비전과 그것을 끌어내는 사람에 대한 생각을 웨스 앤더슨은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아마 이 작품 역시 시간이 지나도 다양한 시선으로 회자되는 작품이 될 것 같다.
첫댓글 크~~굿모닝과 함께 소대님의 리뷰네요!!
좋은 글 잘 봤어요
영화 빨리 보고싶어서 현기증이 날 정도네요 ㅋㅋㅋ 소대가리님의 예리한 시선과 통찰력은 항상 기대 이상인듯요 ^^ 멋진 리뷰 항상 감사해요 😘
자막없이 한번 더 보구 싶은 영화 였어요..소대가리님의 리뷰를 보니 더욱더 그런 맘이 드네요.
제가 보지 못한 이면을 집어 내 주시니..
좋은 글 감사합니다.
그래서 우리 티모시는요??ㅎㅎㅎㅎ
역시나 잘생긴 애가 연기도 잘 했던가요? ㅋㅋㅋㅋ
항상 영화를 보고 싶게 만드는 매력적인 리뷰 잘 봤습니다~ ^^
와..리뷰가 넘 멋져서 영화를 보러 극장을 가고싶게 만드네요.
소대가리님은 영화홍보가!!
와 화면이 끝내주네
라고 밖에 생각못한 제 자신을 반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