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의 기도를 전복하는 기도
세상 사람은 끊임없이 복을 청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이미 복 받은 이로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숱한 종교인들이 하는 기도와는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어디에서 비롯될까요?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하는 새로운 정체성에서 비롯됩니다. 하느님 나라와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들과는 다른 기도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는 신앙의 모습을 결정합니다. 신앙이 추구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라는 뜻입니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생각이 곧 그 사람입니다. 따라서 생각의 대상과 그 사람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기도는 생각 이상입니다. 기도는 단순히 자기 생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기도는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기도의 출발점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이 특징입니다.
기도하기에 신앙인이고, 신앙인이기에 기도합니다. 생각과 삶이 분리될 수 없듯이 신앙과 기도 또한 분리될 수 없습니다. 무엇을 놓고 기도하는가가 신앙을 결정합니다. 어떤 기도를 드리느냐가 신앙의 본질을 드러내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이 복을 찾아 헤매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미 하느님으로 채워진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에는 목마를 일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백성들이 드리는 기도가 다른 이유가 이것입니다.
만약에 세상 사람들이 청하는 것과 같은 것을 청한다면, 중심에 하느님이 계시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하느님이 계시지 않기에 여전히 목마른 것입니다. 하느님이 계시지 않으므로 부족한 걸 느끼고 결핍감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축복에만 매달린다면 다른 종교인들과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갓난아기는 엄마 젖을 배불리 먹고 나면 더 이상 요구할 게 없습니다. 그저 평온한 얼굴로 잠이 듭니다. 필요한 모든 것을 엄마가 채워 준다는 것을 알기에 아기는 엄마만으로 족합니다. 아이가 엄마만으로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는 것은 자의식이 생겨나면서부터입니다. 급기야 성인이 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실은 내면에 숨긴 결핍감이 날로 커질 뿐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계속 커져 가는데, 그것을 충족시킬 수단은 제한적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회개하여라, 다시 태어나라." 하고 말씀하셨을까요? 왜 예수님께서는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루카 18,17)고 말씀하셨을까요? 하느님으로 채워짐을 경험하지 못한 채, 여전히 목말라 하는 사람은 구원의 본질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 나라에 맞아들이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에 관한 말씀으로 산상 설교를 시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보다 세상 백성과 하느님 나라 백성은 복에 관한 관점에서 달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 이미 복 받은 자임을 아는 데서부터 그리스도인의 삶이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대표적인 종교적 행위로 꼽히는 자선이나 단식이나 기도가 하느님 나라의 복을 위해서는 별 쓸모가 없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복의 통로로 믿어 온 사람들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자기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서 열심히 단식하고 자선하며 선행을 했는데, 그것들이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니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겠으며 동시에 분노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와 주님의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착실히 쌓은 마일리지를 무위로 돌리시는 분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몇 년에 걸쳐서 항공사 마일리지를 백만 마일이나 쌓았는데, 이제 그것으로는 좌석 업그레이드도 안 된다는 통보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얼마나 실망스럽겠습니까?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어떤 이는 항공사 앞에서 항의 시위도 불사할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뜻을 따라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구하기 위해서 기도해 온 많은 종교인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반감을 품었을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라면 그에 합당한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말씀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데, 그들이 원한 것은 하느님 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기존의 기도를 뿌리째 갈아엎는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부르는 호칭부터 바꾸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마태 6,9)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라고 하십니다. 기도는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는 삶의 태도입니다. 기도는 아버지의 이름에 합당하게 살기를 결단하는 태도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은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계명대로 살겠다는 다짐에서 기도가 시작됩니다. 하느님의 얼굴에 먹칠하지 않고 살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부르는 데서부터 기도를 시작하라고 가르치십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에 합당하게 살기를 갈망하는 것은 서원이나 다름없습니다. 이것은 '나는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않고, 그 이름에 걸맞은 삶을 살겠다'는 결단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른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하늘 아버지의 이름에 걸맞게 살아야 합니다. 하늘 아버지의 꿈은 구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백성을 세상에서 건져 내시는 분입니다. 구원은 우리를 차원이 다른 삶으로 인도합니다.
하느님의 법은 윤리 이상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누가 5리를 가자고 하면 10리를 가 주는 것이 상식이요 도덕입니다. 그런데 그 이상으로 사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 이상으로 살아야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삶입니다. 그 이상으로 사는 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도록 사는 삶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온종일 중얼거린다고 해서 그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이야기를 쉴 새 없이 한다고 해서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에 신앙의 긴장이 있습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며 살 수 없기에 날마다 순간마다 기도의 자리에 앉아야 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 6,10)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관해서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기 시작하면, 우리 가운데 하느님 나라가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뜻은 곧 하느님의 성품입니다. 사랑과 정의의 하느님을 따라 사는 사람은 서로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공동체적인 사랑의 모습이 바로 정의입니다. 서로 사랑하는데 상대방을 속이겠습니까? 서로 사랑하는데 험담하겠습니까? 정의와 사랑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 두 가지로 계명이 완성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자신을 추구하는 세상입니다. 겉으로야 어떻게 보이든지 간에 우리는 모두 자신을 추구하며 살고 있습니다. 속일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압니까? 옆구리를 찔러 보면 압니다. 발을 한번 밟아 보면 압니다. 손해 끼쳐 보면 압니다. 그래서 자기 본성을 거슬러 기도해야 합니다. 본능적으로 드리는 기도는 어떻습니까? "내 이름이 유명해지게 하소서. 내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내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평생 이런 기도 지향을 붙들고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심지어 주문도 오래 외우면 능력을 발휘한다는데, 주님의 기도를 많이 외우고도 삶에 힘이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주문만도 못하게 만드는 셈입니다. 밤낮없이 주님의 기도를 외우면서도 여전히 하느님 나라가 아닌 자기 나라를 고집하고 있다면 도대체 그 기도가 능력이 있겠습니까? 기도한 대로만 살아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성경 공부를 아무리 해도 기도한 대로 살아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 있습니까? 그런 기형적인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짧은 기도를 지난 2,000년간 수많은 사람이 되뇌어 왔습니다. 그런데도 기도가 그리스도인을 바꾸지 못하고, 교회가 교회다움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면 주님께서는 여전히 우리와 상관없는 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나도록 살면 하느님 나라가 옵니다. 내 안에서 마귀가 물러가면 내 안에 마귀 나라가 무너지고, 하느님 나라가 세워집니다. 사회에 부정과 비리가 그치면 하느님 나라가 온 것입니다. 거짓과 폭력이 사라지면 하느님 나라가 온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오면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느님의 이름과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뜻은 별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추구하는 삶은 필연적으로 세 가지를 모두 포함합니다. 하느님을 추구하면서 하느님 나라가 아닌 자기 나라를 세우고자 할 수 없으며, 하느님의 뜻을 청하면서 자기 뜻을 관철하기 위해 고집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구하는 사람들이 함께하는 공동체는 어떤 모습일까요? 관계 혁명을 경험하는 공동체입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이기적인 인간의 속성이 허물어지고,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가 충만한 관계 혁명을 이루어 내는 곳입니다.
두세 사람이 모여 자기 이름과 자기 나라와 자기 뜻을 구하지 않고, 하느님의 이름과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뜻을 구한다면 이 세상에서 경험해 보지 못한 관계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하느님 나라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도하는 목적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새로운 기도를 가르쳐 주신 이유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하느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하느님 나라 백성의 선서와도 같습니다.
첫댓글 아멘.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