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충실한 조력자가 되고 싶습니다.
전 남편과의 이혼은 제 인생 처음 맛보는 실패였고 좌절이었습니다. 세 살배기 딸 아이를 앞에 앉혀 놓고 이 험난한 세상을 여자 홀로 어이 살아가야 할지 고민하던 나는 사촌 언니가 살고 있는 한국에 가기로 했습니다.
1998년 나는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비행기에 몸을 실은 나는 꿈이 있었습니다. 희망이 있었습니다. 딸아이와 함께 꿈꾸는 무지갯빛 미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7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제로드노드 나착도르지 오건토야라는 내 이름은 서서히 잊혀져 갔고 그 긴 이름 대신 둘러붙은 이름표는 불법체류 노동자였습니다.
불법체류 노동자로 쫓기는 삶을 살면서도 언젠가 만나게 될 딸아이를 생각하며 참고 또 참았습니다. 고향산천에 대한 그리움을 참았고 부모 형제에 대한 그리움을 참았고 딸아이에 대한 그리움을 참았고 열악하기 그지없는 불법체류 노동자의 고단한 삶을 참았습니다. 그렇게 참고 견디며 악착같이 돈을 모으다 보니 울란바토르에 작은 집 한 채를 마련할 수 있었고 또 통장에 천만 원이라는 큰돈도 모을 수 있었습니다.
동생이 대학 졸업할 때까지 학비를 대 주었었고 딸은 어느덧 초등학생이 되어 몽골 울란바토르에 있는 사립 러시아학교에 다닐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타국에서 불법체류 노동자로 산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디선가 법무부 버스가 나타나면 우리는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논으로 밭으로 남의 집 헛간으로 달아나기 바빴습니다. 나 또한 담벼락을 뛰어넘어 도망치다 발목이 접질린 적이 있었습니다. 도망칠 때는 아픈 줄도 몰랐는데 일이 끝나고 보나 너무 아파서 며칠을 절뚝거리며 회사에 출근했더랬습니다.
너무 힘이 들어 그만 포기하고 몽골로 돌아가자고 마음먹고 있을 때 지금의 남편을 만났습니다. 전 부인과 사별한 후 혼자 살고 있던 남편은 다행히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2006년 지금의 남편과 혼인 신고를 하고 2007년엔 예쁜 아들도 태어났습니다. 인쇄공장에 다니던 남편의 월급은 그야말로 박봉이었습니다. 170만 원 정도를 받았는데 월세에 아들과 딸 양육비에 생활비까지 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습니다. 나 또한 아이를 키우느라 일할 수 없는 처지였기에 부족한 금액은 카드 대출로 메꿀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이가 세 살 무렵에 남편은 가구 택배 일을 시작했습니다. 결혼 전 모아 두었던 천만 원은 남편 차 사는 데 보탰습니다.
1t 차에 가구를 싣고 가정집에 배달하는 일이었는데 키 170에 몸무게 60㎏의 가냘픈 몸으로 가구를 등에 지고 나르는 것이 너무나 안쓰러웠습니다. 웬만한 막노동 못지않은 배달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파김치가 되어 뻗어버리는 남편을 돕겠다고 따라나선 어느 날, 예의 없는 고객의 황당한 갑질을 보면서 마음이 참 많이 아팠습니다. 품목이 가구이다 보니 집안까지 들어가야 하는데 쓰레기 치우고 깨끗이 닦은 후에 놓아달라는 사람, 자신이 치워야 할 폐가구를 남편보고 버려달라고 하는 사람, 가구가 워낙 무거워서 손수레에 실어서 이동하는데 방바닥이 지저분해진다고 소리지르는 사람, 심지어 더러운 전동드라이버를 가구 위에 올려놓았다고 고함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굳이 이런 일 해야겠냐고 다른 일 알아보면 안 되겠냐고 남편에게 따지듯이 묻자 남편은 “원래 남자들 일이 다 이래.”라며 시큰둥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날 이후 나는 더는 남편의 일터에 따라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마음이 너무 아팠으니까요.
남편은 정말이지 쉬지 않고 일했습니다. 대부분의 택배 일이 그렇듯이 가구 택배 일 또한 나르는 만큼 돈을 가져가는 것이기에 남편은 새벽에 출근해서 저녁 아홉 시에나 되어야 퇴근 할 수 있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공장에 다니던 때보다는 소득이 높아져서 그때 생긴 빚을 조금씩이나마 갚아나갈 수 있었습니다. 빚을 갚으랴, 자식들 키우랴, 남편 혼자 애를 쓰는 것에 조금이라도 도와주고 싶은 나는 몽골에 있는 집을 팔아 장사를 해 보기로 했습니다.
처음엔 완강히 반대하던 남편은 나의 끈질긴 설득에 끝내 허락해 주었습니다. 집을 팔아 4천만 원을 마련했고 남편은 월세 보증금에서 대출받아 천만 원을 보탰습니다. 포천 시내에 있는 건물 3층을 얻어 떼드쓰(손님을 위대하게라는 뜻의 몽골어) 라는 간판을 걸고 몽골 식당을 차렸습니다. 식당 장사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몰랐었습니다.
남자를 상대로 하는 장사가 이렇게 험악하리라곤 상상도 못 했습니다. 과격하기로 소문난 몽골 남정네들은 술만 먹었다 하면 서로 싸우기 일쑤였고 사흘이 멀다 하고 가게를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돈벌이가 나쁘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가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내게는 견디기 힘든 시련이었습니다. 특히 술 취한 남자들이 치근덕대며 몸이라도 만질라치면 나도 모르게 소름이 끼치곤 했습니다. 밥과 술만 팔면 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남자들은 웃음까지 팔기를 원했습니다. 남편과 자녀가 있는 나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한 달도 못 되어 회의감이 밀려들었고 스트레스는 산처럼 쌓여만 갔습니다. 두 달 무렵부터는 급기야 우울증까지 생기게 되었습니다. 더는 가게에 나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 집안에 멍하니 앉아만 있는 나를 보고 남편은 하루라도 빨리 가게 정리하자며 건물주에게 전화를 걸어 보증금 5백만 원 포기할 테니 계약 해지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한 달 후 가게가 다른 사람에게 인수되어 가게를 접을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 건물주가 좋은 사람이라 보증금은 돌려주었지만, 그 외 투자금 5천만 원은 고스란히 날려 먹고 만 셈입니다.
지나고 보니 허무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모은 돈인데, 만리타향 타국에서 먹을 거 안 먹고 입을 거 안 입고 7년 동안 악착같이 모은 돈인데 단 두 달 만에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가게를 접고 나서도 우울증은 점점 심해져 갔습니다. 우울증을 달랠 길 없어 술에 의지했습니다. 친구들과 밤새 술을 마셨습니다. 때론 새벽 한 시에, 때론 아침 해가 뜨면 집에 들어오는 일도 잦아졌습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청하다가도 벌떡벌떡 일어서곤 했습니다.
아! 어떻게 모은 돈인데……. 단 두 달 만에 이렇게 허무하게
잠을 자다가도 이불을 걷어차고 우두커니 앉아 넋 놓기 일쑤였습니다. 방황의 날들이 길어질수록 남편과 아이들과의 거리도 멀어져 갔습니다. 사람 좋은 남편은 내가 친구들과 밤새 술을 마시고 다음 날 아침에 만취 상태로 기어들어 와도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없으면 딸과 아들을 챙기는 건 오로지 남편의 몫이었습니다.
나의 방황이 길어서였을까요? 여섯 살 된 아들이 어느 날부터 밤만 되면 배를 부여잡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놀란 남편과 나는 하루를 멀다 하고 애를 데리고 병원응급실을 찾았습니다. 성모병원, 대학병원, 우리병원, 등등 수도 없이 많은 병원을 떠돌았지만, 검사결과 이상 없다는 대답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야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습니다. 내가 방황하는 동안 나의 부재로 고통받는 우리 가족들……. 아들의 병명을 찾는 데까지 그 후로 6개월이나 되는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10만 분의 1 확률로 발생하는 위장장애 희소병, 발병 원인도 알 수 없고 딱히 치료법도 없는, 자연치유만이 유일하며 당뇨병처럼 약물에 의존해야 하는 병,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악성이 아니라 성장에 큰 문제는 없을 거라는…. 아픔과 기쁨이 공존하는 병이 아들이 안고 있는 병입니다.
아들의 병 앞에서 지나간 일은 잊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과거는 바뀌지 않으니 미래에 전념하기로 했습니다. 장사가 내 체질이 아니니 박봉이더라도 공장에 나가 성실하게 일해서 남편의 충실한 조력자가 되기로 했습니다.
2012년 한국에서 처음 시작한 장사를 처절하게 실패한 후 1년여의 방황과 아들의 발병,
그 후 또다시 7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나는 가구 공장을 다니며 정말 성실하게 욕심 없이 살아왔습니다. 7년 동안 죽기 살기로 모았다가 한 방에 날려버린 그 돈을 다시 모으는 데까지 또다시 7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러버렸네요. 지난달 코로나로 인해 일요일도 쉬지 못하고 일하는 남편에게 힘내라는 의미로 천만 원이 찍힌 통장 사진을 보내줬습니다.
남편과 함께 술 한잔을 기울입니다. 남편이 자신의 꿈을 이야기합니다.
“앞으로 5년 뒤엔 집을 살 거야, 지금 있는 보증금이랑 적금 합해서 1억 정도 마련해 놓고 5천만 원 정도 대출받으면 충분히 집 살 수 있을 거야, 60까지 대출금 다 갚고 70세가 되면 집은 역모기지론 주택연금으로 돌릴 거야, 거기에 노인연금이랑 국민연금 합하면 노후문제는 해결될 거야. 국민연금 65세까지 내면 90만 원 정도 나올 텐데 나 먼저 죽으면 당신은 그 돈의 반밖에 못 받아. 그래서 주택연금 신청하려고 하는 거야. 집 물려주는 거보다 애들한테 피해 안 주는 게 더 중요하잖아.”
남편의 꿈이 참 소박합니다. 나는 남편의 말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나 또한 남편의 말에 적극적으로 공감하며 남편의 충실한 조력자가 되고자 합니다. 남편은 여전히 가구 택배 일을 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13년 전 열네 시간의 살인적 근무는 아니지만 지금도 아침 일곱 시에 출근해서 저녁 여덟 시에 퇴근하고 있습니다. 골목길 배달임에도 불구하고 1년에 4만 킬로미터 이상 주행하는 강도 높은 노동입니다. 덕분에 1t 화물차는 4년에 한 번꼴로 주기적으로 교체해 주어야 합니다.
고난한 세월을 지나 지금은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었지만, 당신의 소박한 꿈을 응원하기 위한 충실한 조력자로서 글을 올려봅니다.
첫댓글 들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원본과 방송내용은 완전히 다릅니다. 수기를 드라마로 각색했으니까요. 아무튼 이 글이 원본이고 상품으로는 구두교환권과 주유권 받았습니다.
잘 읽었어요. 다시한번 축하드리고요~~소설이 아닌 수기니까 글쓴이는 사모님? 그렇다면 구두도 여자 구두겠지요?
감사합니다. 윤아엄마가 쓴건 아니고 윤아엄마와 상의하여 윤아엄마 이야기를 윤아아빠가 쓴건데 윤아엄마의 검열이 심해서 윤아아빠가 힘들었다는 후일담이 있었나~ 그런것 같습니다^^
대단한 삼식씨!
이제 부인의 조력을 받아 희망찬 미래를 열매 맺는 일만 남았네요.
그동안 숱한 고생 어려움을 이겨낸 삼식씨에게 큰박수를 보냅니다!!
감사합니다. 부인의 조력을 받아 이만큼 컸다는걸 부인 할 수가 없네요^^
@우리윤아 부인하겠지만, 부인이 남의 편을 많이 들지요. 남편
참 열심히 사셨고 고생도 많으시네요...여전히...하지만 힘내시구요~글도 더 꾸준히 쓰세요~!!
고맙습니다 민숙 시인님 열심히 쓸게요^^~