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상으로의 초대/김태영
1.
나는 택배 기사다. 우리가 흔히들 알고 있는 노란 모자를 쓴 엘로우 캡이나 경동 택배가 아닌 가구만 배달하는 가구 전문 택배 기사다. 택배 기사의 하루는 길고도 짧다. 정신없이 배달하다 보면 언제 해가 졌는지도 모를 정도로 시간에 쫓긴다.
늘 똑같은 일상이지만 어느 하루, 조금은 특별했던 나의 하루에 당신을 초대해 본다.
2.
아침 여섯 시 핸드폰의 진동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진다. 찌뿌듯한 몸뚱이 여기저기 안 아픈 곳이 없다. 일어나기 싫어서 뭉그적거리다 보니 예민한 아내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알람 대신 나의 기상을 재촉한다.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뜬 나는 지난밤 아내가 준비해 둔 된장찌개에 밥을 말아 훌훌 마신다. 밥을 먹는 것인지 그냥 삼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입안에 굴러다니는 밥알들이 껄끄럽다. 마치 모래알을 씹는 것 같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먹기 위해 사느냐? 살기 위해 먹느냐? 라는 어리석은 질문을 들은 적이 있다. 그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이 질문에 굳이 대답하자면 지금의 나는 분명 살기 위해 먹는 것이 맞다.
아침을 먹고 대충 세면을 하고 아파트 주차장에 세워진 조금은 낡은 화물차에 올라타 내 삶의 터전인 물류 회사로 향한다. 이번 여름은 유난히 덥다더니 아직 일곱 시도 안 되었는데 바깥 공기는 벌써 후끈 달아올라 있다.
이십 분 거리에 있는 회사에 도착하니 부지런한 건지 새벽잠이 없는 건지 모르겠지만 몇몇 직원들은 이미 상차를 끝내고 출발 대기 상태에 있다. 지독한 사람들! 그러니까 지금 출발하려면 최소한 다섯 시에는 상차를 시작해야 하는데 그러면 집에서 네 시에 나온다는 거야 뭐야?
내 자리에 놓인 송장을 들여다보며 하루를 준비한다. 어제 간 그 동네, 지난달에 갔던 그 동네, 1년 내내 다니던 같은 동네이지만 송장에 새겨진 주소는 여전히 낯선 새로운 곳이다. 순서를 정하고 배송 완료 송장을 정리하고 콜을 시작한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대부분 상냥하고 부드러웠지만 매일 스무 집이 넘다 보니 고객들의 성향도 제각각이다. 시간을 맞춰 달라는 사람들, 자기 집에 있는 폐가구를 수거해 달라는 사람들, 심지어는 티브이 배선을 해 달라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택배 기사들이 그런 일을 할 수도 없거니와 해 줄 의무도 없기에 가볍게 거절하지만, 때론 막무가내로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려는 고객들이 한 둘쯤 있기 마련이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다. 시간을 맞추어 줄 수 없다는 말에 전화기 너머로 격앙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러니까 제가 직장에 다니는 사람인데 저녁 일곱 시에 가져다 달라고요.”
“아, 고객님 저희는 여러 집을 경유하는 일반 물류 회사라서 시간을 맞추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정 안되신다면 문 앞에 놔드릴게요.”
“이봐요, 아저씨 저 여자 혼자 사는데 누구보고 가구를 집으로 들여놓으라는 거예요. 잔소리 말고 저녁 일곱 시에 가져다주세요.”
“저 죄송합니다만, 서울 경기·인천을 한 바퀴 돌고 다시 포천까지 돌아와야 하는데 가능치가 않아요. 정 안되신다면 토요일에 받으시면 어떠실는지요.”
“그건 댁의 사정이고 고객이 배송비 내고 가져다 달라면 고객의 시간의 맞추어줘야지요. 그 시간에 안 가져다주면 가구 취소하겠어요.”
혈압이 오르기 시작한다. 댁의 사정이라니? 댁의 사정이라니? 택배 기사가 당신 전용 기사인가?
“이봐요, 아줌마 그럼 저녁 일곱 시에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당신 사정이지 제 사정인가요? 여자 혼자 사는 게 당신 사정이지 제 사정이에요? 댁의 사정이라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꾹꾹 눌러 삼킨다. 이렇게 말하면 분명 구매 사이트에 네 가지 없는 기사라고 댓글을 달 게 뻔할 뻔 자니 말이다.
“취소하시는 건 고객님께서 결정하시고요. 시간을 맞추어 드릴 수 없으니 날짜를 지정해 주세요.”
“내가 쇼핑몰에다 전화할게요, 뭐, 이딴 개새끼가 다 있어…….”
끊기지 않은 수화기 너머로 개새끼라는 그녀의 욕설이 들려온다. 아! 정말 마음 같아선 똑같이 욕을 해 주고 싶지만 참자! 참자! ‘참을 인’자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 했다. 오늘을 참으면 직장이 있고 오늘을 못 참으면 직장을 잃는다. 제발 참자. 부글부글!! 그래도 어쩌랴, 목구멍이 포도청인걸,
우여곡절 콜이 끝나자 상차를 시작한다. 모두 물건 찾기에 열심이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물건을 찾는 소질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소풍 날 모두가 한두 장은 찾아보았던 보물찾기조차 단 한 번도 찾질 못했다. 이런 나의 천성이 어디 가랴. 가구 물류 회사에 취직한 지 10년이나 됐음에도 불구하고 가구를 더럽게 못 찾고 허구헛날 헤매는 꼴이라니, 스스로가 웃긴다. 그래서 상차 시간이 남들보다 조금은 더 길다. 같이 시작해도 상차를 끝내는 건 항상 내가 꼴찌다. 오늘도 어김없이 모두가 떠나고 마지막으로 내가 남았다. 여름이라 아홉 시가 되기 전에 해는 이미 중천으로 솟아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아침부터 푹푹 찌던 더위가 햇살에 더 뜨거워졌다. 땀 줄기가 온몸을 타고 흘러 옷이 흠뻑 젖었다.
3.
마침내 차를 출발시키고 라디오를 켜자 양 희은 누님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가구 배달 일 훨씬 이전부터, 어쩌면 내가 운전대를 잡기 시작했던 때부터 듣던 목소리일 게다. 그렇게 희은 누님의 목소리를 듣고 한참을 가고 있는데 쇼핑몰에서 전화가 온다. 내용이야 안 봐도 뻔하다. 아침에 통화한 욕지거리 아주머니의 문제다. 그래서 뭐? 시간 지정은 계약부터 안 되는 거로 되어 있고 물류 회사에서도 절대 약속하지 않는 사안이다. 운행 거리 하루 200km 이상을 배달하고 집수로는 평균 20에서 30집 사이니 시간 맞추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시간약속은 하지 않는 것이 가구 물류 업계의 불문율이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해서 신용을 갉아먹는 것보다 할 수 없다고 말하고 약속을 지키는 것이 훨씬 더 높은 신용도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설명을 들은 쇼핑몰 직원의 한숨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다. 그 한숨 사이로 상담 직원의 고충이 흘러나오는 것 같아 괜스레 마음이 아프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전 11시 15분경 인천 입성 드디어 배달 일이 시작되었다. 그럭저럭 오전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13시도 안 되어 일곱 집의 배달을 마쳤다. 오늘 가지고 나온 건수가 그 망할 아줌마를 빼고 총 24건, 이 정도 속도라면 적어도 여섯 시 안에 모든 배달을 마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하지만 이것은 그저 나의 바람이요,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점심을 먹고, 여기서 잠깐! 사담 하나를 늘어놓자면 우리 회사 직원들은 대부분 하루 한 끼만 먹는다. 아침은 입맛이 없어서 거르고 점심은 시간에 쫓겨서 거른다, 그리고 저녁에 폭식한다. 유일하게 나만 하루 세 끼를 먹는다. 이런 이유로 우리 회사 직원들은 나를 포함해 대부분 장 트러블에 시달린다.
오후 한 시가 넘으니 햇볕이 그야말로 땡볕이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고 숨이 콱콱 막혀온다. 핸드폰에 불볕더위 경보라는 문자 메시지가 뜬다. 36도란다. 어린이와 노약자는 외출을 삼가고 물을 자주 마시고 휴식을 취하란다. 배부른 소리다. 지난달 월급 통장에 찍힌 39만 원이 나를 울린다. 10년 만에 받아든 최악의 성적표다. 가구업계가 여름이 아무리 비수기라지만 이건 너무했다. 그렇다고 펑펑 논 것도 아닌 것이 배달 양이 줄면 그만큼 구역이 넓어진다. 즉 경비 소요가 많고 시간은 배로 들고 효율성은 최악이다. 구멍 난 생활비를 메우려면 덥든 말든, 폭염 경보든 말든 일을 해야 한다. 여름은 더워야 제맛이라는 말이 있다. 이깟 더위쯤이야 어차피 땀 흘리고 일할 것 이열치열 즐겨나 봐야겠다.
오후 첫 집이 신발장을 주문한 고층아파트 13층이다. 아파트 도로에 차를 대고 신발장을 들고 지하 2층에 있는 엘리베이터 입구에 다다른 순간, 오 마이 갓!
엘리베이터 입구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승강기 사용금지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설마, 설마?”
하면서 신발장을 메고 1층으로 올라가 보지만 역시나 승강기 버튼이 꺼져 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승강기 버튼을 눌러보지만 역시나 묵묵부답이다. 그냥 갈까 하다가 무언가 미련이 남아 2층에도 올라가 보고 3층에도 올라가 보지만 승강기 버튼이 응답 없기는 매한가지다. 신발장을 올려놓은 1층까지 내려오면서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그냥 계단으로 올려? 엘리베이터 고장이라고 내일 다시 온다고 할까? 아니, 아니야 잘 생각해 봐. 3개로 나누어진 책상 세트를 빌라 5층에 배달하면 결국 15층이나 되잖아, 그럴 때는 불평 한마디 안 하고 배달했잖아. 근데 왜 13층은 못 올려? 그래도 13층은 너무 하잖아, 빌라 5층 세 번 날라도 만원, 이거 13층 한번 날라도 만원 어차피 같은 값이잖아, 아니야, 아니야 그래도 이건 아니야, 너무 힘들어. 그냥 내일 다시 온다고 할까?’
생각이 생각을 막고 생각이 생각을 뒤집는 사이 1층에 내려와 벽 한쪽에 세워진 신발장을 본 순간, 그놈의 39만 원이 생각 난건 또 뭐람. 아! 그래 39만 원이었지. 39만 원…….
“여보, 39만 원 들어왔네. 축하해.”
아내의 농담 섞인 목소리가 귓전을 맴돈다.
‘그래, 올라가자, 까짓거 뭐, 2000*1200 책꽂이 들고 15층까지 올라간 적도 있었잖아.’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며 신발장을 들쳐 메고 만세를 부르며 계단을 오른다. 2층을 지나는데 날씬하고 예쁘장한 아줌마가 난간을 붙들고 계단을 오르고 있다.
“엘리베이터가 고장 났나 봐요.”
내가 인사치레를 하자 아줌마가 숨을 헐떡이며 한마디 하신다.
“그러게요, 저는 26층 사는데 거기까지 언제 올라간대요.”
말을 마친 아줌마가 긴 한숨을 내 쉰다.
“하하, 저도 이거 메고 13층까지 올라가야 해요. 천천히 오세요.”
말을 마친 나는 서둘러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3층, 4층, 5층, 6층…….
가도 가도 끝이 없다. 목과 어깨에 걸치기 위해서 곧게 뻗은 팔이 점점 구부러지고 목에 걸쳐 있던 신발장은 자꾸만 목이 아닌 허리에 걸쳐진다. 다시 목에 걸치기 위해서 힘껏 팔을 뻗어보지만, 다시 스르르…….
9층부터는 거의 한계 상황이다. 그래 잠시만 쉬자, 9층에 신발장을 세워 놓고 잠시 숨을 몰아쉰 다음 다시 힘을 내서 고고 씽~ 마침내 1301호에 도착해서 초인종을 누르니 예쁜 여학생이 나온다.
“이봐요,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났으면 다음에 오라고 했어야지요.”
인사도 하기 전에 이 말부터 튀어나온다.
“아, 정말요? 엘리베이터 고장 났어요? 몰랐어요. 죄송해요.”
미안하다는데 할 말이 없다. 그냥 내려가자. 물건을 전해주고 돈을 받고 인사를 하고 나오려는데 이 예쁜 학생 잠깐만 기다리라더니 내 손에 두유 하나를 건네준다.
아! 두유, 두유, 장 트러블 때문에 유제품을 일절 못 먹는 내가 가장 많이 받는 음료수가 바로 두유다. 그래서 내 차에는 언제나 두유가 한가득하다. 어쨌거나 고객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으니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두유를 손에 쥐고 올랐던 계단을 다시 내려간다. 8층을 지나치려는데 올라갈 때 만났던 미시 아줌마랑 또 마주쳤다.
“고생이 많으시네요.”
나의 인사에도 이 아줌마 숨이 차는지 대답조차 하지 못한다. 그저 난간을 붙들고 숨만 헐떡이고 있다. 여인의 미모를 한층 업시켜주는 그녀의 하이힐이 오늘따라 유난히 안쓰러워 보인다.
4.
엘리베이터 고장으로 아무짝에 쓸모없어진 손수레를 차 바닥에 집어 던지고 아파트 그늘에 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는데, 경직된 근육이 이완되면서 살짝 흐르던 땀이 급작스럽게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그야말로 줄줄 흐른다. 비 오듯이,
비 오듯이...
비 오듯....
비 오...비,
비, 비!
뜨아악, 비 온다!
햇빛 쨍쨍하던 하늘이 순식간에 어둠으로 덮인다. 번개가 번쩍인다. 천둥이 친다. 비바람이 몰아친다. 폭포수 같은 물줄기가 쏟아진다. 아파트 그늘에서 용수철처럼 튕겨 나온 나는 다람쥐처럼 화물차 지붕에 올라 천막을 펼친다. 그러나 때는 늦었다. 성난 하늘이 내게 단 오 분의 여유도 허락지 않고 차에 실린 가구에 물 한 양동이 퍼부어 놓는다. 차 바닥에 빗물이 줄줄 흐른다. 그래도 가구가 젖지 않게 하려고 최선을 다해 천막을 씌운다. 덕분에 내 몸도 흠뻑 젖는다. 천막을 씌우고 운전석에 올라타는데 온몸에서 물줄기가 줄줄 흘러내린다. 옷에서, 바지에서, 신발에서 땀과 뒤섞인 빗물이 줄줄 흐른다. 비바람이 들이쳐 창문을 닫으니 후텁지근한 여름 공기에 숨이 막혀온다. 너무 더워 에어컨을 켜니 찬바람이 젖은 옷에 스며 온몸이 으슬으슬 떨린다. 더욱 세차게 내리는 비 때문에 창문을 열 수도 없다. 진퇴양난이다.
세차게 내리는 비를 피해야 할 텐데 피할 곳이 없다. 가구 높이 때문에 지하주차장에는 진입 자체가 불가능하다. 성난 하늘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지만, 별도리가 없다. 그냥 이 비가 지나가기를, 빨리 그치기를 빌 뿐이다. 제발 가구가 빗물에 부풀지 않기를 빌 뿐이다.
내 바람과 달리 빗줄기는 좀체 수그러지지 않는다. 삼십 분이 지났건만 빗줄기는 더욱 요란하게 쏟아지고 있다. 아직 배달할 집이 많은데 비가 그치기를 언제까지 기다리고 있을 순 없다. 할 수 없이 빗줄기를 뚫고 다음 집으로 차를 몬다. 결속이 제대로 안 된 천막 자락이 맞바람에 마구잡이로 펄럭인다. 펄럭일 때마다 가구에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스럽다. 다음 집에 도착하니 빗줄기가 조금은 가늘어졌다.
천막을 들추고 물건을 내리려 하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천막을 머리에 이고 물건을 내리니 멈출 것 같던 빗줄기가 다시 거세게 퍼붓는다. 소나기치고는 꽤 긴 시간을 쏟아붓는 게 여간 고약스러운 게 아니다. 쏟아지는 빗물이 손톱에 스민다. 빗물이 스민 손톱 사이에서 열꽃이 핀다. 눈물이 핑 돈다. 언제부터인가 손가락과 발가락 끝이 불에 덴 듯 아파지기 시작했다. 몇 번이나 병원에 가봤지만, 이상 없다는 의사의 대답만 들을 수 있었다. 처방이라 해야 진통제와 소염제가 섞인 알약 몇 봉지가 전부였다. 날이 지나고 달이 지나도 차도가 없어 병원 대신 약국에 들렀다. 증세를 설명하니 말초 신경이 파괴되었단다. 가구 배달하느라 몸을 혹사한 것이 원인이었다. 가구를 붙들기 위해 손끝에 힘을 주다 보니 무리가 간 모양이다. 약사의 권유에 십오 만원이나 하는 고단위 비타민제를 손에 들고 나왔다. 약을 먹는 동안에 한동안 잠잠했었다.
지난달에 약이 떨어졌다. 며칠 약을 끊었더니 손톱 끝 고통이 되살아났다. 할 수 없이 약을 사려는데 아내가 말렸다.
“여보, 이달에는 아들놈 비타민제 사야 하는데 이달만 약 끊어요.”
아내의 말에 집어 들었던 약봉지를 내려놓았다. 아들 먼저 챙기는 아내가 내심 서운했지만 39만 원의 입금 내역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사회에서도 가정에서도 아웃사이더가 되는 느낌이다.
약을 끊은 지 열흘째다. 아파도 정신없이 일하다 보면 어느 정도 잊히는데 비가 오면 상황은 달라진다. 열꽃이 피어 있는 손톱 사이에 빗물이 스며들면 그야말로 고문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불에 달궈진 뚝배기 그릇을 맨손으로 붙잡고 있는 느낌이다. 빗물이 스밀 때마다 전기에 감전된 듯 온몸을 부르르 떤다. 비에 젖은 신발에서 철버덕 소리가 난다. 젖은 양말이 거추장스러워 벗어던진다. 그래도 일은 해야 하기에 억지로라도 물건을 내려 어깨에 들쳐 메고 빌라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이번에 배달할 집은 빌라꼭대기 층이다. 하루에 열댓 번의 계단을 오르지만 5층은 당최 익숙해지지 않는다. 거기에 앞집에서 14층을 오르느라 풀린 다리엔 아무런 힘이 없다.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 자꾸만 힘이 빠지는 두 팔, 3층을 지나칠 때는 그냥 주저앉고 싶을 뿐이다. 어찌어찌하여 5층 고객 집에 들어가 포장을 뜯었는데 오! 마이 갓!
걸레받이가 깨져 있다. 배송비 만 오천 원을 안 받을 테니 그냥 사용하시면 어떻겠냐는 나의 제안에 냉정한 고객님 한마디로 거절하신다. 다시 가져가란다. 새 물건으로 바꾸어 달랜다. 할 수 없이 인사를 하고 나와 계단을 내려다보는데 망연 실색, 아연자실이다. 뭔가 바뀐 것 같은데…… 하여튼 뭐,
걸레받이가 깨졌으니 배송비 못 받는 건 둘째 치고 가구값까지 물어줘야 한다. 누가 깼는지 처음부터 불량이었는지는 의미가 없다. 파손 건은 무조건 마지막 배송 기사가 변상한다. 마지막 설치 기사가 확인하기 때문이다. 억울해도 별수 없다. 그저 뭐 하나 밟았다고 그냥 그렇게 넘기면 그만이다. 그러나 내가 지금 이 빌라 5층에 서서 한숨짓는 것은 배송비를 못 받아서도 아니요, 파손비를 변상해야 하는 억울함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풀린 다리로 이 무거운 레인지대를 1층까지 지고 내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후진해야 한다. 1800mm라는 높이 때문에 앞으로 내려오면 위는 천정에 부딪히고 바닥은 계단에 부딪힌다. 두 팔을 곧게 뻗고 만세를 부르며 후진해야 한다. 어차피 물어줄 것 버리고 간다 치더라도 1층까지는 내려가야 한다. 파손 상태에 따라서 변상비용이 달라지는데 이 정도의 파손은 이만 원 정도다. 반품하면 어쨌든 완파 비용 십만 원보다는 적게 물린다. 기를 쓰고라도 더는 상처 나지 않게 내려와야 한다. 또다시 땀을 뻘뻘 흘리며 1층으로 내려오니 다행스럽게도 비가 멈추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햇볕이 쨍쨍하다.
천막을 걷어서 갠 다음 다시 여행용 가방(차량용 선반)에 묶어 놓고 화물칸에 실린 가구들을 정리한다. 받을 사람이 없어서 아침부터 싣고 다녔던 2000mm 책꽂이가 하나, 불량품이 왔다고 해서 교환해 준 렌지다이가 하나, 그리고 조금 전 수취 거부한 렌지대가 하나, 싣고 다니지 말아야 할 물건들이 세 개나 실려 있다.
앞으로 남은 집수가 대여섯 집 일찍 끝나리라는 예상과 달리 벌써 오후 네 시가 훌쩍 지나버렸다. 일찍 들어가기는 애초에 글러 먹었다. 문득 아침에 아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여보, 일찍 들어와 오늘 무슨 날인지 알지?"
무슨 날? 아내 생일? 아내 생일은 9월인데 결혼기념일? 여름날에 결혼식을 올린 것 같기는 한데 아내나 나나 결혼기념일 자체를 모른다. 결혼기념일을 한 번도 챙겨본 적이 없다. 5년을 동거하다 식을 올렸으니 결혼기념일 자체가 의미 없어서 서로 모른 체하고 살았다. 에라, 모르겠다. 일찍 귀가하는 건 포기하고 그냥 일이나 하자.
물건을 순서에 맞게 정리하고 다음 집으로 향했다. 이십 분을 넘게 달려 다음 집 아파트에 도착하여 물건을 내리는데 소사소사 맙소사! 빗물이 스민 책꽂이가 탱탱 불어터져 있다. 아! 내 속도 미어터진다. 꼼짝없이 변상해야 한다.
어른이 안 계시고 아이만 있어서 사진을 전송한 후 앞집에서 실패한 협상을 시도해 본다.
"상황이 이렇게 됐네요. 배송비 이만 원 빼 드릴 테니 그냥 사용하실래요. 교환해 달라고 하시면 당연히 교환해드려야 하니 부담 갖지 마시고 결정하세요."
잠시만 기다려 달란다. 생각 좀 해보고 전화한단다. 비에 젖은 박스와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그냥 쓰겠단다. 이미 일주일이나 기다렸는데 또 일주일이나 기다리기에는 너무 지쳐있단다. 고마움과 미안함이 동시에 교차했다. 심하게 부푼 가구를 배달하며 미안한 마음에 아이한테 만 원짜리 한 장을 쥐여주고 나왔다. 수수료 떼고 배송료 만원을 가져가는데 기사 몫 빼고도 이만 원을 더 물어준 셈이다. 내 차에 내 돈으로 기름 넣고, 일해 주고, 돈 물어 주고,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혹시나 다른 집거도? 그러면서 다른 가구들을 살펴보는데 역시나 하나같이 부풀어 올라있다. 아 진정 가혹한 형벌이다. 가는 집마다 협상해야 하게 생겼다. 그나마 배송비로 타협이 되면 손해를 조금은 감수할 수 있지만, 수취 거부를 하면 영락없이 가구 원가를 변상해 주어야 한다. 가는 집마다 협상하다 보니 일곱 시가 훌쩍 넘어 버렸다. 받는 집도 있고 반송하는 집도 있다. 배송비를 받지 못하니 가는 집마다 손해가 막심하다. 반품하는 집은 더욱 막심하다. 일곱 시가 넘으니 아내로부터 전화가 줄기차게 걸려온다. 아직 멀었다 하니 아내가 볼멘소리로 투덜댄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진짜 몰라? 빨리……."
전화를 확 끊어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짜증 나 죽겠는데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게 뭐람? 화를 내면서 전화를 끊으니 이번엔 아들놈으로부터 전화가 온다. 받지 않으니 딸한테서 전화가 온다. 아 정말 이것들이 단체로 약 올리나…….
마지막 집에 가는데 늦어도 여덟 시까지 들어오라는 아내의 명령이 무색하게 여덟 시가 훌쩍 지나버렸다. 물건을 확인해보라는 나의 전화에 책상 주인이 내려와 물건을 살피는데 저 저번 집부터 꿀렁거리던 속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낮에 너무 더워 갈증을 못 이기고 여학생이 건넸던 두유를 마신 게 탈이 난 모양이다. 점점 뒤쪽에 힘이 들어가고 얼굴은 샛노랗게 변해 간다. 협상이고 뭐고 머릿속에 가득한 건 오직 하나, 화장실뿐이다. 타협을 포기한다. 그냥 새 물건 받으라고 해놓고 아파트 관리실 화장실로 줄행랑을 친다. 관리실 문고리를 잡아당기는 순간, 아! 절망이다. 굳게 잠긴 현관문 앞에 좌절한다. 똥줄이 타들어 간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말인가 보다. 할 수 없이 차에 올라타 주유소를 찾는데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눈앞에 주유소가 보이는데 적색 신호에 딱 걸렸다. 2분이라는 시간이 이렇게 긴 줄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폭발 직전이다. 엉덩이를 반쯤 들고 엉거주춤 한 자세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또다시 전화벨이 울린다. 발신자를 확인하니 딸이다. 딸 바보인데도 불구하고 핸드폰을 집어 던진다. 지금 내 상황이 어떤지나 알아? 잘하면 옷에 쌀 거라고… 얼굴이 붉어졌다. 새파래졌다, 를 반복한다. 이젠 숫제 두 다리를 베베 꼰 상태다. 죽어도 바뀔 것 같지 않던 신호가 바뀐다. 주유소 앞 갓길에 차를 세우고 주유소 화장실로 뛴다. 아니 뛴다기보다는 아예 돌진한다는 말이 맞겠다.
마침내 다다른 화장실, 활화산 같은 거시기들이 쏟아진다. 정말 1초만 딱 1초만 늦었어도 옷에다 일을 치렀을 거다. 속을 비워놓고 보니 천국이 따로 없다. 묘한 쾌감이 밀려온다. 하! 맞아 이게 바로 천국이지 무엇이 천국이랴. 속을 비우고 다급한 마음이 사라지니 화물칸에 잔뜩 실려 있는 반품 물건들이 눈에 들어온다. 한숨이 나온다. 이게 다 얼마를 변상해야 하는 거야. 계산을 해보니 대략 47만 원 정도다. 17만 원 벌러 나왔다가 47만 원을 물어주게 생겼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 문득 지난 10여 년 동안 물어주었던 일들이 스치듯이 지나갔다.
“아저씨 장판이 긁혔어요. 어떡하실 거예요.” 30만 원을 물어줬다.
“아저씨, 벽지가 찢어졌어요. 어떡하실 거예요.” 20만 원을 물어줬다.
“아저씨, 가구가 긁혔어요. 어떡하실 거예요.” 가구값을 물어줬다.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하여튼 지난달에는 현관에 내려놓은 가구를 자신들이 실수로 넘어뜨려 깨 놓은 신발장 값을 고스란히 변상했다. 반은 내 실수고 반은 누명이다. 누가 장판을 긁었는지 벽지를 찢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고객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왜? 고객이 왕이니까, 항변의 여지는 없다. 억울함을 호소한다 해도 변상하거나 책임 소재는 고스란히 배송 기사의 몫이다. 그렇게 변상한 돈이 기천 만원이 넘는다. 그래도 이 일을 놓지 못하는 것은 힘들어도 최소한 우리 네 식구 먹고살 돈은 나오기 때문이다. 특별한 기술도, 많이 배우지 못해서 다른 일자리 찾기가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설령, 다른 일자리를 찾는다 해도 어딘들 고달픔이 없으랴 싶어서 내일이려니 한 것이 벌써 십 년째다. 억울해도 별수 없다. 지난달 찍힌 39만 원의 압박이 또다시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5.
차가 비워져야 마음도 홀가분해지는데 반 차가 넘게 실린 가구 때문에 마음이 무겁다. 울적한 마음에 라디오를 켠다. 교통정보가 흘러나온다.
“오늘 서울에는 한낮에 급작스런 소나기가 내렸는데요. 이 때문에 교통이... 아마도 오늘이 칠월 칠석날이라 견우와 직녀가 흘린 눈물이...”
뭐? 칠월칠석? 견우와 직녀?
아니 그럼 오늘 예고도 없이 소나기가 줄기차게 내린 것이 너희들 사랑놀이 때문이었단 말이냐? 갑자기 화가 치솟는다. 아니 눈물을 흘리려면 다른 데 가서 흘리던가, 왜 하필이면 내 차에 쏟아부었냐고요?
그렇단 말이지? 그렇단 말이지? 이게 다 너네들 사랑놀이 때문에 내 옷도 젖고, 차도 젖고 가구도 몽땅 젖었단 말이지? 어디 한 번 두고 보자. 견우와 직녀 너희 둘 말이야. 씩씩거리면서 핸드폰을 들여다보는데 딸한테서 한 통의 문자가 찍혀 있다.
“아빠, 집에 들어오기 10분 전에 문자나 전화해 줘.”
내가 도통 전화를 받지 않으니 문자를 남긴 모양이다. 30분 뒤쯤이면 도착할 거라고 문자를 남기고 집에 도착해 보니 아무도 없는지 불이 꺼져 있다.
아니, 이것들이 그렇게 줄기차게 전화해 대더니 정작 들어오니까 아무도 없단 말이야? 이런 생각을 하면서 안방 문을 여는데 폭죽이 터진다. 놀란 건 둘째 치고 너무 어이가 없어서 뭐 하는 짓들이냐고 화를 내려는데 아내와 딸과 아들이 노래를 부른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뭐, 생일? 내 생일? 아 그렇구나. 생각해 보니 오늘이 내 생일이다. 아내랑 살면서 생일상 같은 건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 아내도 맞벌이하다 보니 무심결에 지나쳤다가 꼭 며칠이 지나서야 내 생일을 기억해 내곤 항상 미안해 했다. 그래서 올해만큼은 벼르고 벼뤘단다. 어떻게든 생일상 차려주고 싶어서, 딸도 매년 잊고 지나친 것이 미안해서 오늘만큼은 아버지의 생일을 축하해 주고 싶어서 아르바이트도 나가지 않고 기다렸단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전화 곱게 받을 걸,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근사한 생일상을 받고 딸과 아들로부터 처음(꼭 지나고 나서 받았다.)으로 생일선물을 받았다. 행복한 시간이 지나고 잠자리에 드는데 견우와 직녀가 생각이 났다.
“음, 그러니까 너희들, 오늘 나를 그렇게 흠씬 두들겨 팬 것이 결국 생일빵이란 말이지? 생일 빵치고는 너무 요란스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기다려 봐, 반드시 복수 해 줄 테니까, 하하하하.”
속으로 킥킥대며 복수할 방법을 생각하다 잠이 들었다. 이렇게 파란만장한 나의 하루가 지났다.
6.
며칠이 흘러 일요일이 되었다. 나는 티브이를 잘 보지 않지만, 복면가왕만큼은 반드시 본방사수를 할 만큼 왕 시청자다. 한참을 복면가왕에 빠져 있는데 어라, 견우가 나오네, 그러고 보니 견우의 듀엣곡 라이벌이었던 직녀는 지난주에 탈락했고 견우가 2라운드에 올라왔었다. 오! 그래 견우 네가 올라왔다 이거지?
나는 견우의 얼굴이 보이자마자 견우의 라이벌에게 무조건적인 응원을 하기 시작했다. 어라, 그런데 이 견우 아저씨 생각보다 노래를 잘하네. 가왕 결정전까지 올라왔네. 그래도 좋다. 내겐 든든한 응원자 에헤라디오가 있으니까, 그때부터 나는 목이 터져라 에헤라디오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견우가 나중에 방탄소년단의 리드보컬이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가면 속에 숨겨진 얼굴이 누구건 상관없다. 노래를 잘 불러도 못 불러도 상관없다. 내가 미운 건 오직 견우, 내 생일에 신나게 생일빵을 날린 견우 자체가 미울 뿐이다. 아까운 내 돈 47만 원에 대한 복수다. 큭큭큭...... 떨어져라 견우, 이겨라 에헤라디오, 그리고 마침내 결과 발표,
앗싸! 에헤라디오가 이겼다. 내가 응원하던 에헤라디오님이 내친김에 가왕 자리까지 빼앗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견우님이 떨어졌다. 에헤라, 신난다. 에헤라디요~ 에헤라디오님 만세! 복면가왕 만세다.
-끝-
첫댓글 글을 읽으면서 가구전문 택배기사의 힘든 일상이 느껴져 마음이 아프네요.
세상엔 참 고약한 고객도 있는데, 저런 사람들은 세상의 나락으로 떨어져,
본인이 그런일을 겪어보는 벌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가구택배기사의 애로사항을 절실히 느끼면서
오늘밤은 애로영화 한편 감상해 봐야 겠습니다.
ㅋㅋ 울 회장님은 하루라도 아재개그 안하시뮌 입안에 가시가 돋을것 같아요.
덕분에 제가 웃습니다 ㅎㅎ
오는밤 아들도 없는데 사랑하는 아내랑 으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